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익산시

익산...연동리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17. 7. 29.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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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2008년 답사기로 대신한다.

 

 

연동리석불좌상

몇가지의 특징은...

 

두광 중앙과 신광의 보주형 화불

통견의 법의위 우측 어깨에 걸친 이중착의법 대의

승각기 매듭

상현좌

상호는 후보하였다.

 

 

두광 중앙. 보주형 화불

 

두광,화불. 화염문

 

 

 

 

신광의 보주형 화불

 

 

 

2017.07.15

 

2008년 답사기

 

 

 

미륵산 석불사

 

절집 일주문의 대문, 왠지 내마음 닫힌 듯, 금강역사를 모시기 위한 궁여지책이련가?

 

그래도

 

고마웁다. 석불이 있어 석불초등학교로 학교를 이름하고...

 

 

백제를 바라본다.

 

그시절 연동리는 교통 요충지였겠지?

 

머리부분이 복원되었으면 어때? 가슴은 온전하지 않은가?

 

무왕도 선화공주도 참배하지 않았을가?

 

태봉사 삼존불, 미륵사지...

 

우리는 고스란히 사라진 숨겨진 역사의 단초를 연동리에서 찾을 수 없을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형 광배로서, 두광에는 12판의 폭이 넓은 연화문을 돌렸으며, 그 주위에 다시 24판의 연화문과 간엽을 돌렸다. 둘레에는 모두 6중의 원권문을 돌렸으며 두광을 마무리하였다. 이 두광 아래로는 좌우에 각각 2줄의 돌출대로써 신광(身光)을 표시하고 있는데, 돌출대 사이에는 각각 3개씩의 보주를 조각했다. 그 밖에 전면에 불꽃무늬를 조각하고 석불의 어깨 윗부분부터 좌우에 각각 3구씩의 화불(化佛)을 새겼다.

 

그리고 두광(頭光) 상면에는 파손이 심하여 화불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각수법이 화불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는 조각이 있다. 광배의 대석은 길이 2.86m, 너비 1.5m의 크기로 2매의 석재를 맞대어 놓았는데 전체 높이는 0.67m이다. 이 대석의 하부에는 위를 받치는 잘 가공된 지대석이 놓여 있는데, 일부는 제자리에서 빠져 나갔다. 광배의 높이는 3.26m로서 삼국시대 최대의 규모이다.

 

이 석불과 더불어 인접한 태봉사에 백제시대 석불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백제 불교가 익산지방으로 전파된 경로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당시의 교통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높이가 4.48m에 이르는 백제 최대의 화염광배로, 비록 위쪽의 왼쪽 위 부분이 약간 잘려 나갔지만 삼국시대 광배 형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두광배의 광심부는 16엽의 연판과 이를 둘러싼 바퀴살 모양의 광선문, 5조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진 띠로 구성되었으며, 그 정상에는 연화상의 보주가 배치되어 있다.

 

폭이 넓은 신광대 내부에도 연화상의 화염보주가 새져져 있다. 그 바깥의 화염무늬는 마치 인화한 듯 형태가 일정하며 그 사이에는 7구의 화불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불꽃머리가 고사리 모양으로 말린 화염문은 백제에서 정형화된 이른바 와룡문계 화염문의 대표적인 예로서, 서산마애삼존불의 본존 두광배의 그것과 비교할 때 마치 인화한 듯 의장화되어 있다...전통사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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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석불은, 넓고 묵중한 상현좌 위에 가부좌한 본존불로 신체를 괴체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양어깨와 가슴이 넓어 당당한 편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여래좌상으로서 얼굴은 새로 만들어 붙여서 본래의 상호는 알 수 없다.

 

고운 옷 주름을 잡아 늘어뜨린 통견의 법의는 배꼽 부근에서 그 자락을 손목에 걸쳐 넘기면서 굵게 주름을 잡아 결가부좌한 무릎 위로 흘러 덮은 다음 다른 돌로 만든 좌대의 아래까지 덮은 상현좌이다.

 

그리고 가슴부분은 명치 근처에서 치마와 허리띠의 매듭 코를 법의 곁으로 살짝 드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가슴에 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운데 손가락 2개를 구부려 무릎 안쪽에 올려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좌대 하단에 너비 13cm, 넓이 5cm 가량의 돌출대를 돌려 마감했다...전통사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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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고도 서럽다. 어찌 불두를 잃어 버려셨는지요?

 

불두가 떨어져 나간 것은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칼로 쳐서 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장 가토가 수 만명의 왜군을 몰고 이곳으로 쳐들어오는데 안개가 느닷없이 짙게 끼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사를 풀어 무엇이 있는가를 보고 오라고 하였다.

 

군사가 돌아와서 아무것도 없고 돌부처 하나 외에는 본 것이 없노라고 했다. 가토는 이 말을 듣고‘이렇게 안개가 낀 것은 필시 돌부처의 조화일 것’이라고 하며 돌부처가 있는 곳으로 대군을 이끌고 와서 한 칼로 석불을 내리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근래에 이곳 주지의 말에 의하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불상의 온 몸에 습기가 많이 차서 마치 땀방울 같이 흘러 내린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절로 절을 올리고픈 절집 부처가 있다.

배리삼존불, 감실부처님,서산,태안 마애 삼존불, 예산 화전리 사방불...그러고 보니 삼국초기 부처님이네?

 

모두 용서하이소.()()()

 

20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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