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예천군

예천...주마산 한천사

임병기(선과) 2017. 12. 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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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본리 석불입상 뵈러 가는 길

한천사를 들렸다.

옛글을 찾아보니 2003년에 들렸지만 사진을 찍지 않았던 시절이라 몇 줄 글만 남아 있다.

 

오류는 차치하고 옛글을 그대로 가져 왔다.

 

"부석사를 좋아한다는 답사 동호회원인 A양에게 부석사가 좋은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다.
사학을 전공한 30대인 그녀의 답은 이외로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보다,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연봉의 파노라마 보다, 오르는 길의 사과밭이 젤로 좋다는 답을 들었었다. 봄이면 사과 꽃이 좋고 여름이면 푸름이 맘에 들며 가을이면 잎이 떨어진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빨간 사과가 시각과 미각을 즐겁게 하며,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에 내려앉은 눈이 좋아서 철마다 찾는다고 했다.

사학 전공자인 그녀에게서는 신라하대의 역사적 배경, 의상의 화엄사상 등을 기대했던 내겐 예상치 못했던 답이었지만, 건축을 전공한 이에게도 무량수전의 고건축의 맛보다 소백을 품은 무량수전의 뜰이 더 멋지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느끼는 바는 전공과 무관함임에 틀림없는가 보다.

그럼 내가 부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자문해보지만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겠다. 내가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도 숱한 답사객이 찬사를 보냈었고, 미술사학의 태두요, 선구자인, 혜곡 최순우 선생이 말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의미도 아직 사무치게 이해하지 못하겠고, 화엄종찰에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의 깊이도 책으로 알지만 몸 속에는 만성 소화불량으로 복부는 늘 팽배해 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잘생긴 당간지주가 날 반기고 무량수전 뜰의 팔각석등 화사석에 돋을 새김된 신중상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우리나라 석등의 시원으로 여겨지며 신라의 전형인 석등 앞 배례석에 서면 아늑하고 푸근하며 날 소리없이 얶매는 끈 때문에 고개 돌려 밀려오는 소백연봉의 물결 파문에 눈 돌릴 한가로움이 사라지는 느낌은 나에게는 현재 진행형이다.

예천의 한천사를 가는 길옆에 펼쳐진 인삼밭과, 사과밭을 지나며 뜬금 없이 부석사를 생각하며 뻐꾸기 울음소리에 젖어 한천사에서 부석사를 떠올리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닌 것이 -'부석사 창건 당시 무량수전의 기둥이 아무리 세워도 서지를 않아 원인을 찾던 중 한천사가 위치한 이 곳의 산이 走馬산 즉 말이 달리는 형국이라 혈을 지르고 한천사를 창건한 후에야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고- 부석사 사적에 기록돼 있음이리라.

 

마을을 통과하여 아니 마을의 제일 위에 있는 듯한 자리의 한천사를 들어서면 화려하게 단장한 대적광전에 기가 죽는 것은 작고 한적한 암자를 떠올리며 순례를 온 나의 사치 라고 꾸짖거나 하는 듯이 낭랑한 비구니의 독경소리가 제자리를 비켜 서있는 삼층석탑에 탑돌이를 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마치 어느 날인가 새벽 도량석에 동참했었다는 착각이 전신을 휘감는다.

 

그런데, 주전각인 유리광전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철조 약사여래불은 어디에 모셔져 있고 대적광전에 비로자나불이 지권인 수인를 하고 좌정하고 계신 것인가? 이상하다? 여기저기의 책에 의하면 한천사는 드물게 유리광전이 주전각이고 사무외인 수인과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주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의 오류, 착각인가?

다른 사찰과 혼동하고 있는 것인가?  비구니 스님의 독경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법당에서 보살님이 나오시길래 보살님 약사여래부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하였더니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년에 불사를 하면서 철조여래 부처님의 손을 지권인으로 바꾸었다'고 하신다.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어도 같은 답이다.

 

사연이야 뭐든 좀처럼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철조여래불은 신라하대 선종의 도입 이후 지방 호족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불상의 형식으로 실상사를 비롯 대부분의 구산선문 사찰에 조성되 있으니 유래가 아주 오래된 부처인데 왜 갑작스레 수인을 바꾸고 법당의 명판을 유리광전에서 대적광전으로 내 걸었을까?

 

본디 지권인이었던 사료를, 흔적을 어디에서 찾았단 말인가?

중생의 병을 구원해주는 약사여래불의 약발이 소진해서인가?

설사 본디의 모습이 그랬더라도 하루아침에 철불의 손을 바꾼 배짱은 누구의 발원인가? 알 수 없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산이 절인지 절이 산인지 구분이 모호하여 기분 좋던 사찰이 몽땅 사라진 현실인데 약사여래불이 비로자나불로 바뀐들 관심 가진 내 놈이 문제지, 다 같은 부처이거늘....

 

산신각에 들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천사를 내려오는 등뒤로 뻐꾸기의 울음이 더욱 처절하게 들리고, 끝날 듯 이어지는 비구니의 독경은 왜 그리 애절하고 처연하게 가슴을 옭아매는지...........?????? "

 

2003.06.07

 

 

2003년에 비해 퍽이나 낯설다.

 

 

삼층석탑

이중기단의 삼층석탑.

지대석 위에 하층기단은 4매부재로 하대저석과 면석을 일 석으로 조성하였으며, 탱주 1기와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하기단 갑석 하부에는 부연을 주었고, 상부에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2단괴임을 조출하였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우주와 1기 탱주를 모각하였고,갑석에도 2단 탑신괴임을 돌렸다.

양주주를 새긴 탑신과 낙수면 물매가 급한 옥개석은 각각 일석이며 상륜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절수구가 있다. 각각 4단 층급받침의 옥개석 추녀의 반전은 전각부에서 급격하다.

 

통일신라 후기 9세기 탑으로 추정된다.

 

 

지대석.하기단 면석,갑석

 

 

상층기단 면석

 

 

탑신. 옥개석 층급.절수구. 전각의 반전

 

 

상륜부.노반과 복발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

소발,육계, 원만 상호,반달형의 긴 눈과 눈썹, 코는 작다.

백호가 표현되어 있고 두 귀는 길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어깨는 당당하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습의는 굵은 선으로 왼손을 거쳐서 밑으로 내려와  무릎위에서 반타원형을 이룬다.

석탑과 동시대인 9세기 후반에 봉안되지 않았을까?

 

 

 

 

 

 

위의 2003년 옛답사기에 의하면 2002년 약사여래에서 비로자나불로 수인으로 바뀌었다.

물론 전각도 그 이전에는 유리광전이었다.

철불의 두 손이 별도로 조성된 까닭으로 결실되어 이러한 현상이 초래된 것 같다.

 

 

사진출처...답사여행의 길잡이10.경북북부.돌베개

 

 

석조부재가 눈에 들어 온다.

 

 

안상이 새겨진 부재

혹 철불좌상의 지대석?

 

 

팔각 대좌

철불의 하대석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석불좌상의 자리이었을까?

 

 

대좌 안상 속 석불좌상

구름위에 천의 자락을 날리시며 합장인 수인이다.

 

 

 

한천사 금동 자물쇠.직지사성보박물관...사진/문화재청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석탑에서 자주 마주치는 한천사에서 발견된 금동 자물쇠이다.

 

 

마지막 방문이 15년이 흘렀다니

비구니스님이 주석하셨던 그 시절의 그런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겨울의 가운데서 뻐꾸기 울음이 들릴듯한...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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