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귀경하여 성남 약사사 석탑 답사후 연신내역 부근에서 숙박. 동호회원들과 9시 약속 이전, 아침일찍 진관사로 향했다. 지금은 도심속의 사찰 같은 분위기지만 진관사 계곡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루트였다고 한다.
근래에 세운듯한 일주문 차량 우선일까? 한켠으로 밀려난 배치가 유쾌하지 않다.
혜월당 대선사의 부도 방형 지대석 위에 보주와 일석으로 탑신을 올렸다. 보주가 큰 유형의 석종형 부도로 탑신에 혜월당대선사우성탑慧月堂大禪師宇性塔 당호를 새겼다.
극락교.해탈문
사적비와 송덕비
진관사..글출처/진관사 홈페이지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조(太祖)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집니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합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습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습니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寮)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습니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습니다.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됩니다.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집니다. 1397년(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됩니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太宗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1421년(世宗 3)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1442년(世宗 24)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습니다. 또 1452년(文宗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世祖 9)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 후 1470년(成宗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년(哲宗 5)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高宗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慶雲)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ㆍ보수하였습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 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습니다.
대웅전 1965년 준공한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다포계 전각이다.
삼존불. 1966년에 조성된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삼존불 후불탱화. 1967년에 금어金魚 일섭日燮님이 조성.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도명존자, 무독귀왕.1969년
시왕상
시왕상
독성전. 삼각산 진관사 독성전 창건급단확 화탱불사공덕기(三角山 津寬寺 獨聖殿 創建及丹 畵幀佛事功德記)"라는 이 건물의 건축 관련 기록을 적은 작은 목조 현판이 전해져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광무(光武)11년 즉 1907년 3월에 독성전을 짓는데, 상궁 4인과 민간인 부부 2쌍이 참여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공사 참여자 명단도 부기되어 있는데 모두 승려장인들이다. 칠성각 독성전과 함께 1907년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
소조독성상. 이처럼 청년 독성상은 작례가 흔치 않다.
독성탱 19세기말~20세기 초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던 화승 경선당(慶船堂) 응석 (應釋)이 그린 불화(佛畵)로서 홍순모(洪淳謨)와 상궁 이씨(李氏)의 시주에 의해 1907년에 제작되었다.
독성전 산신도 소나무가 생략된 단순한 모습이다.
칠성각 석불좌상 우리가 흔히 뵙는 경주 옥석으로 조성된 조선 후기 불상이다. 1969년에 진관스님에 의해 개금도이었다고 한다.
칠성탱 1910년 금어 춘담春潭, 범천梵天이 제작
영정 왼쪽 상단에는 세로로 “영입산수도 수주간경(影入山水圖 數珠看經)”으로 시작되는 4줄의 찬시(讚詩)가 적혀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라는 명문이 있어 ‘인수사’의 명호스님의 영정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바닥에 결가부좌한 스님의 모습을 화면 가득 그렸는데, 스님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侍者)를 배치하여 삼존형식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삼존형식의 영정은 다른 예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희귀한 작품으로 크게 주목된다.
태극기 2009년도 5월부터 전면적으로 보수작업을 하게 되어 건물해체과정 중 대들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칠성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또한 5월 26일 칠성각 내부해체 과정에서 칠성각의 불단(佛壇)과 기둥 사이에서 한지로 된 큰 봉지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어서 이를 떼어내자 태극기를 보자기처럼 사용하여 싸여져 있는 독립신문 등 20여점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 초반, 일제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반미치광이 될 정도가 되어 출옥하였지만 민족의식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는 동학사 강사(1930년대 초반), 월정사 강사(1935), 봉원사 강사(1936) 등을 역임하였고, 1938년 초부터 다시 진관사 마포 포교당에 다시 머물면서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러던 중 그는 1939년경에 발생한 이른바 ‘독립만세 낙서 사건’으로 일제에 피체되었습니다. 즉 진관사 마포포교당에 거주하면서 용산 철도국의 작업부로 일하던 박수남이 봉천행 화물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낙서의 배후자, 영향을 준 인물로 지목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나왔지만, 또 다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결국 그는 1944년 6월 청주 교도소에서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나한전 현판 광서10년 갑신삼월초오일光緖10年; 고종21년, 1884년). 노천老泉
자료에는 소조삼존불과 16나한이 봉안되었다고 하였으나 후불탱화만 있었다.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진철스님.1884년
수조
이른 아침 혼자만의 여유로운 탐방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음에도 마음대로 촬영도 하지 못했다. 왜일까?
2017.05.26 |
'서울특별시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도선사 마애불입상.칠층석탑.석조독성상 (0) | 2017.06.17 |
---|---|
서울...북한산 김상궁 마애부도 (0) | 2017.06.16 |
북한산 탐방 (0) | 2017.06.01 |
서울...재동 백송 (0) | 2016.12.01 |
서울...창경궁 관천대 (0) | 2016.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