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진주시

진주...용봉산 용암사지

임병기(선과) 2018. 1. 25. 08:38

 

 

 

2008년 2월.

정문부를 배향하는 해주정씨 재실 장덕재章德齋 외삼문 앞은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비연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재실 관리인이 거주하는 관리사에는 병색이 완연한 목소리에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계셨었다.

그래서인지 예전의 용암사지는 입구부터 전체적으로 스산하고 찬기운이 사지에 내려 앉은 분위기었다.

오늘은 관리동을 철거한 까닭인지 소설 한편 탈고하고픈 폐사지 고유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비연문斐然門

옛답사기에 실린  겁없는 묘사가 젊은 날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오는 길.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현판이 보인다. 비연문(斐然門). 의미가 뭘까?  李白의 싯구에서 斐然이 보이지만 현판의 상징과 일치하는지 판단할 식견은 없다. 다만 斐然이 "꾸밈이 없어도 화려한 문체'를 뜻한다면 용암사지 답사는 일장춘몽에 다름 아니다!!!"


 

대좌

비연문 우측에 위치.

주초라기보다는 부도의 하대석으로 도괴 후 인위적으로 깊고 넓게 가공하여 돌확으로 사용한 부재로 생각된다.


 

농포장판각

관리사가 철거된 계단을 올라서면 좌측에 단칸 장판각이 있으며, 석탑 옥개석으로 주초를 삼았다.


 

뒤집힌 옥개석.3단 층급받침만 확인된다.


 

재사

기단부에 우주를 모각한 면석이 보인다.


 

재사

주초로 사용중인 2층(?) 탑신석.양우주가 모각되었고.


 

탑신석

양우주를 모각한 초층 탑신석으로 추정되며, 사지의 비로자나불좌상과 동일시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장판각 옥개석만 인지하였었다.


 

주초. 팔각대석(1)


 

주초.팔각대석(2)


 

주초.팔각대석(3)


 

용암사.

창건과 폐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 박전지朴全之의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는 도선국사가 지리산 성모천왕으로 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통일된다하여 선암사仙巖寺, 운암사雲巖寺와 함께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고려학사 최자崔滋(1186~1260)의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 등 일부 문헌에만 전한다고 한다.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에는 천태종을 중흥시킨 원묘국사와 관련된 용암사 설화도 있다.


"江南師亦隨而南焉自智異山道過南原歸正寺其住持玄恪夢有人告曰明日三生持法華師來宜淨掃迎之主人如敎掃門庭具殽饌以待師乘晚果至玄恪具說所夢又師屢夢智者衆講妙宗或在華長庵安禪不動竟服魔魅或山神指畫寺基或龍巖社道人希亮夢金蓮座待師等異夢靈恠頗多然此非儒者所宜言故不悉云


지리산으로부터 남원(南原) 귀정사(歸正寺)를 지나는데, 그 절의 주지 현각(玄恪)의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내일 삼생지법화사(三生持法華師, 삼생 동안이나 법화를 수행한 자)가 올 것이니, 깨끗이 소제하고 맞이하라” 하였다. 주인이 꿈에 시킨 대로 뜰을 쓸고 음식을 장만해 두고 기다렸더니, 대사가 과연 어둠을 타고 이르러 현각이 그 꿈 얘기를 했다. 또 대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지자(智者) 대사가 여러 사람에게 『묘종(妙宗)』을 강설하는 꿈을 꾸었고, 혹은 화장암(華長庵)에 머물며 참선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 끝내 마귀들에게서 항복 받기도 하고, 혹은 산신이 절터 자리를 가리켜 주기도 하고, 혹은 용암사(龍巖社) 도인 희량(希亮)이 금련좌(金蓮座)에서 대사를 기다리는 꿈을 꾸는 등 신이한 꿈이 신령스럽고 괴이한 것이 많았다 하나, 이것은 우리 유자(儒者)가 말할 바가 아니므로 다 쓰지 않는다."...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은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개창한 천태종을 부흥시킨 천태종의 고승으로 백련사의 1세이다. 고려시대 천태종의 중요사찰이었던 용암사에 주석하며 사찰을 중창하고 천태일승묘법을 널리 편 이는 백련사 11세 고려 충선왕대의 고승 무외국통(無畏國統) 정오(丁午)다.


무외국통은 1314년(고려 충숙왕 1) 용암사로 거처를 옮긴다. 1315년 충숙왕은 제찰사 한중희 등에게 전지를 내려 사찰을 경영하게 했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에게 사찰을 중창하도록 명했다. 이 때 무외국통은 1318년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했다. 당시 전각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에는 석가여래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 정오 스님은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상을 개금했으며, 대장경도 봉안했다. 당시 염장별감 이백겸과 방우정은 왕명에 따라 설전지 3만여 장과 옻칠한 함 140여 개를 만들었다. 무외국통의 제자 승숙ㆍ일생 스님 등은 강화도 판당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와 모두 600여 함을 만들어 비단으로 치장한 뒤 봉안했다. 같은 해 11월 18일 방우정이 다시 왕명을 받아 7일 동안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다고 전한다...다음에서 발췌 및 보완

 


귀부.이수

당연히 용암사 중건주 무외無畏 정오丁午스님 부도비 부재로 생각 할 것이다.

그런데, 제액은 "대천태종홍자국통비大天台宗弘慈國統碑"으로 음각되어 있으며,후면에는 용암龍嵒이 새겨져 있다.

홍자국통을 무외국통으로 동일시 하는 자료가 보이지만 확실한 근거는 찾지 못 하고 있다.

 

 

여의주를 중앙에 두고 두마리 용이 맞보게 표현되는 일반적인 이수와 달리 거꾸로 물구나무 선 모습으로 발로 보주를 받치고 있다.



지대석과, 귀부

지대석은 비신 아니었을까?

 


상단구역

부도,석등.비로자나불

 

 

부도.

팔각지대석, 중대석, 탑신석은 후보물이다.

용암사지의 서북쪽에 있던 부도로, 파손되었던 것을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팔각 하대 면석에는 안상을 새기고 공양천인상을 봉안하였다.


 

 

 

 


팔각 옥개석 전각에는 귀꽃을 표현하였고 상부에는 연화문 복발괴임을 두었다.

일석으로 새긴 옥개석 처마아래 부재는 동행한 달넘새님께서 장엄을 상징하는 장막으로 설명하였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광국사현모탑에도 보인다고 했다..



지광국사현모탑



상륜부는 횡선대를 새긴 복발,보개, 보주받침(?)과 화염보주를 올렸다.

 


상대석

현재는 뒤집혀진 상태로 보인다.


 

공주,계룡산 갑사 부도

현장에서 달넘새님이 상대석이 뒤집힌 부도로 설명하였다.



탑신석

후보물이다.

 


용암사지 부도

팔각원당형 부도로 조성시기는 고려초기로 추정된다.

즉,홍자국통 부도비 보다는 두어세기 앞선 앞선 부도이다.

 


용암사지 석등

팔각지대석에 2개 대좌,화사석,옥개석,상륜부로 구성된 부재.


하지만, 여러 부재의 조합이다.

 


지대석(4)

앙련이 새겨진 원형으로 상부에 팔각 복련을 새기고 상부는 팔각으로 구획하였다.

 

 

하대석,상대석

상대석은 뒤집혀진 상태이며,팔각 간주석은 망실되었다.



팔각화사석.

4개 화창을 두었으며, 창을 달았던 홈이 남아있다.

 


팔각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깊고 상부에 복련을 조식하였다.

 

 

상륜부(5)

석등과 별개 부재로 부도 상륜으로 추정된다.


 

 

용암사지 석불좌상

대체적으로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2008년 글에서는 지장보살도 보았었다.


이번 답사에서

지권인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수인이며, 사자빈신사지와  북한에 두건을 쓴 비로자나불의 작례가 남아있어 비로자나불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청주 모충동을 비롯하여 관모를 쓴 지권인 수인의 불상을 많이 뵈었다.


(사지빈신사지 불상을 비로자나불로 보지 않은 견해도 있다)




사자빈신사지 비로자나불



사자빈신사지비로자나불



청주. 모충동 비로자나불



대좌와 불신이 일석이며, 측면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고하였으나, 육안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고려 중기 이전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으로 추정한다.


추론

위의 글에서 (1)~(5) 번호를 부기하였다.

그까닭은 (4)번 부재를 부도 상대석, (5)를 부도 상륜부,(1)~(3)번 부재중 하나는 뒤집혀진 부도 옥개석, 또 하나는 팔각하대석,나머지 하나는 지대석으로 보면 또 다른 팔각원당형 부도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용암사지

귀부가 있는 하단, 부도,석등재가 있는 상단으로 구획되어있다.

하지만, 무외국사가 중건할 당시 100여칸 전각이 들어설 만큼 넓지는 않다.

따라서, 개인적인 시각으로는 용암사의 산내암자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된다.


20018.01.20



2008년 답사기 


 

 

성전암 가는 길목. 용암사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영봉산 자락에 위치한 용암사는

중창기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전쟁를 막고 삼한 통일을 위해 지리산 성모천왕 부탁으로 창건한 순천 송광사, 금산 운암사와 더불어 삼암사의 하나로 용암사는 밀양 영원사와 함께 고려 후기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이었다.

 

절골로 불리는 좁은 마을 초입에서 용암사지 위치을 물어 외길을 거슬러 올라가니 넓은 마당 축사옆으로 솟을 삼문이 눈을 의심스럽게 한다. 마을 부근 상좌골, 벼랑골의 지명으로 미루어 대찰이었을 절터를 가로막은 해주 정씨 문중 재실이 발길을 잡는다.

 

문중 재실 출입 허가를 받을려고 큰소리로 문안을 여쭈어도 인기척이 없더니 한참 후 알아듣지 못할 낮은 톤으로 병색이 완연한 노인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린다. 아마 거동이 불편한 재실 관리에 종사하시는 분 같았지만 모골이 송연해진 느낌이었다.

 

큰소리로 용암사지를 돌아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눈을 돌렸더니 요상한 건물이 보인다. 아마 재실인 모양인데  석탑, 석등 등 석조부재를 주초로 사용하였다. 옆에 위치한 장판각에도 용암사터 부재를 사용하여 나의 심기가 엉망이다. 어울렁더울렁 함께 할 수는 없었을까?


 

재실을 돌아가면 제일먼저 비신이 없는 귀부와 이수가 보인다. 귀부는 섬약해보이며 이수에는 두 마리 용이 조각되어 있다. 제액에는 홍자국통비로 기록되어 있으며, 홍자는 고려 말기 보감국사 혼구와 함께 불교계를 주도하며, 충숙왕 시절 용암사를 중건한 무외국사 정오로 전해진다.

 

 

석등 부재. 귀꽃이 조성된 팔각 지대석위에 간주석이 사라진 두개의 하대석(?)과 화사석과 옥개석 상륜이다. 누가 보아도 상대석을 하대석 위에 뒤집어 올려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중수가 별 것 인가? 간주석을 새로히 조성하면 자연스럽게 상대석도 제자리를 찾을텐데..., 상륜부는  화려하지만 재질은 달라 보인다. 재실에 흩어진 부재들을 조합해보면 용암사에 최소 2기의 석등이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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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지 석불. 방형대좌위에 통견의 법의, 지권인 수인이다. 수인으로 미루어 비로자나불 처럼 보이나 두건을 쓴 모습으로 지장보살임을 알 수 있다. 지장보살은 명부전에만 단독으로 모셔진 불상이어서 용암사에 주불로 금당에 모셨던 불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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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지 부도. 1962년 중건한 신라 전형을 간직한 고려시대 팔각원당형 부도다.

중대석과 몸돌은 색감이 틀려 새롭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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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석 갑석에는 복련이 둘려져 조각되었고 새롭 조성한 탑신에는 문비가 얕게 표현되었다.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며 귀꽃이 곱게 피었다. 상륜에는 복발, 보륜,보개가 보인다. 보주는 불꽃문 안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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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각 지대석 위 팔각 하대석에는 안상을 감실처럼 깊게 파고 보살을 모셨다. 중대석 역시 새롭게 조성하면서 형식적으로 우주를 넣었지만 본래에는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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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의 보살은 연꽃대좌, 천의, 결가부좌 자세이었지만 수인과 표정은 각각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흘러흘러온 지난 과거사는 묻혔지만 폐사지는 따뜻하기 그지 없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형국이 좋으니 피폐도 심했고 절이 망했다면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일까?
 

 

나오는 길.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현판이 보인다. 비연문(斐然門). 의미가 뭘까?  李白의 싯구에서 斐然이 보이지만 현판의 상징과 일치하는지 판단할 식견은 없다. 다만 斐然이 "꾸밈이 없어도 화려한 문체'를 뜻한다면 용암사지 답사는 일장춘몽에 다름 아니다!!!!!!!!!!!!!!


2008.02.16


비발디 사계 중 '겨울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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