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포항...대성사 금동여래좌상.석조관음보살좌상

임병기(선과) 2017. 12. 14. 08:21
728x90

 

 

 

 

 

몇해전 동호회 이상녕(보일러)님이 올렸었지만 미답사 목록에 기록만 하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며칠전

역시 동회회 임판환(청아)님의 논문 불상 정상계주를 정독하고 화들짝 놀랐다.

조선후기부터 근래까지 흔하디 흔하여 도외시 했던 정상계주가 고려시대 이전에는 작례가 없으며 북한에 1분 그리고 남한에는 대성사 금동여래좌상이 유일무이하다는 글을 읽고 달려 왔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배관이 쉽지 않은 불상으로 마애님의 정성으로 뵈었음을 밝히며 아울러 고마움을 전한다.

 

 

 

금동여래좌상

1912년에 촬영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유리원판에 의하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건봉사 낙서암에 있었던 불상이었다고 한다. 또한 복장유물에서 사명대사 유정(, 1544∼1610)의 원장()과 후령통 등이 발견되었으며, 재료분석을 통해 구리에 아연을 합금한 황동제임이 밝혀졌으며 제작시기는 대략 15세기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건봉사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켰던 사찰로서 이름이 높은 곳으로, 현재 사명대사 기념관이 남아 있다. 고려말 나옹대사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서봉사에서 지금의 건봉사로 바뀌었다. 이후 1465년(세조 11) 세조의 원당으로 왕의 위패를 봉안하는 어실각()이 지어졌다. 불상내에서는 1584년(선조 17) 사명대사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원장()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 불상이 오랫동안 건봉사에서 중요한 불상으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불상의 원래 봉안 장소로 확인된 건봉사 낙서암은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 온 진신사리를 임시로 봉안하였던 곳으로서 이는 사명대사 원장이 이 불상에서 나올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또한 1932년 8월 12일에 작성된 조선총독부자료에는 건봉사에 있는 사명대사의 유품으로 ‘도금원불()’이라 쓰여진 불상이 있는데 이 작품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동여래좌상

라마계의 정상계주를 일깨워 준 님이시다.

소불로 대좌는 복련앙련이 대칭이다.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과 무릎위에서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마치 아미타 수인을 결한 왼손의 손모습도 이 시기부터 나타나는 아미타불의 도상적 특징으로 역시 시대성을 반영하는 요인이다. 불상의 특징은 통통한 뺨에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려진 눈과 도톰한 입 등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양감이 강조된 얼굴, 편단우견의 법의,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대의자락이 두 번 반전하면서 접혀져 있는 모습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두껍게 입은 대의와 볼륨감이 강조된 가슴이나 유두의 표현과 더불어 1450년(문종 즉위)에 제작된 통도사 금동삼존불상의 본존불과 비슷한 점에서 비슷한 시기인 15세기 중엽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력 갑신 萬曆甲申(1584)

 

 

사명대사

 

조선 중기의 고승인 유정(惟政, 1544∼1610)을 말함. 풍천 임씨로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한국콘텐츠진흥원

 

 

 

 

 

 

 

그리고

석조관음보살 좌상

 

 

두 손의 약병이 많이 낯설다

 

 

 

주지스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친다.

"공부,예술성 그보다 옛선사들의 향취가 남아 있어 조심스럽다."

 

2017.12.08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