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남원시

남원...지리산 파근사지

임병기(선과) 2017. 10. 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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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근사지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가 있다.

이번에 우리가 택한 코스는 비폭교(주천면 고기리)에서 시작하여 부도(1)를 지나 두 계곡 합수지점에서 좌측 계곡을 건넜다.

20여미터 지나면 길이 끊어지고 희미한 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작은 2계곡 합수 지점에서 좌측 계곡을 건너면 바로 산죽이 보인다.

산죽속에 석등하대석이 보이고 바로 위쪽이 사지이다. 내려 올때는 내기마을로 내려 왔다.두번째는 위의 역순으로 답사하면 된다. 답사 시간을 제외하면 등,하산 시간은 각각 1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사지의 유물은 두 계곡 합수지점의 못 미쳐 부도와 석등 옥개석. 그리고 사지 중앙에서 산정상 등산로를 택하면 우물지 1, 돌확,대석이 있으며, 돌아나와 다시 우측 산길로 들어서면 석축, 우물지 2, 돌확 등이 산포해 있다. 그리고 내기마을 내려오는 길 우측의 부도대석, 좌측의 부도 2기, 부도 대좌와 돌확, 맷돌이 유존한다. 모든 유물은 등산로 중심에서 10여미터를  벗어나지 않은 장소에 있다.

 

 

파근사지波根寺址

波根寺 창건과 폐사에 관련한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파근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동국여지승람의 남원도호부 불우조에 지리산에 위치한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장경남이 지은 난중잡록 亂中雜錄에 등장한다.
 

난중잡록 1597년 9월 9일..출처/한국고전번역원

 

"양형과 같이 그대로 파근사(波根寺)에 있었다. 본부의 아전 정대인(鄭大仁)ㆍ배입(裴立) 등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올라와 말하기를, “근자에 왜적의 형세를 보면 결코 근절될 이치가 없습니다. 겨울이 깊어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적의 수색이 그치지 아니하오면, 불쌍한 우리 남은 백성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 아무개는 강개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래부터 아는 터이니 격문을 사방으로 띄워 모집한다면 얼마의 장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의 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부모 처자를 걱정 없이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꼭 같다. 그러나 적의 떼가 가득 차 있어 한 장의 격문도 통과하기 어려워서 민망함을 참고 이 곳에 머물러 있자니 다만 통분할 뿐이었는데, 그대가 이토록 꾀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았다.” 하고, 서로 날짜를 약속하여 장사를 모집하기로 하였으나, 또한 왜적의 형세가 갑절이나 치열하여져 사람과 물건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숭정원일기에도 파근사가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 일기...출처/국사편찬위원회

 

1678년 12월 7일

"南原波根寺, 木佛出汗, 自頂至踵, 至於流滴手指端, 二日乃止"

남원 파근사 목불에서 이틀동안 땀을 흘렸다는 내용이다.

 


이긍익, 연려실기술...출처/한국고전번역원

 

"남원 선비 조경남(趙慶男)이 지리산 파근사에 피난하고 있다가 강개한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키니 이에 천인 박언량(朴彦良) 등이 그를 따라서 낙오된 적군을 많이 죽여 피난하는 사람을 구제하였다. 9월 22일에 적의 머리 36급을 베었고 12월 7일에 적 1백 23급을 산음(山陰)에서 베었는데, 그가 거느렸던 군사는 손상을 입은 자가 없었으며 또한 공을 자랑하여 적의 머리 벤 것을 나라에 바치지도 않았다. 또 일찍이 《난중잡록(亂中雜錄)》을 지었는데 내용이 자못 소상하였으며 또한 나라 일에 분개하는 마음을 발하는 뜻이 많았다. "

 

이후에도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용성지龍城誌, 남원읍지南原邑誌에도 사찰이 운영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문헌인 범우고梵宇攷에는 파근사의 과거사명이 대흥사大興寺라고 밝히고 있으며,  대동지도大東地誌, 호남읍지湖南邑誌에도 사찰이 운영되고 있다고 기술괴어 있다고 한다.

 

또한, 화성시 용주사 대웅보전 닫집에서 확인된 삼세불상의 발원문인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株寺佛腹藏奉安文 본사제반서화작등제인방어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파근사의 조각승 봉현奉絃이 등장한다고 한다.

 

 

부도(1)

비폭교에서 약 1km 못미쳐 등산로 상에 위치한 조선후기 부도.

한국의 사지에는 탑신에 대사◯하당大師荷堂 당호가 새겨져 있다고 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탑신전체에 화문을 조식하였고 상하에는 연화문을 새겼고 상부에는 사리공이 남아 있으며 상륜은 결실된 상태이다.

 

 

 

 

 

석등 하대석

부도(1)에서 파근사지로 향하는 진입로 산죽 속에 위치

하부에는 앙련을 상부에는 복련을 새기고 위에 원형공이 남아 있다.

한국의 사지에는 석등하대석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부도 옥개석 처럼 보인다.

 

 

귀꽃

 

 

하부 앙련

 

 

이 부재를 지나 똑바로 오르면 내기마을에서 올라온 길이 뚜렷하게 보인다.

 

 

우물(1)

사지내 등산로 상에서 우측 정상방면 길옆 석축 위쪽에 위치

우물.대석.맷돌이 있다.

 

 

원형 대석

 

 

우물

 

 

맷돌

 

 

 

맷돌

우물지(1)에서 나와 다시 등산로상의 석축을 지나면 좌측에 우물지(2)가 있다.

우물지(2)를 지나 등산로 우측에 암반을 이용한 맷돌이 보인다.

 

 

맷돌 앞 돌확

 

 

돌확

역시 맷돌 앞에 위치

 

 

석축

우물지(1)에서 우물지(2)로 향하는 등산로 상에 위치.

여기를 지나 좌측 위쪽에 우물지(2)가 있다.

 

 

 

우물지(2)

현재도 산꾼들이 사용하는 것 같다.

 

 

돌확

 

여기서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면 된다.

 

 

부도 지대석과 대좌

위쪽의 암반은 지대석으로 추정된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와서 내기마을로 내려가는 우측에 위치한다.

 

 

부도대석을 조금 내려오면 좌측 아래에 부도와 부도 대석과 명문이 새겨진 돌확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한 곳으로 모아 놓았다.

 

 

부도

 

 

부도(2)

종형부도로 대석과 상륜이 결실된 상태이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으며 특별한 문양이 없다

그나저나 뒤집힌 것은 아닌가?

 

 

부도 주인공은 알 수 없을까?

앞서 올렸던 실상사 용담대사에서 언급한 글을 다시 가져 왔다.

현재 유존하는 파근사지 부도는 3기로 나머지 2기는 당호가 새겨져 있어, 개인적으로는 용담대사 부도로 보고 싶다.

 

용담조관 龍潭 慥冠禪師 ...출처/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00(숙종 26)∼1762(영조 38). 조선 후기의 승려.편양문파()의 승려. 전라북도 남원 출신. 성은 김씨(). 자는 무회(), 호는 용담(). 어머니는 서씨()이다.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고 낳았으며, 생일은 사월초파일이다.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상을 지내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였다.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1718년(숙종 44)감로사()상흡()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태허()에게 구족계()를 받았다.1721년(경종 1)부터 화엄사()상월() 문하에서 수업하다가, 1723년 영남과 호남의 고승을 찾아 두루 편력하였다. 이때 영해()·낙암()·설봉()·남악()·회암()·호암() 등을 만나 선교()를 궁구하여 명성을 얻었다.

 

행각을 끝낸 뒤 반조(: 고요히 삼매에 들어 자기를 돌이켜봄)에 전념하다가 지리산 견성암()에서 『기신론()』을 읽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때 월저()의 고제(: 제자를 높여 부르는 말) 수일()이 찾아와 서로 문답하여 신기(: 정신과 근기)가 투합하였다.1732년(영조 8) 지리산 영원암()에 들어가 토굴()을 지어 가은암()이라 이름하고 만년의 안식처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방 승려들의 간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회문산 심원사(), 동락산 도림사(), 지리산의 여러 암자에서 『선문염송()』과 원돈교()의 요지로 20년 동안 묘법()을 선양하였다.

 

1749년 겨울에 상월의 의발을 받았다. 1751년 겨울에 강석을 파했다가 문인들의 간청에 못 이겨 1758년 봄 지리산 대암()에서 강석을 열었지만, 다음해에 다시금 파하였다. 1762년 6월 실상사()에서 나이 62세, 법랍 44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수습한 사리 5과를 감로사(천은사),실상사, 파근사() 등에 탑을 세우고 나누어 봉안하였다.50세 이후 의해지견(: 이치, 이해, 지식, 견해 등 논리적인 것)을 싫어하고 오로지 반조에 몰두했으며, 특히 만년에는 정토문()을 즐겨 언제나 사람을 접할 때 ‘유심자성()’이라는 말을 하였다. 제자로는 성암()·혜암()·죽암() 등 수십 명의 고승이 있다

 

 

실상사 용담대사 부도

 

 

천은사 부도전

좌측 3번째 담장쪽 비석이 있는 부도가 용담대사 부도이다.

 

 

부도 대좌

위 사진의 대좌도 용담대사 부도 대좌가 분명해 보인다.

 

 

부도(3)

탑신과 상륜이 일석이며 상부와 보주 앙련에 범자문을 새겼다.

하부에도 사리공이 없다.

반파되어 당호 중앙 글자가 모호하다.

예전 사진을 보면 혜암당惠庵堂 처럼 보이며, 한국의 사지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2014년 파근사지 답사를 마친 천은사 주지스님(나는 일정에 늦어 사지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내기마을 부터 동행하였다)의 말씀에 의하면 혜암당스님은 조선후기 화재로 전소된 천은사를 남원부사의 도움으로 중수하신 분이라고 하였다.

 

천은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자료이다.

"1774년(영조50)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탑신 상부 범자문

 

 

탑신 보주의 범자문

부도에 범자를 새긴 부도를 여러기 본 듯 한데 어제 본 실상사의 회명당 부도, 자운당 부도와 영천 팔공산 진불암의 백암당 부도. 원원사지 부도 지대석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상륜부에 범자를 새긴 작례는 혜암당 부도가 유일하다.

 

 

혜암당은 누구일까?

위 용담대사 글을 보면 제자중에 혜암당이 있다.

 

"제자로는 성암()·혜암()·죽암() 등 수십 명의 고승이 있다"

 

맞다면 사제지간의 부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 옆 돌확과 원형공이 남아 있는 바위

혜암당 부도 하부에는 사리공이 없어 이 부재가 혜암당 부도 대좌로 추정된다.

 

 

남원.실상사 자운당 부도 범자문

 

 

남원.실상사 회명당 부도 범자문

 

 

영천. 팔공산 진불암 백암당 부도 범자문

 

 

경주. 원원사지 서부도 대좌 범자문

 

 

 

돌확과 부도 대좌 추정 부재

 

 

돌확의 명문

경오3월일庚午三月

 

 

 

 

 

맷돌

부도 2기를 지나 내기마을로 내려오는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면 좌측에 있다.

 

 

내기마을 돌확...2014년 3월 답사

 

 

내기마을 석등 옥개석..2014년 3월 답사

 

 

내기마을 수조...2014년 3월 답사

 

 

파근사지

우물터(1)에서 바라본 광경이다.

 

우중에 길을 잘못 들어 헤매이었던 답사

그래서 더욱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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