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성균관

임병기(선과) 2018. 6. 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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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많은 향교, 서원을 답사하였으면서도 성균관을 들리지 않아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오랜 숙제를 이제 풀었다.

 

 

신삼문

현재는 출입이 되지 않으며, 측면 또는 명륜당 뒤편을 통해 성균관으로 출입 할 수 있다.

 

성균관...성균관 홈페이지에서 발췌

 

위치와 연혁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제2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학제

성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을 하여 일일이 적을 수는 없으나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정2품 지사(知事) 1인과 종2품 동(同)지사 2인은 겸관(兼官)이었다. 정3품 대사성(大司成) 1인, 종3품 사성 2인, 정4품 사예(司藝) 3인, 정5품 직강(直講) 4인, 정6품 전적(典籍) 13인, 정7품 박사(博士) 3인, 정8품 학정(學正) 3인, 학유(學諭) 3인, 정9품 학록(學錄) 3인으로 교수직이 조선 초기의 22인에서 38인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속대전 續大典』에 의하면 제주(祭酒)가 정3품관으로 설치되어 1ㆍ2품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때의 『태학지 太學志』에는 지사(정2품에서 정1품까지)를 대제학(大提學)이 겸직토록 하였고,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시대에 따라 다른데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말기 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ㆍ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初試:漢城와 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교과과정 맟 교수방법

주요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밖에 과문(科文:詩ㆍ賦ㆍ訟ㆍ策ㆍ義ㆍ疑 등)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ㆍ불경(佛經)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수 방법은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臺諫:司憲府ㆍ司諫院)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파견하여 성균관의 교관과 함께 학생에게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논어재(論語齋)에 올리고, 통하지 못한 자는 통할 때까지 대학재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孟子齋)ㆍ중용재(中庸齋)ㆍ시재(詩齋)ㆍ서재(書齋)ㆍ역재(易齋)로 차례차례 진재(進齋)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서 오경에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고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분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시대에 따라서 원칙으로만 지켜지고 적당한 방법으로 교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험 과목과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서 경서(經書)와 사장(詞章)의 학습 비중이 이에 맞추어 달라진 것이다. 교수와 학생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교수 방식과 개별 지도에 치중하고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유생의 일과와 자치활동

태학지』에는 유생들의 일과 및 지켜야 할 법도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한다. 일과는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안정하게 밝아서 책을 읽는다.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마치고 퇴장한다. 다음에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나면 입정(入庭)하여 상읍례(相揖禮)하고 그것이 끝나면 자기 재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고 인사를 교환한다.

 

유생이 교수에게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을 행한다. 북소리가 두 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란(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 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ㆍ『맹자』는 각 4개월, 『시경』ㆍ『서경』ㆍ『춘추』는 각 5개월, 『주역』ㆍ『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성균관의 배치

전묘후학의 전형으로 제향공간인 전면에 제향공간인 대성전, 후면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두었으며, 제향과 강학에 필요한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 영역

하마비와 탕평비각

 

 

하마비

대소인원과차자계하마 大小官吏過此者階下馬

 

 

후면

정덕14년 4월 일 건 正德 14年 4月 日 建

1519년 건립하였다.

 

 

탕평비蕩平碑

1742년(영조 18)에 건립한 비

영조가 직접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주이불차 내군자지공심 차이불주 식소이사의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하연대 下輦臺

임금이 성균관을 들릴 때 가마를 내려 놓던 장소

 

 

동삼문

하연대에서 내린 임금이 출입하던 문으로 평상시에는 닫혀 있다.

 

 

신삼문

대성전에서 바라본 신삼문

 

 

묘정비각

대성전 중정에 위치

 

 

묘정비廟庭碑

1398년(태조 7) 태조가 창건한 서울 문묘(성균관)의 연혁을 기록한 묘정비.

묘정비는 1409년(태종 9) 처음 세웠다. 당시 예문관 제학이었던 변계량이 왕의 명을 받아 비문을 지었는데, 비문에는 문묘의 창건과 중건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문묘를 폐쇄하려 했던 연산군이 묘정비를 도성문 밖으로 버렸으나 1507년(중종 2) 본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묘정비각은 1511년(중종 6) 처음 조성되었는데, 이는 묘정비의 글씨가 비바람을 맞아 마모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임란으로 비석과 비각이 훼손되었으며, 1626년(인조 4) 다시 세웠다. 이때 변계량의 옛 글을 다시 새기기로 하였는데 글은 이정구가 짓고, 글씨 이홍주가 쓰고, 제액은 김상용이 썼다.

 

 

 

신삼문의 잡상

 

 

대성전

조선 초에 완비를 본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선조 34년(1601)에 재건에 착수하여 6년이 지난 후대 체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말기의 고종 때까지 새로운 시설과 개수 확장 사업을 계속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鄕校)도 그 내용이 같았다. 건물의 규모는 96칸(間)이다. 문묘에서 향사(享祀)되는 인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달랐고 조선시대에서도 전ㆍ후기가 다르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와 4성(四聖:顔子ㆍ曾子ㆍ子思子ㆍ孟子)과 공문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宋)나라 6현(賢)을 모셨고, 동ㆍ서무(東ㆍ西廡)에는 주ㆍ한(漢)ㆍ진(晋)ㆍ당(唐)ㆍ원(元)ㆍ송나라 94위(位)와 우리나라 신라ㆍ고려ㆍ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뒤에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봉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과거를 치루는 알성문과(謁聖文科)도 있었다....출처/성균관 홈

 

 

성균관 대성전은 남북으로 4영(楹), 동서로 5영의 20칸 규모에 전당후실(前堂後室) 양식이다. 남향으로 직통한 신로(神路) 옆에 어로(御路)가 어삼문(御三門)으로 통했으며, 동계(東階)·서계(西階)가 축조되었다.

 

 

석전대제釋奠大祭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太祖) 7년(1398년),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해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했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부자를 비롯해서 4성, 10철과 송조6현 등 21위를 봉안했고, 동·서무에 우리 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 94위 등을 봉안하여 매년 춘추 두 차례 석전을 받들어 행하였다.

 

그러나 일제치하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과 10월의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五聖位)와 송조2현(宋朝二賢)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을 매안(埋安)하고 우리 나라 18현을 대성전에 승봉종향(陞奉從享)하고 춘추석전을 폐하고 탄일(誕日)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석전을 봉행하다가 2007년부터 공부자(孔夫子)의 기신일(忌辰日)을 양력(陽歷)으로 환산한 5월 11일에 춘기석전(春期釋奠)을 봉행하고, 탄강일(誕降日)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봉행하였다.

 

그러나 2014년부터 석전대제에 관하여 문화재청의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라”는 공문에 따라 성균관은 2014년 추기 석전대제부터 일무와 아악을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며, 예법에 따라 2᛫8 상정(上丁) 석전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2014년 추기석전부터 시행하였다.

 

 

서무西廡

 

 

동무東廡

 

 

대성전 은행나무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행단(杏壇)이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의 대성전 앞에 소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文廟)가 있는 성균관(成均館) 안에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를 심고 세심하게 관리해왔다.

 

성균관 대성전 은행나무

수령 450±50년의 노거수(老巨樹)임이 확인되었다.

 

성균관의 은행나무와 관련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송자대전』에 중종조의 문신인 윤탁(尹倬, 1472~1534)이 행단(杏壇) 제도를 모방하여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강당 앞 뜰에 식재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는데, 사료상의 식재된 시점과 측량된 과학적 수령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상기 사료에서 언급되고 있는 은행나무 2그루가 금번에 시 기념물로 지정하고자 하는 <성균관 대성전 은행나무>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대성전 은행나무와 관련해서는 『승정원일기』나 『숙종실록』 등 실록 기사에서도 대성전의 은행나무의 가지가 부러져 성균관 건물을 손상시킬 때면 국가 차원에서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성균관 건물들을 보수했다는 사실들이 확인되고 있어 유교적 학문을 닦는 도량을 상징하는 은행나무가 당시 국가적으로 어느 정도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고, 또 관리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수복청守僕廳

문묘의 관리를 담당하던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제기고 북쪽에 위치한다.

재학당(載學堂)이나 근관직청(芹官直廳)이라고도 한다.

 

사진 우측 담장 뒤편이 향사에 사용되는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이며,

그 뒤에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물을 검사하고 손질하던 포주庖廚간이 있다.

 

 

제기고 祭器庫

문묘의 향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로 서무의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하였다.

 

 

 

 

 

 

명륜당明倫堂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이자 과거시험장으로 대성전 북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동ㆍ서재는 각 18칸으로 기숙사이며, 육일각(六一閣)은 유학 교육에서 교양 과목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禮ㆍ樂ㆍ射ㆍ御ㆍ書ㆍ數) 가운데서 활쏘기[射]에 관련된 기구를 보관한 곳이다. 이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전한 단련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판은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본당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이며, 좌우 익사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기단에는 본당 앞으로 월대가 있고 좌우 익사 및 월대 정면과 좌우의 돌계단을 통해 기단에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글씨는 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온 학사주지번(朱之蕃)의 작품이다.

 

 

좌익사左翼舍

 

 

우익사右翼舍

 

 

 

명륜당 월대의 비석

 

고종실록(12 책 8 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十二日。 詣文廟, 行酌獻禮。 仍引見四齋掌議、參班儒生。 敎曰: “書院設置, 卽有道學、忠節, 俟百世不易之公議, 然後始可擬議。 而近則不然, 是豈設院之本意乎? 且一人之書院, 或至四五處者, 亦甚無義。 自今爲始, 道學、忠節之公議所愜外, 切勿設置。 而雖有設院之人, 一人一院外, 毋得疊設, 至於謹悉道學、忠節人外, 亦不得妄許, 以爲金石之典。”

 

(1871년 3월 12일, 문묘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이어서 동서재와 사학의 장의를 인견하고 참여한 유생들에게 하교하기를,

 

“서원을 설치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학에 대한 학문이나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백세 후에도 바뀌지 않을 공의가 있어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못하니, 이것이 어떻게 서원을 설치한 본의이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서원이 더러 네다섯 군데에 달하니, 또한 매우 무의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도학의 학문이 깊고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공론에 부합되는 사람 이외에는 일체 설치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설사 서원을 설치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에 한해서 한 서원 외에 중첩하여 설치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도학에 대한 학문과 충성과 절개를 갖춘 사람을 제외하고는 또한 함부로 허락하지 말아서 변함없는 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내용인즉 고종께서 문묘에 친림하여 공부자께 제를 올린 후  성균관과 사학의 장의들을 불러 서원 철폐의 당위성과 폐단에 대해 하교하고 그 내용을 적어놓게 하신 글임이 밝혀진 것이다.

 

 

 

명륜당 월대

 

 

서재西齋

 

 

동재東齋

 

 

육일각 六一閣

군자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 가운데 하나인 궁술을 익히고 이와 관련된 대사례(大射禮)에 쓰이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건물로 존경각 동쪽에 위치한다. 영조 19년(1743)에 영조가 직접 대사례를 행하고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존경각 尊經閣

장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이다. 소장된 장서는 각종 유교 경전과 역사서로 한정되었고, 불교 및 도교와 여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성종 7년(1476)에 창건되어 중중 9년(1514)의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13년(1621)에 중건하였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자 대부분의 장서들이 경성제국대학으로 강제 이관되고, 남은 장서들도 6.25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고직사(庫直舍)
정록청에 드나드는 문간채로 정록청 남쪽에 위치한다. 

전체 4칸 가운데 문간을 중심으로 서쪽 1칸은 사무실로, 동쪽 2칸은 창고로 사용된다.

 

 

정록청(正錄廳)
성균관의 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로 명륜당 서쪽에 위치한다.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하였다.

 

 

진사식당(進士食堂)

유생들이 식사하던 건물

 태조 7년(1398)에 창건된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하였다. 전체 33칸의 건물이 안뜰을 중심으로 장방형의 口자를 이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 주방이 10칸이고 식당이 20칸이며 나머지 3칸은 각기 북쪽의 출입문과 창고를 이루고 있다. 개방시간에도 출입이 통제되는 건물이다.

 

 

비천당(丕闡堂)
강당이나 과거시험장으로 쓰이던 건물.

현종 5년(1664)에 도성 안의 사찰인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을 헐면서 나온 자재를 가져다가 성균관에 비천당과 함께 그 서남쪽으로 벽입재(闢入齋)와 일양재(一兩齋)를 세웠는데, 그 이름은 송시열이 큰 도를 크게 밝힌다(丕闡大猷)는 주희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벽입재와 일양재는 모두 구한말에 파괴되었고, 비천당은 해방 후 한동안 성균관대학의 대학본부로 사용되다가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1988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여유로움이 있는 답사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 나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그래도 놓치고 온 옛님들이 있으니...

 

2018.05.08

(성균관 홈,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다음,네이브,두산백과사전.위키 백과 사전을 참조하여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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