경기도/안성시

안성...최규서 어서각, 탑신석

임병기(선과) 2018. 7. 25.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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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서 어서각 崔奎瑞 御書閣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최규서(崔奎瑞 1650-1735)선생에 내린 영조의 어서(御書)와 영정(影幀)을 모신 정각(旌閣)이다. 영조는 충정공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친필로 쓴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御書)를 하사(下賜)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정각이 선 자리에 1915년 미국 대사관이 들어서게 되어 부득이 어서(御書)를 공의 묘소가 있는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모신 것이다.

 

현재 어서각(御書閣)에는 영조의 어서, 충정공(忠貞公)의 위패(位牌), 영정(影幀), 비망기(備忘記) 등을 봉안(奉安)해 놓았으며 매년 음력 10월 6일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최규서 (1650 ∼ 1735)

 

"경종2년(1722) 12월, 소론의 영수로 떠올라 노론4대신을 내치는데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힘을 합했던 최규서가, 조태구의 후임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고려때 해동공자로 명성이 높던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본관이 해주, 세종의 한글창제를 극구 반대했던 청백리 최만리(崔萬理)의 9대손이며, 선조때 시인으로 대문장가였던 최경창(崔慶昌)의 현손, 아버지는 현감 최석유(崔碩儒),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최규서는 숙종6년(1680) 31세때 문과에 올라 승차가 매우 순조로와, 급제 9년만에 대사간이 되었는데, 그 무렵 숙종이 희빈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려하자 강력히 반대, 그의 기개를 보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이조참의·대사성·부제학·대사헌·대제학을 차례로 역임하고,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숙종37년(1711) 판돈령부사로 예문관제학을 겸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무렵의 혼탁한 당파싸움에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관직을 털어버리고 향리에 은거, 나머지 여생을 보내려하였다.


경종즉위년(1721) 왕이 바뀌어 정국을 주도했던 노론이 쇠퇴하자 최규서는 소론의 영수로 추대 되어 우의정에 발탁 되고, 노론이 도모한 세제(世弟)의 대리청정 모의를 파의(罷議)시킨 뒤, 좌의정을 거쳐 73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던 것이었다. 그는 비록 경종을 받들고 뒤에 영조임금이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선봉이었으나, 같은 당 김일경(金一鏡) 등이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을 때, 온건한 자세를 지켜 대신들이 무더기로 죽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사화가 크게 번지자 그는 마음이 상해 고향의 성묘(省墓)를 핑게삼아 벼슬에서 물러나니, 경종은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를 내려 대접하였다. 봉조하는 관직을 벗었지만 녹봉을 챙겨주어 생계를 돕던 직위였다.


영조4년(1728) 3월, 경기도 용인 어비리(魚肥里)라는 강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 한가롭게 지내던 최규서는, 영조등극과 함께 노론 재집권에 불만을 품은 소론측의 이인좌(李麟佐) 등이 충청도 일원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첩보를 들었다. 이에 최규서는 79세 노구를 이끌고 곧 영조 앞에 달려가 <역정포고의(逆情布告儀)>라는 토난책을 올려 그의 충성심을 들어냈다. 이에 감격한 영조는 비록 지난날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그였지만 그 일은 올곧은 그의 인품 탓으로 이해하고, 난이 평정 되자 맨먼저 최규서를 챙겨 자필로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어서(御書)를 내려 그를 특등공신으로 봉훈하려했다. 그러나 최규서는 한사코 공신작호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일사부정’은 지조와 신의가 하나 되어 사직의 안위를 지켰다는 뜻이었다.


신하가 왕의 친필을 받았을 경우 이를 별도로 모셔야하는데, 최규서는 거처가 비좁고 누추하여 어서를 받들 수가 없었다. 이에 영조는 오늘날의 서울 정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어서각도 지어 최규서가 도성 안으로 들어와 조금 큰집에서 머물도록 특별히 베풀었다.

영조11년 정월, 향년 86의 최규서가 숨을 모았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슬하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나는 천수를 다하고 이승을 떠나는데, 혹 임금께서 국장(國葬)이나 능(陵)을 명하시거든 굳이 사양하라! 장례는 검소하게 치루어 자손들에게 욕됨이 없도록 하라!” 과연 최규서가 세상을 떴다는 전갈을 접한 영조는, 국장을 치를 것과 봉능(奉陵)을 명하였다. 이에 자녀들이 기어이 고인의 유언을 지키고자 사양하니, 사람들은 “최정승은 죽어서도 청백리요 백세(百世)의 사장(師長)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충정공(忠貞公)으로 시호가 내려져 뒤에 영조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경기도 안성 원곡면 지문리에 최규서의 묘소가있고, 그의 유품과 어서, 위패 등을 보관한 어서각이 안성군으로 옮겨져 향토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최규서는 사직을 위해서는 강직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정적을 탓하는데는 사감(私感)에 지우치지 않고 너그러워, 당파의 중심에 섰다가 권력을 빼앗긴 뒤에도 정적들이 그를 모질게 탓하지 않아 무사하였다.


최규서가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더니 사람들은 그의 임기동안을 ‘삼한시대(三閑時代)’였다고 말했다. 세가지가 한가했었다는 뜻이었는데, 부서한(簿書閑) 즉, 관청의 문서가 한가했고, 아전들이 편안하였다하여 공방한(工房閑), 기생들과 악공들이 편안하였다하여 기악한(妓樂閑), 이일은 최규서의 후임 최석정(崔錫鼎)이 호남지방 백성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연려실기술>에 실려 전한다. 최규서가 세상을 등진 3년 뒤, 영조임금은 특명으로 서울 정동 최정승의 거처에 소능사택(少陵祠宅)을 특별히 짓게하여, 자신이 나들이 길에 그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신하를 보내 예를 갖추게하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최규서는 그의 호 간재(艮齋)를 저서명으로 하여 <간재집>15권을 남겼다."...출처/(주)하동신문. 정연가(하동문화원장).2009-11-11 

 

 

일사부정(一絲扶鼎).영조 어필

지조와 신의가 하나 되어 사직의 안위를 지켰다는 의미라고 한다.

 

 

탑신석.

어서각 앞 위치.

석탑 탑신석으로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용인 어비리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하마석

노둣돌의 잘못된 표현이다.

 

그나저나 탑신석을 노둣돌로 사용했다니.

 

 

상부와 우측면 홈은 무엇인지.

 

 

 

용인 동도사 삼층석탑

어비리사지에 있었던 탑으로 1963년 이동저수지 공사로 인해 옮겨왔다.

 

아래 사진

동도사 삼층석탑 초층 탑신석을 비교해보기 바란다.

어서각 석탑 탑신석이 본래 부재이고 동도사 초층탑신석이 후보몰인지.

 

 

용인 동도사. 어비리사지 삼층석탑 초층 탑신

 

 

어석각 팁신석 정보를 나누어 준 이계재(시나브로)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8.07.20

-.어석각 내용은 다음백과를 참조했습니다

-.다음백과에는 간재집艮齋集을 민재집民齋集으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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