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부여군

부여...도천사 사적비

임병기(선과) 2017. 1. 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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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사지.은산면 대양리 455-3번지

진입동선이 용이하지 않아, 좁은 농로를 돌고돌기를 여러번 반 복 한 후에 뵈었다.

현재 사역에는 와편.도자편이 산포해있고, 건물지가 유존한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농경지로 확인해보지 않았다.

 

한국의 사지에 기럭된 사적비문에 의하면 "도천사道泉寺는 백제 의자왕의 동생인 도천군道泉君의 원당願堂으로 건립되었으며, 조선 세조대에 기존 배치를 혁파하고 새로 28房을 설치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옛 터에 동서랑東西廊을 중건하고, 40년 뒤 4암자를 건립했다. 당시 사찰에는 법전法殿, 정문正門, 동상東上·서상西上·선당禪堂·승당僧堂으로 구성된 익翼廊이 있었고, 암자는 모암茅庵, 중암中庵, 죽림암竹林庵, 원적암圓寂庵이 있었다."고 한다

 

 

사적비1

숭정기원후재갑술오월일崇禎紀元後再甲戌 午月日 명문을 통해 甲戌(1754년)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숭정기원후 두번째 갑자 무오(戊午)년으로 해석하여 1798년으로 해석의 소지도 있다)

비문은 정언충(鄭彦忠)이 짓고, 글씨는 정언필(鄭彦弼)이 해서로 써서 전면에만 새기고, 비액碑額 해서로 새기었다.

 

귀부.비신.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귀부는  눈,코.입,뿔을 소략하게  간략하게 표현하였고, 귀갑과 발, 꼬리는 나타내지 않았다.

 

 

귀부

 

 

전면 상부 도천사사적비道泉寺事蹟碑 비액

전면 좌측. 숭정기원후재갑무오월일崇禎紀元後再甲戌午月日 명문 일부가 보인다.

 

 

道泉寺事蹟碑
有師 名月桂 被緇衣 款余門曰 桂近住錫于縣之道泉寺 寺古無碑 無以徵故實于今 若後敢發大願 礱密名以待能言者 子其恵一言 余復曰 師 佛者也 佛之道 宗空寂 驅萬有之顆 而虛而無 摂五蘊之棼 而寂而滅 自吾四大 以至塵刹 率以無之者 其道也 不必於寺之故實 獨傳而有之 奚以蘄余言 曰否 祛體空折色之跡 而造乎真源 通假有借無之名 而入乎實相 緣境生情 由定發恵 費我念力 相用不捨 是大慈悲念 則於少林真蹟 又烏得無情耶 曰然則 師之道 不專淪於空洞而離乎真 殆柳氏所謂不可斥 焉以夷者 於其請 冝無辭 遂叙之曰 寺在故泗泚西三十里 鷲嶺之北天涯山下 即百濟義慈王弟道泉 君願堂 而仍冑其號  佛法莫盛麗代 而道泉君以親王介弟設堂 祝願求福 田利益 則崇尙異敎 不特
麗氏 自羅濟已然 不然 知義慈荒淫 國家将亾 託禪以逃之 如新羅敬順王子單衣入山者歟 然上焉莫之徵也 已歷羅䴡 逮我 世祖朝 斥舊制 置二十八房 崇搆法宇 夷■髙門 究極其制 又錫之土田 以供歲獻 龍蛇之變 屋宇盡燬 正堂亦幾不保 亂已僧■韻尙珠 掇拾燼餘 即舊址重建東西廊 後四十年 又建四菴 學易齋鄭相國麟趾 施田供香 居僧歲祀之 至今不替云 今距百濟 千有餘秊 方䧺據一方 ■羅蹴䴡 足以威一世耀百代 倐焉 雲過水逝 而獨留半區招提 於幾番刼火之後 俛仰今古者 必有魯殿之感 而抑其靈照之戶 須彌之柱 有不随泡漚而幻滅者耶 法殿凡八楹九樑 正門凡十二楹七樑 翼廊凡四 曰東上 曰西上 曰禪堂 曰僧堂 菴凡四 曰茅菴 曰中菴 曰竹林菴 曰圎寂菴 歲貢白杮凡八十五斗 綿 紙凢一十卷 有供 佛田若干 畝施物主若干人 書之碑陰 桂師蚤觧脫 袞弢敷演 大敎發明 印法方為 桒門上首 銘曰    佛西流兮彌海東 君設堂兮事真宗 人 天果兮武德㓛 宗國亾兮業不終 泗之河兮流溶溶 龍無跡兮祗靈宫 騁燋沮兮邦內訌 鳥譆譆兮煽融風 神呵禁兮護大䧺 師發誠兮楝宇隆 事遂泩兮何夢夢 閟千禩兮為瞽矇 鑱玄石兮詔無窮 曰桂師兮效厥衷

 

崇禎紀元後再甲戌午月 日

通訓大夫 前司憲府持平 鄭彦忠 撰    安谷鄭彦弼 書

 

 

후면

 

 

 

 

 

사적비 2

자연석 비좌위에 명문을 새긴 비갈형태의 사적비다.

명문은 육안으로 구분하기 쉽지 않다.

 

 

 

비지정 문화재에 대하여 진입동선 안내문이 절실해 보인다.

 

201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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