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사직단

임병기(선과) 2018. 6. 5. 07:13
300x250
300x250

 

 

 

사직단社稷壇

사(社)는 토지신(土地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상징한다. 두 신을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다.
옛부터 중국의 천자나 제후 또는 우리나라의 왕이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릴 때는 사직단(社稷壇)을 만들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왔다.

 

국토 없는 나라는 있을 수 없으며 곡식없는 경제는 파탄한다. 또한 백성은 땅없이 하루도 살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굶어죽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사직 또한 영토유지와 백성의 윤택한 삶을 기원하며 국민적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므로 임금과 같은 존귀한 지위에 있어서도 백성과 사직의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따라서 사직은 천자나 제후가 되어 제사하는 제례로서 항상 국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논어(論語)』「선진 先進」편에 의하면, “백성이 있으면 사직이 있다.”고 했고, 『맹자(孟子)』「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편에서는, “무도한 제후가 나타나 만약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경우는 다시 새로운 어진 임금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여기에 비해 가벼운 존재이다.”고 한 것은 사직을 국가 자체로 간주한 표현이다.

즉, 사직은 종묘와 더불어 국가나 조정(朝廷) 자체로 인식해 왔다

 

 

사직단 배치

 

1ㅣ대문 2.사단 3.직단 4.북신문 5.서신문 6.남신문 7.동신문 8.유문 9.신실 10.신위행로 11.향축로 12.어로

 

사직단은 임진왜란으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단만 남았다. 신위는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묻어 보관되었다가 평양으로 옮겨졌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세자가 받들고 황해·강원도 등으로 다니다가 환도해서는 심의겸(沈義謙)의 집에 종묘의 신위와 함께 모셨다. 1596년(선조 29)에 신실을 지어 봉안하였다. 사직단이 완전히 중건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03년(선조 36)에 사직단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608년(선조 41) 종묘가 중건되기 전에 복건된 것으로 보인다.

 

중건된 사직단은 초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따랐지만 높이가 3자 4치이고 유의 한쪽 면의 길이가 22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규모에서 약간 차이가 있었으며 부속 건물의 위치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1783년(정조 7) 편찬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의 「사직서전도(社稷署全圖)」에는 부속 건물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다. 서쪽에 제기고, 재생전, 전사청, 잡물고, 수복방 등이 위치하고 동쪽에 악기고, 안향청, 차장고, 악공청, 부장직소 등이 위치하는 등 양쪽에 퍼져 있었다. 사직에 제사드리고 관리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고 세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사직의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으며 부속 건물 가운데 재실(齋室)로 쓰이던 안향청과 정문만이 남아 있다.

 

 

사직단社稷壇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너비는 2장 5자이고 높이는 3자였다.

壝(사직단을 둘러싼 담장)의 한쪽 면의 길이는 25보(步)였으며, 사방으로 유문幽이 있다. 그 밖으로 다시 네모난 담장이 둘러쌌으며 이 담장에도 역시 사방으로 신문神門(홍살문)이 있다. 특히 홍살문은 모두 문이 하나인데 담장의 북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이 출입하는 문이므로 격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유의 바깥 서남쪽에 신실(神室)이 있고 유의 북문과 담장의 북문 사이에는 국왕이 서 있는 자리인 판위(版位)가 있다.

 

 

사직단

 

사단社壇(동).직단稷壇(서)


조선의 사직 제사는 1년에 3번, 봄·가을 납일(臘日)에 제사를 지내고, 기고(祈告) 제사도 사직에서 지냈다. 주현에서 지내는 사직 제사는 봄·가을 두 번 지냈으며, 국왕 대신 그 지역의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국가’ 자체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었다. 


 

북신문北神門

신문에서 유일하게 삼문三門으로 정문임을 암시한다.

 

향축로香祝路

북문에서 판위를 거쳐 사직단으로이어지는 길

제사에 사용하는 향,축문을 의미한다.

 

판위版位(유문 앞 방형 단)

신실에 보관된 사신위패와 직신위패는 신위행로와 이어진 남유문으로 들어와 사직단에 봉안 한다.

왕은 서신문으로 들어와 판위에서 사직단을 향해 국궁사배하며, 북신문으로 들어온  향을 피워 사신과 직신의 혼魂을 모시고 폐幣(비단)를 올린다.

신실神室(사진 우측상단 전각)

4신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태사太社지신, 태직太稷)지신,후토后土지신, 후직后稷지신.


 

 

신위행로神位行路

위패는 신실神室에서 나와 판위를 거쳐 남유문을 통해 사직단에 봉안된다.

 

서신문. 사진 좌측

남유문. 사진 전면. 사직단 남쪽 판위 앛 낮은 담장에 설치된 문

서유문. 사진에서 서신문과 남유문 사이의 문

북유문. 사진에서 남유문 정면

북신문. 사진에서 멀리 북유문 뒤편 삼문

 

 

석주石主.

직경 30CM.깊이 75CM

사단 계단 위에 볼록하게 돌출된 부분

전국의 사직단 중에서 한양의 사단(社壇)과 석주가 바로 조선의 중심이며, 또한 주인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서신문西神門

 

 

주마간산으로 둘러 본 사직단

그간 밀린 숙제이었던 성균관, 종묘,사직단을 들렸다.

향후에도

조선왕조와 관련된 우리 옛님을 찾는 발걸음이 계속되었으면 좋으련만.

 

*덧붙이는 글

종묘 .자유관람

매주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에 자유관람이 가능하답니다.

우리카페 보금자리님이 알려주셨습니다.


2018.05.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위키백과, 황보근영의 문촌수기를 참조,발췌하였습니다)

 

300x250
300x250

'서울특별시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중앙박물관 대고려전  (0) 2018.12.19
눈 내리는 한양도성에서  (0) 2018.12.19
서울...종묘  (0) 2018.06.04
서울...성균관  (0) 2018.06.03
서울...연세대 야외박물관 석조부재  (0) 2018.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