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예천군

예천...제헌왕후 태실비

임병기(선과) 2018. 4. 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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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오래된 답사객이라면 목각탱과 윤장대를 먼저 떠올리는 가람이다.

 

지금은 윤장대, 목각탱을 갖춘 절집이 우후죽순처럼 늘었지만

윤장대는 용문사만의 자랑이었고, 목각탱도 상주 남장사, 문경 대승사, 남원 실상사 약수암의 보물이었다.

 

오늘은

얼마전 우리카페 세종아빠님이 올린 부도전 연주문 부도를 뵈러 오는 길에 제헌왕후 태실비를 찾았다.

결론적으로 용문사에는 정조대왕의 아들 문효세자의 애기비도 있었지만 사전준비 미비로 돌아온 후에야 알았다.

 

 

부도전

 

태실비는, 부도전 향우측으로 진입 경내로 들어가지 말고 우측 해우소 옆 산길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100여미터 진입

작은 네거리가 나오며, 제헌왕후 태실비는 향 우측이다.

문효세자 애기비는 향좌측 능선길로 올라서면 만날 듯 하다.

 

 

제헌왕후 태실비.

 

답사기를 준비하는 과정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여러 자료에  이 태실비를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태실이라는 설과, 제헌왕후 태실이라는 설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효세자의 애기비를 제헌왕후 태비라는 글도 보였다.

 

이런 오류는 비문만 확인하면 될텐데, 훼손이 심한 탓도 있겠지만

예천군청 홈페이지에는 제헌왕후 태비, 용문사 홈페이지에는 소헌왕후 태비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를 검색 후 재헌왕후 태비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종실록 75권, 성종 8년 1월 5일 갑진 3번째기사 1477년 명 성화(成化) 13년

 

동지사 이승소가 왕비의 태실에 수호군을 정할 것을 아뢰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이승소(李承召)가 아뢰기를 "왕비(王妃)의 태실(胎室)의 수호군(守護軍)은 법에 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중궁의 태실이 경상도 예천(醴泉)에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다시 살펴서, 그 산이 불길(不吉)하거든 길(吉)한 곳으로 옮겨 모시고 수호군을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수호군을 두면 경작(耕作)을 금하는가하니, 이승소가 대답하기를,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경작을 금하면 백성의 폐해가 많을 것이니, 아직 그대로 두도록 하라"하였다.

 

 

 세조실록 30권, 세조 9년 3월 4일 계사 1번째기사 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이극배에게 소헌 왕후 태실과 문종 대왕 태실의 석난간을 봉심토록 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옛 순흥(順興)의 소헌 왕후 태실과 옛 은풍(殷豐의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胎室은 석난간(石欄干)과 전석(磚石)이 조금 물러났으니, 청컨대 풍수 학관(風水學官)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수즙(修葺)하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어찌 반드시 따로 보내야 하겠느냐? 마땅히 도순찰사(都巡察使) 이극배(李克培로 하여금 봉심(奉審)하여서 아뢰게 하라하였다 "

 

즉,성종실록과 세조실록을 보면

분명 예천에는 제헌왕후 태실.순흥에는 소헌왕후 태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태실비

귀부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이수의 앞뒤에는 운룡문雲龍文을 새겼다.

 

1930년대에 발굴 조사된 후,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태항아리의 외호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태항아리의 내호와 지석 등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헌왕후(后. 1455년 윤6월 초1일~1482.08.16)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이다.

 

"폐비 윤씨는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로 어머니는 고령 신씨이다. 외할아버지인 신평은 신숙주의 숙부이다.
윤씨는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1473년 3월 19일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입궐 후 검소하고 온화한 태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실에는 세 명의 대비 즉 정희왕후,안순왕후,소혜왕후가 있었는데, 윤씨는 이들 또한 극진하게 봉양하여 신뢰를 얻었다.

 

윤씨가 입궐한 다음 해인 1474년 4월 성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공혜왕후 한씨가 19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성종은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1476년 7월 11일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삼으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에 따라 윤씨는 같은 해 8월 9일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아버지 윤기견은 영의정으로 추촌되었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왕비가 된 후 4개월 후인 1476년 11월 7일에 연산군(1476~1506)을 낳았다.

윤씨의 좋지 못한 행동들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나타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질투심이 많아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들을 음해했으며 성종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종을 비롯하여 세 명의 대비, 후궁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77년 3월 정희왕후의 명으로 윤씨의 폐비 논의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의 반대로 폐비는 이루어지 않았고, 윤씨가 별궁에서 근신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윤씨는 둘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았으나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또다시 폐비 논의에 휩싸였다. 이때 윤씨는 성종의 후궁들과 대비들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고 성종과의 갈등도 심화된 상태였다. 폐비를 반대하는 의견도 거세게 일었으나, 결국 윤씨는 1479년 6월 2일 폐서인 되어 사가로 쫓겨났다.

 

이후 연산군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성종은 훗날 폐비 윤씨로 인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였다. 성종은 곧이어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들을 불러 폐비윤씨의 처분에 대해 논하였고, 결국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명에 따라 묘비도 세우지 못하고 동대문 밖에 묻혔다가 7년이 지난 1489년에야 ‘윤씨지묘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연산군에 의해 1504년 3월 25일 제헌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도 회릉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는 다시 폐비로 원상복귀되었고 회릉 역시 ‘폐비윤씨지묘’로 격하되었다. 폐비윤씨지묘는 본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현재 경기도 덕양구 원신동의고양 서삼릉 경내로 옮겨져 있다."...출처/두산백과사전

 

 

 

 

 

 

 

비신(전면)

명문을 인위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보인다.

 

 

이수(전면)

 

 비신(후면)

 

 

이수(후면)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의 세조 태실비에도 인위적인 훼손 흔적이 있다.

왕권을 잡는 과정에 대한 민초들의 감정 표출이라고 전하는 것처럼, 폐비윤씨의 훼손 태실비도 그러한 연유로 추측된다.

 

예천에는 문종대왕, 폐비 윤씨, 사도제자, 정조의 왕세자인 문효세자의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근데 이상하게도 공통점이 있으니.

 

태실비에 관심이 없는 답사객들이라도

용문사, 명봉사 답사시에 쉽게 접근 할 수 있으니 들리기를 바란다.

 

 

성주...세종대왕자태실

(예전에 대구일보에 기고한 글)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L7L6&articleno=8723838&categoryId=526102®dt=20121109052948

 

201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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