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이후 다시 인연지었다. 지금도 엉망이지만 그때보다는 선명하다. 답사기는 옛글로 대신한다.
화산리 마애여래삼존. 일자형 눈썹, 뭉툭한 코 조선후기 장승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 보인다.
본존불
우협시불
좌협시불
2017.07.15 |
***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홈페이지에서 리재길 기자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 '첫발'
나바위성당은 1906년 순수 한옥 목조건물로 지어진 후 1916년까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한·양 절충식 건물로 형태가 바뀌었다. 나바위성당은 이 독특한 건축 양식 때문에 1987년 7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성당을 소개하기에 앞서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 성지로 자리잡게 된 연유를 살펴보자.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845년 10월12일이다. 이날 밤 8시경 전라도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 첫발을 내딛는다.
베르모렐 신부는 1905년 성당 건축을 계획하고 약현성당(현 서울 중림동성당)과 용산신학교를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1906년 설계가 완성되자 곧바로 착공에 들어간 베르모렐 신부는 나바위에서 약 30리 떨어진 임천군 가하면 지저동 뒷산을 1000냥 100푼을 주고 매입, 곧게 뻗은 소나무들을 베어 뗏목으로 운반해 건축 목재로 사용했다.
나바위성당은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다. 성당 앞면은 고딕양식의 3층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로 꾸며져 있고, 지붕과 벽면은 전통 목조 한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기와 지붕 아래에는 '팔괘'를 상징하는 팔각 채광창이 사방으로 나 있고, 처마 위마다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제대를 중심으로 중앙 통로 한가운데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은 '남녀 신자석'을 구분하는 경계였다. 제단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 사제가 신자석에 등을 돌린 채 미사를 봉헌하던 옛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제대 위 예수 성심상과 촛대, 감실 등도 성당을 처음 지었을 때 들여왔던 그대로다. 이 제대는 초대 본당주임이었던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와 중국에서 제대 부품을 몰래 들여와 조립한 것이다.
순교 기념비 뒷쪽으로는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금정'(望金亭)이 있다.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교구 사제들 피정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망금정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간척하면서 금강 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평야로 변했다.
나바위성당은 민족의 수난과 애환을 함께 나눈 삶의 자리이기도 했다. 초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는 지역 유지 김두환·서재양·박익래·강인수·박준호씨와 함께 1908년 성당 안에 소학교(초등학교)인 '계명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베르모렐 신부와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국가 대본은 교육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 힘"이라고 가르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
화산리마애여래삼존입상...사진/오분향님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익산 나바위 성당 뒷편 망금정이다. 망금정望金亭은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교구 사제들 피정 장소로 금강 황산포가 눈아래에 펼쳐지는 작은 동산으로 화산華山은 우암 송시열이 산세가 아름다워 붙힌 이름이라 한다. 망금정 뒷편 바위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으니 불교, 유교, 천주교 삼종교가 더불어 숨쉬고 있는 상생의 터이다.
저부조에 훼손이 심하여 형태도 불분명했다. 더구나 마음 악한 내눈에는 본존불 불두만 눈에 겨우 들어온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시절 금강 간척사업으로 물줄기가 바뀌었지만 충주 창동 마애불. 여주 계신리 마애불 처럼 금강을 오르내리며 생활 터전으로 살아가는 민초들과, 관청 물자를 운송하는 사람들의 무사한 운항을 기원하며 강변에 조성한 마애불 처럼 느껴진다.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지만 본존은 둥근얼굴에 육계는 크며 광배에는 화염문이 양각된 석가여래로 상현좌이며, 협시보살은 두광을 지닌 미완성의 보살상으로 양감이 없었다고 한다. 사지총람에는 천주교 도입으로 인해 불사가 중단되었다고 주민들이 전한다고 했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아 추가로 검색해보니 "조선 인조 때 비상시 군량보급창으로 이용되던 인근의 나암창과 관련하여 식량 운반이 순조롭게 되기를 기원하여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후자의 해석을 따르고 싶다. 다만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한다면 조선 인조 재위시 단독 불상으로 조성되었다가 조선 후기 협시보살 봉안중에 천주교 도입으로 중단되었음을 시사하는 의미로 수용하고 싶다.
2011.03.10 |
'전라북도 > 익산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산...답사 사진 몇장 (0) | 2017.07.31 |
---|---|
익산...연동리석불좌상 (0) | 2017.07.29 |
익산...미륵산 심곡사 (0) | 2017.07.27 |
익산...혜봉원 목조삼존불. 목조보살입상 (0) | 2017.07.26 |
익산...원광대학교 박물관 (0) | 2016.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