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순천시

순천...조계산 선암사

임병기(선과) 2017. 2. 2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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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옛답사기를 찾아보니 2002년 12월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되었던 대통령선거일에 다녀온 글이 보인다.

그 이후에도 분명 두어 차례 답사했었는데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15년?

그때는 답사기에 제법 감정도 이입되고, 감상도 표현하였는데 지금은 주마간산식 답사가 되어버렸고  문화재 소개에 급급한 실정이니 참 무심한 세월이다. 오늘도 언강생심 그 범주를 벗어 날 여력은 남아 있지 않다. 아울러, 1불 2탑 3부도와 더불어 마애불과 부도는 별도로 글을 올릴 예정이다.


 

부도전

2002년 12월 답사기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많은 답사 매니아, 전문가들이 부석사, 개심사와 더불어 가장 매력적인 답사의 메카로 손꼽힌다. 또한 다양한 장르의 답사기가 넘쳐나고 있는 선암사는 문인들에게도 문학기행의 단골 절집이라 순수한 아마츄어의 시각에서 답사기를 기술 할려니 두렵고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하지만 유려한 문장, 현학적 논리, 세련된 문체에 식상한 분들에게 투박하고 거친 여행기도 또 다른 맛을 줄 수 있다는 나만의 유쾌한(?) 착각으로 발걸음을 옮겨가야겠다.


만추의 부석사, 꽃피는 봄의 선암사, 춘 마곡사, 추 갑사라고 가람분위기를 이야기하기에 꽃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에게 겨울의 선암사는 상념 한 자락 털 수 있어 가벼운 맘이지만 매표소도 잠든 이른 아침 무임 입산의 간사한 즐거움이 더 발걸음 가뿐하게 한다. 준비되지 않은 길이라 부도전을 건너 뛸려다 사사자 기단의 석탑형 부도에 눈길 머물러 잠시 영암사지,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과 화엄사의 사사자를 떠올리며 읽을 수 없는 부도비를 부끄러움 없이 스쳐지려더니 잡으려는 잡신은 안중에 없는지 아니면 나란 인간이 잡신으로 보였는지 나무 장승이 검문을 한다며 발길 잡아서 쓴 소리 해버렸다


"장승영감!!!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답사객들이 영감을 보고 부부 장승이라 하요???

언제부터 성전환을 해버렸나요?" "


 

선암사 장승

1987년 다시 모신 호법 사찰 장승이며 정겨웁던 예전의 지킴이는 성보 박물관에 계신다.


장승처럼... 김 상훈

전라남도 승주군 조계산
선암사 어귀에 짝을 잃고 홀로 선
나무장승 보았는가.

전라북도 남원군 지리산 중턱
실상사 그 어귀 느티나무 아래
짝을 잃고 홀로 선
돌장승 보았는가.

그날 이후
나는
선암사 나무장승처럼 살고
실상사 돌장승처럼 산다.


 

  


승선교 昇仙橋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이다.
기단부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으며, 아래부분부터는 장대석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쌓았다.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물을 타고 사찰에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과 잡신을 지키는 공하를 설치하였다.


승선교는 임란 이후 설치하였으며 달빛에 벚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2002년 나의 답사기는 건방이 넘쳐난다.

"선암사는 도선에 의해 세워진 호남의 3巖 사찰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더라도 선암사는 승선교, 강선루의 선(仙)의 표기로 인해 선녀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선녀가 목욕하고 올라가는 계곡이라는 등의 글이 많이 보이지만 근거도, 설득력도 없는 나의 시각으로 보자면 도교사상이 짙은 가람이라 여겨진다. 사찰의 산신각이 민간신앙, 독성각이 단군신앙, 칠성각이 도교사상과 어우러진 즉 불교와 타종교와의 습합 현상으로 여기듯이 仙을 도교와의 관련으로 보고 싶어진다. 비약해서 택도 없는 소설을 이어나가 보면 결국 선암사의 아기자기한 가람배치, 사찰에 드문 조경도 신선이 사는 仙界임을 상징하려고 온갖 꽃과 나무를 조성한 것은 아닐까?"

 


강선루降仙樓

강선루는 선암사의 문루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중층누각으로 승선교와 더불어 선계仙界를 연상케 하여 도가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상량문에 의하면  불기 2959년에 지어 졌으며 화주는 이월영스님이다. 

 

 

삼인당三印塘

삼인당 잡스런 생각도 잠시 삼인당에 이른다 삼인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또는 일체개고를 말하는 것이나 연못의 조형이 상징하는 바를 난 알 수 없으며 연못 옆의 전나무 세그루에 눈길이 갈 뿐이다.


 

 

하마비

산아래 있어야 마땅할 일주문 앞 하마비에서 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에서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요즘은 승도, 객도 말을 타지 않아 아니 승용차는 말이 아니어서 잘도 통과하는데 차라리 下車碑로 바꾸면 어떨까? 



선암사

542년(신라 진평왕 3)에 아도 화상이 해천사(海川寺)라고 부른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헌강왕 1)에 도선 국사가 남방비보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 영봉산의 용암사,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와 함께 선암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1092년(고려 선종 9)에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1660년(조선 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이 재건을 시작했고, 1698년(숙종 24)에는 호암 약휴선사가 원통전을 짓고 그 안에 목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다.


1701년에는 약 30년간에 걸쳐 완성된 불조전에 과거 53불을 비롯한 60여 구의 목조불상을 봉안했으며, 대웅전의 개수 및 선암사 입구의 석조 다리인 승선교 축조 등 대대적인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불이 나서 건물들이 소실되자 곧 상월이 중건했고, 1823년 다시 불이 나자 해붕·눌암·월파 대사 등이 중수하여 대규모 가람을 형성했다. 이 절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6·25전쟁 때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조계종과 태고종단에서 선암사의 소속을 놓고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조계종 20교구 본사이다.

 

 

일주문 편액. 조계산 선암사曹溪山仙巖寺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화를 입지 않은 전각이다.

 

 

일주문 후방 편액

 

 

고청량산해천사古淸山海川寺扁額


2002년 답사기의 글이다.

일주문 안쪽에는 "고청량산해천사" 현판이 걸려 있어 유난히 火氣에 약한 선암사의 내력을알 수 있다. 비보사찰의 냄새가 풍기지 않은가? 淸凉이 극락을 의미도 하겠지만 淸은 물 水변이며, 凉은 얼음 氷변이고 海泉 역시 水이니 火를 누르기 위해 의도적인 풍수비보에 의한 사찰인 것이다.


그래서 삼인당도 물을 저장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전국 어느 사찰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연못이 무량수각 앞에 한 곳, 만세루 및 설선당 옆에 쌍지 등 선암사 경내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연못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유난히 많이 심어 놓았다고 여기면 억지일까?

 


대웅전 영역은 중정에는 4기 괘불지주, 동서삼층석탑, 좌우 심검당과 설선당. 맞은편에 범종루가 배치되어 있다.

선암사의 중심법당인 대웅전은 정유재란(1597)의 전화를 입어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영조 42년(1766)에 다시 화마를 입어 순조 24년(1824)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다른 절집의 대웅전 어칸 앞에 "출입금지" "스님이 이용하는 문" "좌측 문을 이용하세요" 등의 문구에 지레 위임감을 느꼈을 것이다.하지만 선암사 대웅전은 어칸에 머름을 높이 조성하여 자연스럽게 참배객의 동선을 측면으로 향하도록 유도하였다.

 

 

목조석가여래좌상.

나발에 중간계주,정상계주를 표현하였고 백호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매우 두툼하고 평면적으로 처리하였는데 오른쪽 팔 부분의 법의는 등 쪽으로 넘어가고 양어깨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양 무릎을 거쳐 발목 부분으로 좁혀 넘어와 무릎사이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재칭되었다. 내의는 가슴 밑에 표현하였는데 띠매듭은 넓은 관대가 돌려져 있다.  왼손은 따로 만들어 팔목에 끼워 넣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조성시기는 대웅전 건물의 중창 사실 등을 볼 때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대웅전 불단 후벽에는 불연이 모셔져 있다.

 

 

비사리구시

 

 

괘불대

 


동서삼층석탑

중정에 석등이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역시 화기에 약한 선암사의 비보 때문이라고 믿는다.

 


서탑

 


동탑

 


범종루

 

 

육조고사 편액

범종루의 계단을 지나면 만세루의 벽면에 큼직한 六朝古寺라는 현판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선종의 개산조인 달마이래 육조인 혜능 선사가 조계산에 주석 하였음을 비유하여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선풍 사찰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심검당의 글씨

선암사를 둘러본 사람이면 보았을 대웅전 왼편 심검당 벽에 한문으로 水와 海가 모각된 것도 화기를 누르려는 비보책이며 주역의 팔괘와 卍자도 비보의 의미로 보인다.

 


심검당 글씨

 

 

지장전

목조자장보살 좌상   



불조전



조사당



삼성각

 

 

 

원통전

조선 현종 1년(1660)에 경준, 경잠, 문정대사가 처음 지었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고쳐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24년(1824)에 다시 고친 건물이다. 


선암사 원통전은 정면의 3칸 중 어칸에 퇴를 내어 퇴주를 세우고 합각지붕 으로 가구한 丁자형 건물로 내부 불단 위에도 측, 뒷면에 벽을 수장하여 마치 원통전 내부에 또 하나의 전각이 있는 듯하다.


이런 형태의 건물은 왕릉 정자각에서는 볼 수 있으나 사찰에서는 흥국사,쌍봉사에도 있다.

따라서 백제계의 특징중의 하나로 생각되지만 나에게는 어떤 근거도 없다.

 

 

전각에는 정조가 이곳의 스님들의 기도로 순조를 얻어 후사를 잇게 된 까닭에 훗날 순조가 大福田 편액을 사액하여 현재도 걸려 있다.

 


원통전 목조관음보살좌상 

 

 

 

 


선암사 해우소

선암사 해우소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뒷간도 없을 것이다.

 

"건물은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다.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다. 출입구에 설치된 풍판은 이 건물의 특징으로, 풍판 아랫부분의 가운데와 양 끝을 약간 들린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이렇게 곡선으로 처리된 입구의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여주는 한편 드나드는 사람의 머리높이를 생각하여 배려하고 있는 듯하다. 범종루와 이 건물이 있는 해천당 사이에는 지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상부층과 하부층으로 지혜롭게 분리하여 이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짜임새도 튼튼하고 옛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보존 상태 또한 비교적 좋은 편이다. 선암사의 측간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20년 이전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순천시청

 


선방

무량수각 현판

 


선암사 와룡송.

수령 500여년으로 정호승 시인의 시의 등장인물이다.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 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칠전선원 후원

어떤 깨달음을 보여주는 흐름일텐데.


끝내

상선약수上善若水만 되내이다 돌아섰다.

 


석정石井

보성 벌교에 계시는 분이 시주하였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선암매는 동면중

 


각황전

태고종 종정이 계시는 무우전 안쪽 전각

봉안된 철물은 언제 인연지을 수 있을런지.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으로 통일신라 경문왕 원년(861)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종 1년(1660)에 복원하였고, 다시 영조 36년(1760)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 사적비.중수비

 


선암사사적비 仙巖寺事蹟碑.1919

 


선암사중수비 仙巖寺重修碑. 1707년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버린 절을 약휴대사의 노력으로 힘들게 복원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는 높직한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받침의 머리는 용의 머리화 되었는데 여의주를 물고 있지 있으며, 목이 매우 짧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등은 선명하게 새긴 육각무늬로 덮혀있고, 중앙에 네모난 비좌를 마련하여 비를 꽂아두도록 하였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겼고, 윗면에는 서로 엉켜 꿈틀거리는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조선 숙종 33년(1707)에 비를 세웠으며, 채팽윤이 글을 짓고, 이진휴가 글씨를 썼다. 

 


마애선각약사여래좌상

광무팔년갑술삼월光武八年 甲戌 三月 . 1903년에 조성된 마애불이다.

 


동부도

 

 

북부도



선암사마애여래입상

대각암 초입에 계신다.

 


대각암 부도

 


서부도전

마애부도와 더불어 여러기 부도가 모셔져 있다.


3~4시간 답사 후 사하촌에 내려 온 후에야 서부도전을 놓친 것을 알았다.

1시간 간격으로 배차된 버스가 눈 앞에 있었지만 다시 서부도전으로 향하였고 내려오는 길에 눈은 왜그리 을씨년스럽게 흩날리던지.


20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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