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강릉시

강릉...강릉대도호부 관아

임병기(선과) 2018. 6. 9.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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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을 찾아보았더니, 2006년 3월 공사중이어서 발길을 돌린 답사기가 있다.

당시 지정명칭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의 글제목은 '객사문, 칠사당'이어서 관아 보다는 국보로 지정된 객사문을 뵈러 왔으며,도호부관아는 이후 복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릉도호부 대관아

크게 동헌 영역, 임영관 영역, 칠사당 영역으로 구획하여 복원하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객사 용어중

정청을 전대청,우측 익랑을 동대청, 좌측 익랑을 서헌으로 표기하였다.

 

다른 지방 객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 같은데...

 

 

관아 아문

 

 

 

관아

최근에 임영관지에 복원한 건물이다.

 

 

중문

 

 

별당.동헌

관찰사의 근무처와 내아

 

 

임영관臨瀛館

강릉 관아의 객사 건물이다.

객사는 우리 회원들이 익히 인지 하고 있어 략한다.

 

 

임영관 삼문(밖.작은나무님 사진))

1962년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옛 명칭은 ‘강릉 객사문’이었는데, 2010년 4월부터 ‘임영관 삼 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영관 삼문은 막돌 초석위에 배흘림이 뚜렷한 두리기둥을 세운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정측면 3칸*2칸 건물로 칸에는 장판을 달았다.이다.  건립되었던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시대 건물로 전한다.

 

 

승려 범일(梵日)이 관사 터에 절을 지었으나 절은 병화로 소실되고 그 문만이 남아 있다가 그 자리에 부관(府館)을 옮겨 지음으로써 객사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염양사(艶陽寺)의 삼문(三門)을 객사로 옮겨 지었기 때문에 사문(沙門)이라 불려 왔다고도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영관 삼문(안)

 

 

(2006.03.14)

 

2006년에는 공민왕이 쓴 임영관(臨瀛館) 현판이 삼문에 걸려 있었다.

 

 

중대청

고려시대 양식의 건물로 전하며 안내문에는 "관찰사의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라고 표기하고 있다.

 

순력巡歷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임영관臨瀛館

 

 

 

임영관(臨瀛館)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로 알려져 있다.

 

 

정청,우익랑

 

 

우익랑

 

 

정청

 

 

망궐례望闕禮

객사 정청에서 궁궐을 향하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각 지방의 원이 궐패에 절을 하던 의식으로 왕과 궁궐의 상징인 궐자를 나무에 새긴 패를 만들어 모시고 예를 올렸다. 대체로 근무지에서 왕과 왕비의 생일, 설, 단오, 한식, 추석, 동지 등 명절날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좌익랑

 

 

 

의운루倚雲樓

의운루에 관한 기록이 신동국여지승람의 박시형의 운금루기문에 실려 있다.

 

이름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사방에 알려져서, 고관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사대부 누구나 그 지역에 한번 가서 평소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인 것으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 동쪽에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 호수와 산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것은 이곳의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 그중에서도 한두 가지를 든다면, 관도(官道)에 있는 누각은 의운(倚雲)이라 현판하였고, 연당(蓮塘)에 있는 누각은 이름이 운금(雲錦)이다. 동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정자는 한송(寒松)이며, 북쪽으로 호수에 가까운 누대는 경포(鏡浦)다. 이것이 모두 명승의 으뜸이다.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술 마시며 시가를 읊고, 강산에 취미를 붙이고 우주에 눈을 들어 회포를 헤치고 기상을 펴는 곳이다

 

 

 

 

칠사당

 

 

칠사당七事堂

아니 그래도 서울 종묘 정전의 칠사당七祀堂이 연상되는데 금줄이 걸려 있어 의아스럽다.

관아 정문으로 출입하라는 안내문을 설치하는 것이 좋을텐데.

 

 

(2006.03.14)

 

 

(2006.03.14)

 

 

칠사당七事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조선시대의 관공서 건물로서 1632년(인조 10) 3월에 중건하고, 1726년(영조 2)에 확장·중수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칠사(七事) 죽 호구(戶口)의 정리, 농상(農桑)의 진흥, 군정(軍政)의 엄정, 학문의 흥기, 부세(賦稅)의 균정(均正), 송사(訟事)의 간명(簡明), 간활(奸猾)의 금식(禁息) 등 일곱 가지 정사(政事)를 보았다 하여 칠사당이라 이름하였다.

 

1866년(고종 3) 한때 진위대(鎭衛隊)의 청사로 쓰이다가, 이듬해에 불이 난 것을 부사 조명하가 다시 중수하였다. 건물의 평면 형태는 ㄱㄱ자형으로 이루어졌는데, 정면 왼쪽에서 누마루가 연접하여 세워졌다.

 

 

 

 

중앙 3칸은 대청,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툇마루를 놓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누마루

겹처마, 팔작지붕, 3면에는 4분합의 띠살문을 달고 있다. 누마루의 연결 부분에는 다락방을 두었고, 본 건물의 왼쪽 한칸은 온돌방을 내었으며, 외부 문은 기둥 사이마다 쌍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6·25전쟁 후 강릉시장의 관사로 사용하다가, 1980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2018.05.20

(강릉시청,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위키백과사전을 참조, 발췌, 첨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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