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구례군

구례...화엄사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7. 9. 4.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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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부도전

답사매니아가 아니더라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사찰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부도전에 마애부도가 모셔져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마애부도 답사 겸 사진에 담지 않았던 부도를 뵙고 왔다.

 

늦었지만

일깨워 준 우리카페 이준엽님과, 오분향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대월당탑 大月堂塔

팔각 대좌.탑신에 당호와 유곽을 새겼다.

탑신 상부에 앙련, 일석으로 조성된 보주에 복련을 표현했다.

 

 

 

양진당탑 養眞堂塔

팔각대좌, 탑신과 보주가 일석이며

탑신상부에 복련, 보주에는 앙련을 새겼다.

탑신에는 위패속에 당호를 새겼고 유곽대를 표현하였다.

 

 

 

 

 

호은대율사비 虎隱大律師碑.1919년

호은스님은 1850년 8월 24일 출생. 1918년 1월3일(음력) 통도사에서 입적

속명은 박문성,법호는 호은이며 한국불교 대은율맥을 이으신 율사로 제6대 율사이시고 1908년(1902년) 합천 해인사 상선원에 금강계단을 창건하시고 정맥을 이으신 스님으로 전한다. 호은대율사비는 구례화엄사 부도군내에 있으며 설치는 화엄사 주지 진응혜찬스님. 비문은 제자인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찬하였다.

 

 

진응대종사탑 震應大宗師塔.1941년

탑신을 상대, 중대, 하대로 구획하였다.

16개 유두를 새긴 유일한 작례이다.

 

진응당 혜찬震應堂慧燦

1873년 12월24일 전남 구례군 대전리에서 진원복(陳元福)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전주이씨 이노인(李老仁) 여사. 스님의 세속 이름은 동해(東海)로 알려졌다. 호적에는 진진응(陳震應)으로 나온다.

 

어려서 구례군 광의면 인파리 서당에 입학해 3년간 <지나사략(支那史略)>과 <통감(通鑑)>등을 익혔다. 1887년 9월22일 구례 화엄사 봉천암(鳳泉庵)에서 오응암(吳應庵)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 스님의 세수는 15세였다. 이듬해(1888년) 7월3일 구례 화엄사에서 박하월(朴霞月)스님에게 사미계를 수지했다. 구족계(具足戒)와 대승계(大乘戒)는 1913년 2월23일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에서 박호은(朴虎隱)스님에게 받았다. 1888년 10월15일 구례 화엄사 봉천암에서 안거 이후 선교(禪敎)를 겸비했다.

 

스님은 내외전을 익힌 후 강사(講師)를 맡아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천은사 수도암(1897년 2월~1899년 8월, 1900년 8월~1906년12월), 화엄사 보적암(1899년 8월~1900년 8월), 산청 대원사(1907년2월~11월) 강사를 지냈다. 1919년 4월에는 화엄사 불교전수부(佛敎專修部) 강사, 1920년 9월에는 천은사 불교전문강당 강사, 1923년에는 동래 범어사 불교전문강당 강사, 1926년에는 묘향산 보현사 불교전문강당 강사를 또한 1926년 10월15일에는 평북 영변 묘향산 보현사에서 대선사(大禪師) 법계를 품수했다.

 

스님은 10년간 교학 공부에 매진했다. 출가하던 해(1887년) 10월부터 1888년 10월까지 1년간 구례 화엄사 봉천암에서 박하월스님에게 사미과와 사집과를 수학했다. 이어 1890년까지 하월스님에게 사교과와 <능엄경>, <기신론>은 물론 외전에 해당하는 <고문진보(古文眞寶)>를 배웠다. 또한 1890년 2월25일부터 1893년 1월까지는 구례 천은사 수도암에서 정원화(鄭圓華)스님에게 <반야경>과 <법화경>을 배웠다. 

 

1893년 2월부터 1895년 1월까지 순천 선암사 대승암 강당에서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과를 마쳤으며, <화엄경 현담 삼현십지> <불조통재(佛祖通載)> 등을 배웠고, 1895년 2월부터 1년간 전북 순창 구암사 강당에서 배설유(裵雪乳)스님에게 <선문염송>과 <전등록> 등을 익혔다. 1896년 3월19일 천은사 수도암 선사(先師) 영당(影堂)에서 전등식을 갖고 응암스님의 법을 이었다. 1897년 2월 화엄사에서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받았다. 또한 1926년 10월15일에는 평북 영변 묘향산 보현사에서 대선사(大禪師) 법계를 품수했다.

 

또한 신학문을 통한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08년 8월20일 화엄사내에 사립(私立)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설립해 인재를 길렀다. 이밖에도 스님은 1917년 화엄사 염송대회(拈頌大會) 종주(宗主)를 맡은데 이어 임제정종(臨濟正宗)의 조사선(祖師禪) 가풍을 선양하기도 했다. 스님은 해방을 불과 몇 해 남기지 않은 1941년 구례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69세, 법랍 54세였다.

 

진응스님의 법맥은 서응동호(瑞應東豪)스님을 통해 문성(汶星)스님을 거쳐 수진(守眞).유광(有光).현응(玄應).일우(一宇)스님에게 전해졌다. 또 만우(曼宇)을 통해 인철태경(印哲泰境)스님에게 이어졌다...출처/용궁이씨 종친회

 

 

 

구품연지를 상징하여 9개를 새겼다는 설說을 믿었는데...

 

 

 

 

등계경봉당탑 登階景峯堂塔

복련이 새겨진 원형대좌 상부에 탑신을 끼운 형태로 탑신과 보주가 일석이며 상부에 복련을 조식하였다.

 

 

니순홍지운응안탑 尼順洪知云應安塔

기단, 탑신 상단, 보주에 새긴 연화문 사이에 간엽을 새긴 모습이다.

니尼?

비구니스님 부도를 뜻는 것일까?

 

 

기단

 

 

탑신상부,보주

 

 

 

미처 당호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녀오신 분들의 답을 기다린다.

 

 

 

 

비구니 순흥 比丘尼 順洪 靈珠塔

 

 

호남지역에서는 선암사 마애부도와 더불어 2기가 유존한다.

 

 

사리를 영주靈珠로 칭하는 유일한 작례이다.

 

 

 

환공당탑 幻空堂塔

 

 

 

벽암당탑 碧巖堂塔.1660경

종형 부도로 탑신을 상대, 탑신, 하대로 구획하였다.

탑신에는 유곽과 유두를 새겼다.

기단석 상부에 받침을 올리고 모서리에 모서리에 사자를 새겼다.

 

벽암당 각성碧岩堂覺性(1575~1660)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자는 징원(澄圓)이며, 호는 벽암(碧巖)이다. 호서(湖西) 보은(報恩) 사람으로 속성은 김해 김씨이다.대사에 관한 기록은 구례 화엄사에 있는 <구례 화엄사 벽암대사비(求禮華嚴寺碧巖大師碑, 1663년)>와 보은 법주사에 있는 <법주사벽암대사비(法住寺碧巖大師碑, 1664년)>에 남아있다.


벽암 각성대사는 부휴(浮休)대사의 수제자로 선(禪) 수행과 계율 실천에 투철하였다. 남한산성 축성의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승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적상산 사고(史庫)를 지키는 임무를 맡는 등의 국가적 소임과 함께 종단의 승풍을 진작하였다.저술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 등이 있다.
벽암대사는 송광사 중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송광사에서 입적하였다. 송광사와 화엄사에 승탑이 있고, 해인사 국일암에는 진영이 남아있다.

 

 

기단석과 사자상

 

 

사자상

 

 

연화문 위로 비석형의 위패 안에를 당호를 새겼다.

 

 

 

 

 

벽암당 부도.완주 송광사

 

 

명곡당탑 明谷堂塔

복련,앙련을 새긴 대좌.탑신 중앙에 연꽃 줄기(?)와 꽃을 표현하였다.

 

명곡당明谷堂玄眼

화엄사 사적비에 " 1706년 2월 一七0六年 二月에는 明谷堂玄眼이 禪敎를 講說하였고"라는 명문이 있다.

따라서 부도는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자운대선사탑 慈雲大禪師塔.

탑신 상부와 중앙 당호옆으로 범자문을 새긴 부도이다.

 

자운당 처관慈雲堂處寬

화엄사 사적비에 "1769년(영조 45년)에 자운당 처관대사가 각황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부도 18세기말 이후의 부도로 추정된다.

 

 

 

 

계파당탑 桂坡堂塔.18세기 중반

용뉴를 표현한 또다른 작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계파당 성능대사 桂坡堂 性能大師

"생몰년대는 정확히 전하지 않는다.

호는 계파(桂坡).  경상북도 애천 학가산(鶴駕山)의 승려이었으나 화엄사 벽암(碧巖) 각성(覺性 : 1575~1660)의 연원인 백암(栢庵) 성총(性聰 : 1631~1700)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하여 도를 이루었다. 화엄사의 장륙전(丈六殿)은 그의 원력(願力)에 의하여 1699년(숙종 25)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을 보았다. 이에 숙종이 ‘각황보전(覺皇寶殿)’이라는 편액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1711년(숙종 37) 한양 수비의 요충인 북한산성 축성을 성능에게 위임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의 직위를 내렸는데 9개월 만에 축성을 완료하였다. 다시 화엄사로 돌아온 그는 수행의 여가에 산성기사(山城紀事)를 집필하였다. 그는 이 『북한지(北漢誌)』를 판각하여 1745년(영조 21) 신임 도총섭인 서봉(瑞鳳)에게 인계하였다.그 뒤에도 그는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를 이루었으며,1750년 통도사로 옮겨 통도사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우고 계단탑(戒壇塔)을 증축하였다."...다음 자료 첨삭

 

 

 

(傳)북한산 봉성암 성능대사부도

 

 

합천 해인사 홍제암 성능대사부도

 

 

 

묵은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멀지 않는 사리암지는 언제 인연 지을려는지...

 

201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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