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해인사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6. 6. 27. 08:45
728x90

 

원당암 마애부도 뵙고 내려오는 길

비가 제법 내립니다.

 

해인사 비림 직전 우측 부도전

해인사 부도전으로 칭하는 게 맞을까요?

해인사를 상징, 대표하는 부도전이라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나요?

 

그건 나의 소관이 아니고...

 

이곳에 오면

고승들의 일대기 보다는

우리시대 부도의 패러다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석탑형, 팔각원당형, 석종형, 원구형,  변형된 원구형...

앞선 시대부터 내려오는 유형이 잖아요?

 

해인사 부도전이

21세기

새로운 부도 패러다임의 시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운대율사부도. 부도비

 

慈雲盛祐(1911~1992)

1911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태어났으며1917년 진부면 서당에서 동몽선습,사서삼경 등 유서를 수학하였다.192616세의 나이에 정초기도를 위해 절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혜운경윤스님으로부터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이 불급승가반일한(不及僧家半日閒)이라”(세속의 10036,000일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더 낫다)

 

는 순치황제 출가시를 듣고 발심하여 마침내 192717세의 나이로 출가를 결심하고 해인사로 달려가 팔만대장경판전에서 일만배를 올리고 혜운스님을 은사로 남천한규화상을 계사로 대적광전에서 사미계를 수지하고 서원게를 읊었고, 같은 해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1929년 해인사 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고 범어사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시작해 그 해 순천 선암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하였다.

 

1932년 범어사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해인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표훈사에서 동안거를 하였으며 1933년에 울진 불영사에서 하안거 및 동안거를 하였다.193424세에 범어사에서 경념율사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하고 율장연구 시작하여 5부대율을 날마다 서사 지송근행하였으며1935년 범어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3년 동안 울진 불영사에서 장좌불와로 결사하였으며 1937년 문경 김룡사와 양산 통도사 선원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1938년 울산 학성선원에서 하안거를 하였다.1938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 대선사로부터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거양(擧揚)한 다음 청산상운보(靑山常運步)하고 백운영부동(白雲永不動)이로다 인답수저과(人踏水底過)한데 수불착의상(水不着衣裳)’이라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용성종사(龍城宗師)는 이를 보고 그 경지를 인증하여 곧 입실건당을 허락하고 정존백수자(庭前栢樹子)가 염연관수림(儼然冠山林)이로다 신대감청색(身帶紺靑色)하고 엽복수미산(葉覆須彌山)’이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의발(衣鉢) 전해주었다.1939년 일제의 식민수탈로부터 조국해방과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불교의 빛나는 전통을 중흥시키려는 대원을 세우고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날마다 20시간씩 백일 용맹정근으로 문수기도를 봉행(奉行)하던 , 99일째 되는 날에 황홀한 속에서 푸른 빛 사자를 타고 나타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심지계법문(心地戒法門)을 통달하였으니, 계율을 홍통(弘通하여 모든 인연을 구족하고 대법당을 건립하여 칠불법계(七佛法戒)를 선양하며 승강(僧綱)의 확립과 승풍을 진작하여 천하사원에 복기명위(福基命位)를 확립하고 계해(戒海)가 징청(澄淸)하여 속태가 없어지며 불일(佛日이 장명(長明)하고 법륜이 상전하기를 발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률로써 법륜상전(法輪常轉)의 서원을 세우시고 불조혜명의 기틀을 바로 잡았다.1940년 이후 10여 년간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였으니, ()으로는 금강산 마하연과 남()으로는 학성선원,불영사,김용사,통도사,백양사 등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서울 대각사에 주석하면서 당시 희귀한 율장을 구할 수 없어 2년여에 걸쳐 삼복 염천에도 두터운 장삼을 입고 날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실려있는 오부율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 모두 필사(筆寫)하여 율장(律藏)을 깊이 연구하였다.194837세 때 처음으로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하면서 보살계 수계법회를 가졌다.

 

 1949년 계율 홍포의 원력으로 비구계본(比丘戒本 1만부, 비구니계본(比丘尼戒本) 1만부, 사미율의(沙彌律儀) 5천부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5천부, 범망경(梵網經) 1만부 등 많은 율전(律典)을 출간 분포하였으며, 1951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재난에 처한 재가불자의 수행과 교화를 위해서 부산 감로사를 창건하여 국난퇴치와 자성성불의 지름길로써 통도사와 감로사에 천화계단 보살계 수계산림과 삼천불 삼천배 참회기도 법회 개설하였다.1955년 교단정화이후 초대 해인사 주지에 추대되었으며 1956년 합천 해인사 금강계단 전계화상에 추대된 후 1981년 종단 단일계단이 형성될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 전국 각 사찰에서 시행한 계단에서 스님으로부터 수계한 비구가 1650, 비구니가 1536, 그리고 사미 사미니 보살계 식차마나 우바새 우바이 팔관재계 등을 받은 수계제자가 도합 십만여 명에 달한다

 

.1956년 재단법인 해인학원 이사장에, 1957년 조계종 경상남도 종무원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7년에는 범어사 주지를 지내시고 1957년 이후로는 계정일치 수행을 제창하고 경전과 율전의 한글 번역에 매진하여 무량수경,아미타경,십육관경, 약사경,자비도량참법 등 21종에 이르는 한글본을 출간 유포하시었으며, 휴대하기 간편한 문고판의 출판에도 심혈을 기울여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 원각경(圓覺經) 보안보살장(普眼菩薩章),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십육대아라한예찬(十六大阿羅漢禮讚), 삼시계념불사(三時繫念佛事), 정토예경(淨土禮敬), 정토법요(淨土法要) 등을 간행하여 언제 어디서든 독경하고 예참할 수 있도록 유통불사를 행하시었으며,미타예찬彌陀禮讚』『정토의범淨土儀範』『제경정화諸經精華9만여 부를 간행,유포했다.  스님은 감로사에 주석하면서 주야로 각각 삼시계염불사(三時繫念佛事)로 예참하며 육시염불(六時念佛) 봉행하였다.

 

 일일(一日) 30만독씩 아미타불종자진언을 염불하였고, 또한 오후 4시 아귀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헌식 외에는 하루 한 끼니만의 일중식(日中食)을 공양하면서도 삼천배의 정진을 늦추지 않으셨다.1960년 스리랑카에서 개최한 세계불교승가연합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1974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한 세계평화촉진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1976년 조계종 원로에 추대되고, 이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77년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조계종 대종사법계를 품수하였다

 

.1981년 종단 단일계단전계화상에 추대되고1987년 동국역경원장에 이어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1992년 계유년 음력 14일 해인사 홍제암에서 '진성원명본자공(眞性圓明本自空) 광조시방극청정(光照十方極淸淨) 래여청풍소일래(來與淸風逍遙來) 거수명월자제거(去隨明月自在去), 라는 임종게를 쓰신 다음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명하면서 조용히 입적하시니 향기가 진동하고 묘음이 청아하였으며 염불소리와 함께 입으로부터 오색광명이 서쪽하늘을 가득 메웠다. 세수 82, 법랍66년이었다. 7일째인 213일 해인사 연화대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장으로 거행하였다. 다비후 은행크기의 사리 19과와 녹두크기의 사리 5천여 수가 출현하였으나 생전에 사리를 찾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큰 것만 수습하여 이를 해인사 감로사 경국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큰스님의 행장에 더욱 빛나는 것은 1953년부터 원적하시던 1993년까지 근 40여 년간 종단(宗團)의 계단주(戒壇主),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서 10여만 명에 달하는 수계제자를 배출하였다. 스님께서 젊은 시절 오대산에서 계율(戒律)로써 법전상전(法輪常轉)의 서원(誓願)을 세우고 불조의 혜명을 잇겠노라고 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염원(念願)을 일생동안 견지하시고 수많은 출가(出家와 재가불자(在家弟子)를 배출하여 승단(僧團)의 기강을 확립하였으며 계해(戒海)의 징청(澄淸)을 위해 항상 전심전력을 기우렸던 것이다. 한 중생을 제도하여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천상에 그 복업(福業)이 무량하다 하였거늘 하물며 이와 같이 많은 대중들에게 계율을 전수하여 청정한 범행을 닦도록 지도하신 스님의 계덕(戒德)은 능히 하늘로도 덮지 못하고 땅도 다 싣지 못할 것이다.

 

 자운 스님은 해인사에서 염불만일회를 결사하여 관음전에서 정토왕생업을 닦았고, "정토삼부경" "정토심요" 등 저서를 내어 정토수행을 널리 선양하였으며 서울 보국사에서 대동염불회를 결사하여 정토수행을 보급하였으며 스님께서는 평소 염불과 참회, 지계수행으로 스스로 상참괴승(常慙愧僧)이라 하며 일심으로 법답게 살았다....출처/다음 

 

 

혜암대종사부도.부도비

 

혜암성관慧菴性觀(1920~2001)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720번지에서 김해 金氏 가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부친은 김원태(金元泰)이시고 모친은 금성 정(丁) 씨이셨으며 속명은 남영(南榮)이라고 하였습니다. 14세에 장성읍 성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동리의 향숙(鄕塾)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수학(受學)하신 후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열람(閱覽)하였으며 특히 불교경전과 위인전을 즐겨 읽으셨습

니다

 

1946년, 27세에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 출가하여 인곡(麟谷)스님을 은사로,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하여 수계득도(受戒得度)하였으니 성관(性觀)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야총림선원(伽倻叢林禪院)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며 첫 안거(安居)를 하셨습니다.


947년(28세),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우봉, 자운, 보문, 도우, 법전, 일도스님등 20여 납자와 더불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 금정산 범어사 선원등에서 용맹정진하셨습니다.

1951년(32세), 해인사 장경각에서 은사이신 인곡스님 

 어떤 것이 달마대사가 한쪽신을 둘러메고 간 소식인고" 하시니 

"한 밤중에 해가 서쪽 봉우리에 떠오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 어떤 것이 유마힐이 침묵한 소식인고"
" 청산은 스스로 청산이요, 백운은 스스로 백운입니다" 답하시니
인곡스님께서 " 너도 또한 그러하고 나도 또한 그러하다" 하시며,
혜암당(慧菴堂)이라는 법호를 내리셨습니다.


이후 통영 안정사 천제굴(闡提窟), 설악산 오세암(五歲庵), 오대산 서대(西臺), 태백산 동암(東庵)등지에서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더욱 고행정진(苦行精進)하셨습니다.
1957년(38세)오대산 영감사 토굴에서 용맹정진 하시던 중, 주야불분(晝夜不分)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더니 홀연히 심안(心眼)이 활개(豁開)하여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시되

이로부터 오대산 오대(五臺), 동화사 금당선원, 통도사 극락암선원, 묘관음사선원, 천축사 무문관(無門關)등 제방선원에 나아가 더욱 탁마장양(琢磨長養)하셨습니다.1967년(48세) 해인총림 유나(維那), 1970년(51세)에는 대중의 간청에 따라 해인사 주지를 잠시 역임하시기도 하였습니다.1971년(52세) 통도사 극락암 선원에서 동안거 중에 경봉 조실스님께서 '봉통홍중공(峰通紅中空)'의 운자(韻字)에 맞추어 심경(心境)을 이르라 하시니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1976년(57세), 지리산 칠불암(七佛庵) 운상선원(雲上禪院)을 중수(重修)할 때 먼지 속에서 작업도중에 홀연히 청색사자를 탄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게송으로 수기(授記)를 받으셨습니다.

1979년(60세) 해인사 조사전에서 3년 결사를 시작하여 71세까지 대중과 함께 정진하시면서 유나(維那), 수좌(首座), 부방장(副方丈)으로서 해인총림의 발전과 총림대중의 용맹정진 가풍진작을 위하여 진력(盡力)하심에 후학들의 존경과 흠모가 항상 뒤따랐습니다.


특히, 스님께서는 출가이후 가야산 해인사선원, 희양산 봉암사선원, 오대산 상원사선원, 금정산 범어사선원, 영축산 극락암선원, 지리산 상무주암, 조계산 송광사선원등 제방선원에서 당대 선지식인 한암, 효봉, 동산, 경봉, 전강선사를 모시고 45년 동안 一日一食과 오후불식,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하며 오로지 참선수행에만 초지일관(初志一貫)하셨으니 그 위법망구(爲法亡軀)의 두타고행(頭陀苦行)은 가히 본분납자(本分衲子)의 귀감(龜鑑)이요, 계율(戒律)이 청정함은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87년(68세)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임되셨으며, 1994년(75세)에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1993년(74세) 당시 조계종 종정이시며 해인총림 방장이셨던 성철대종사께서 열반에 드심에, 뒤를 이어 해인총림 제6대 방장에 추대되시어 500여 총림 대중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 하셨습니다.특히, 선원 대중에게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여법히 지키도록 하시고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적게 먹어라", " 안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밖으로 남을 도와라" 하시며 납자(衲子)로서 철저히 참선 수행할 것을 강조 하셨습니다.


1994년 조계종 개혁불사와 1998년 종단 사태시에는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모든 종도들의 의지처와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셨습니다.일생을 청정한 계행과 철저한 두타행(頭陀行)으로 수행정진 하신 스님께서는 1999년(80세) 4월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되시어 종단의 안정과 화합을 위하여 심혈(心血)을 기울여 오셨습니다.2001년(82세) 12월 31일 오전, 해인사 원당암 편안히 열반에 드시니 세수(世壽)는 82세가 되시고 법랍(法臘)은 56년이십니다....출처/원당암홈페이지 발췌

 

 

성철스님 부도

 

성철스님 부도(경남 합천) - 현대적 조형미 담은 부도 ...유홍준

큰스님 부도(浮屠.사리탑)가 스님의 입적 5주기를 맞아 지난 98년 11월8일 일반에 공개됐다.
부도란 한 스님의 유골을 안치한 기념 돌탑으로 성철스님 부도는 성철스님문도회에 의해 스님의 사리와 금강경을 함께 넣어 해인사 일주문 옆 부도밭에 설치됐다.


재일(在日) 설치미술가 최재은(崔在銀.45) 씨가 3년여 작업끝에 완성한 이 부도는 바로 옆에 건립된 성철스님 전시실과 함께 스님의 뜻을 후대에 전하게 된다. 최씨는 사찰 조형물의 고정관념을 깨고 현대적 조형미를 담은 새로운 형식의 부도를 만들어냈다. 일반 공개에 앞서 이 부도를 둘러본 미술평론가 유홍준 교수가 부도 건립 의의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성철스님 부도가 완공됐다는 소식을 듣고 천성을 속이지 못하여 해인사로 달려가 배관하고 이 글을 쓴다. 특히 이 불교 기념조형물에 대하여 나는 각별한 관심과 기대가 있어왔다.

우리나라 부도의 역사는 9세기 하대신라에 시작되어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1천년이 넘는다. 처음에는 8각당(八角堂) 형에서 출발하여 석종(石鐘) 형, 석탑형, 계란(卵) 형 등으로 계속 새 양식을 낳으며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큰 사찰 한쪽에는 반드시 그 절집을 대표하는 스님의 부도들이 남아 있고 쌍봉사 철감, 태안사 혜철, 법천사 지광, 연곡사 동부도 등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빛나는 유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고 유감스럽게도 정작 우리의 20세기는 20세기다운 정신과 예술이 반영된 부도가 제작되지 않았다. 그저 무의미한 모방 아니면 과도한 치장으로 존경과 예배의 염(念) 은 고사하고 외면과 불평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성철스님 부도는 이런 반성에서 20세기다운 부도를 제작코자 현상공모를 했다. 그러나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결국 성철스님문도회는 작가 최재은에게 위촉하게 됐다. 최재은은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설치미술가로 그녀의 활약은 미국의 김원숙, 프랑스의 김순기, 독일의 노은임 등과 함께 한국을 빛내는 '억척스런 대한의 여성작가'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93년 파리 유네스코 건물 옥외에서 열린 다실(茶室) 축제에서 이탈리아 건축가 에토르 소트사스(E.Sottsass).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등과 함께 최재은도 5명 중 한명으로 뽑혔을 정도였고, 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때는 일본의 커미셔너 이토 준지가 그녀를 추천할 정도로 국적을 뛰어넘는 대접을 받았다.


최재은의 예술이 국내에 처음 선보인 것은 90년 경동교회를 대나무로 입힌 설치작업이었고, 93년 대전엑스포 때는, 나도 그 심포지움에 참석한 바 있는, '재생조형관' 설치를 맡았다. 지금 쉽게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녀의 작품은 삼성의료원 영안실 입구에 있는 소위 이브 클랭 블루로 통하는 환상적인 파랑색 조형물인 '시간의 방향' 이다. 최재은의 예술세계는 건축.조각.공예의 장르개념을 무너뜨린 설치미술로 그 발상의 스케일이 아주 크고, 형식 또한 대단히 전위적이다.

성철스님 부도에서도 최재은은 설치개념에서 출발하여 자연과 구조와 관객(참배객) 이 일체가 되는 기념조형물을 연출해 냈다. 그러나 구조물 자체는 대단히 '미니멀' 한 방향으로 추구했다. 본래 예술이란 작가의 감정이 최대치(맥시멈)로 나타나는 것이 생리이지만, 미니멀 아트에서는 오히려 최소화시킴으로써 결국 대상의 본질은 더욱 드러나고 관객을 관조에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성철스님 부도에는 그런 미니멀 사상이 어울렸던 것이다.


부도의 기본개념은 원(圓) 이며, 원의 시초형태인 정사각형과 원의 발전형태인 구(球) 만이 이 구조속에 들어와 있다.
부도의 여러 전통 중 통도사. 금산사의 금강제단 양식을 이어받아 '낮은 단(壇) 위의 구(球) 하나' 로 압축되었다.
108평의 원형참배대는 68개로 등분하여 거기서 기도할 수 있게 했고 사리탑은 3단의 4각받침대에 반구(半球) 두개가 마치 앙련(仰蓮) 과 복련(復蓮) 개념으로 '구' 를 받들고 있다. 그 예리한 선맛과 날아갈 듯한 가벼움이 이 부도의 정신과 형식 모두에서 핵심 요소로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미묘한 느낌을 살리기 위하여 그녀는 돌조각에서 동양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기술팀의 도움을 받았다. 그것이 한때 엉뚱하게도 일본색이라는 모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치밀한 작업 덕분에 0.1㎜의 오차도 없이 1.1도의 부드러운 기울기를 갖고 있는 원형참배대의 구와 반구는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작가는 이 부도에 '자(自) 의 공간' 이라 이름지었다. 해인사 일주문 못미쳐 부도밭 뒤편에 모셔 있는 성철스님 부도는 결국 금세기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던 스님의 가장 사랑받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사리탑으로 될 것만 같다.


 

동곡 일타(東谷 日陀)스님

스님은 1929년 9월 2일(음력 8월 1일) 충청남도 공주군 우성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연안 김씨 봉수공을 아버지로, 광산 김씨 상남씨를 어머니로 하여 4남매 중 삼남(三男)으로 태어났습니다.1933년(5세), 사는 마을로 탁발을 하러 온 스님을 따라다니며,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그날 모두 외웠을 뿐 아니라, 지옥 · 천당 · 극락 등의 이야기와 인과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믿었으며,″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마음에 깊이 새겼으니, 전생부터의 불연(佛緣)은 참으로 지중(至重)하였습니다.

1936년(8세) 공주 본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1942년(14세) 친가 외가의 식구 41 명이 모두 출가함에 따라, 보통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양산 통도사에 계신 고경 스님을 찾아가 출가득도 하였습니다.1945년(17세) 현 보광고등학교인 통도사립중학교를 졸업하고,1946년(18세) 정월에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자, 순천 송광사 삼일암 선원의 효봉 스님 회상에서 첫 하안거를 하고 속리산 복천암 선원에서 동안거를 하며 참선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불교공부의 기초가 미진함을 느끼고,1947년(19세)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경학(經學) 공부에 몰두하였으며, 이때 스님은 불경에 대한 문리(文理)를 터득하였습니다.1949년(21세)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고,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으며,1950년(22세)부터 다시 운수납자의 길로 들어서서 진양 응석사와 범어사, 성주사 선원 등에서 금오 · 동산 · 구산 · 성철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습니다.

1953년(25세) 자운율사의 권유로 천화율원(天華律院)에서 율장전서를 열람하고 계법(戒法)을 정립하였으며,1954년(26세)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혜암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보궁에서 하루 3천 배씩 7일기도를 하고 연지연향 발원을 했습니다.

허공과 같은 법신자리에 절하옵고
평등한 일심으로 간절히 임하나이다
오직 가피를 드리우시어
저희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소서

발원을 마친 뒤 스님은 세속과 관련된 사람노릇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중노릇만 잘하리라" 결심하며 오른손 네 손가락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였고 한 밤중에 시작된 연비는 날이 환해지면서 끝이 났습니다.이듬해인 1955년(27세), 스님은 경북 봉화군 소천면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동구불출, 오후불식, 장좌불와를 지키며 홀로 6년의 결사(結社)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1956년 음력 3월 22일에 큰 환희의 경지를 이루어 게송을 지었습니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깊은 산 높은 봉우리 위에 앉아 산새와 솔바람 소리를 벗 삼으며 깊은 삼매의 도를 이루었던 일타 큰스님!노년에도 스님께서는 이 태백산에서 정진할 때가 "참으로 좋은 시절" 이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태백산 6년 정진을 통하여 정법(正法)과 대원(大願)과 대행(大行)을 구족하신 스님은 1960년(32세) 산에서 내려와 걸림 없는 교화의 길을 열어 보였습니다.종단의 큰일이 있을 때마다 종회의원 · 교육의원 · 법규의원 · 감찰위원 · 역경위원 등을 맡아 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또한 언설변재(言說辯才)를 갖추었던 스님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법사로 추앙 받아,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걸림 없는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하였습니다.그와 같은 와중에서도 스님은 해인사, 화엄사, 통도사 극락암 등의 선원에 들어가 하안거 · 동안거 결제에 한차례도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45세 때일 1973년, 스님은 인도의 팔대성지 등과 동남아시아 10여 개 국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면서 불교의 뿌리와 우리불교의 장단점을 살폈으며, 이듬해에는 유럽 10여 개국을 순방하였습니다.그때 스님은 ″겉모양이나 언어, 문자를 떠난 마음이야말로 세계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귀국하자 곧바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다시 들어가 안거정진 하였습니다.1976년(48세) 해인총림의 율주(律主)로 피임된 스님은 <사미율의>, <불교와 계율> 등 계율과 관련된 여러 책을 발간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여, 일제강점기 때부터 무너졌던 이 땅의 계율을 재정립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또한 1980년(52세)부터는 미국 LA의 고려사(高麗寺) 포교를 시작으로 2년 동안 북미, 남미, 중미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렸습니다.

1987년(59세) 봄, 스님은 ″간경화″라는 난치의 병에 걸렸습니다.14년 전 인도로 갔을 때 옮은 간염을 방치하여 간경화로 진행된 것입니다.이러한 큰 병이 찾아들었어도 스님은 오히려 정진으로 일관하며 더 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1990년(62세) 봄, 스님은 지리산 칠불암으로 들어가 용맹정진하시며 다음의 시를 남겼습니다.

약과 병을 함께 다 놓아버리고
아자방 한가운데 앉았으니
멀리 바라보니 흰 구름이 나르고
가까이 들으니 두견새가 우는구나

옛 성인의 자취를 좇아 생각하니
이 아자방에서 큰 기틀을 얻으셨도다
나도 여기에서 묵언정진하며
남은 해를 여여하게 보내리라

죽음을 넘어선 정진으로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스님을 1992년부터 불자들의 올바른 신행 생활을 위해 집필을 시작하셨습니다.알기 쉽고 깨달음이 깊은 저서를 통하여 일일이 접견할 수 없는 불자들을 교화하기 위 해 글을 남기신 것입니다.

<기도>, <생활 속의 기도법>, <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 <시작하는 마음>,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불자의 기본예절>, <범망경보살계 5책>, 법어집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등 20권에 가까운 책은,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금에도 우리 곁에 남아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7년(69세)에는 일어판으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는 불교의 기도> 라는 책을 일본 법장관(法藏館)에서 출판하여, 일본의 ″좋은 책 10선″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습니다.또한 1993년(65세) 때는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구족계 단일 계단 전계 대화상으로 추대되어 모든 승려들에게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를 수계하는 중임을 맡았으며,1994년(66세) 5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리고 해인사 지족암에 선방을 만들고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후학을 지도하셨습니다.
1996년(68세)부터 스님의 몸은 열반을 감지했음인지 생사리(生舍利)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연비를 한 오른손에서 한 달에 한두과 또는 세과씩 나와 열반하시기 전까지 1백여 과의 사리가 나왔습니다.그 사리중의 일부는 증장(增長)하거나 분신(分身)을 하여 여러 개로 나누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만년에 스님은 자주 말씀을 남겼습니다.

"다음 생에는 지구상의 최강국인 미국에서 태어나 거룩한 상호를 갖추고, 학업을 마치면, 한국으로 와서 출가하리라. 그래서 젊은 나이에 부처님과 같은 대도(大道)를 이루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이 땅의 불교를 세계에 펼치리라."이 말씀처럼 스님은 3년 전부터 매년 가을철이 되면 미국을 찾았습니다.특히 하와이에 오래 머물며 ″염화시중″의 화두를 놓지 않고 마지막 회향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1999년(71세) 11월 22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간 스님은 11월 29일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상좌 혜인, 혜국, 성진, 도범 등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수서하셨습니다.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만리의 맑은 바람 옛 거문고 타는구나
생사열반 이 모두가 오히려 꿈 이러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서로 방해롭지 않네

게송을 남긴 스님은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71세가 되시고 법랍은 58년이십니다.

 

"7년의 준비 끝에 제막된 사리탑과 비는 조각가 이영섭 씨의 설계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꾀한 것이 특징. 사각형 화강암의 탑신 네 귀퉁이 하단에 네 마리 사자상()을 조각했다. 마치 사자가 사리탑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다.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비는 조계종 지관 총무원장 스님이 글을 짓고, 서예가 시암 유형재 선생이 한 달간 두문불출하면서 일자삼배()로 글씨를 썼다. 비석 머리에는 꽃구름과 비천상을, 받침대에는 꽃구름 무늬를 새겼다. 미술평론가 윤범모(경원대) 교수는 “한국 불교미술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격조 있는 미술품으로 단순하면서도 법고창신()의 정신이 깃든 담박한 고졸미()가 돋보인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 

 

출처/시나브로님 사진 촬영

(내가 찍은 사진은 어디로 갔지?)

 

영암당임성대종사映岩堂任性大宗師(1907~1987)

영암스님은 높은 수행력과 함께 조계종단 및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근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으로 1975년 당시 큰 어려움에 처한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위기를 헤쳐나가 지금의 봉은사 기틀을 세웠다. 1907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15세에 통도사로 출가하여 구하 천보 스님께 사미계를 받았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뒤 통도사 해인사 등지에서 수행하였으며 월정사 한암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불영사, 월정사, 해인사 등에서 주지 등 주요 소임을 맡았는데 스님께서 소임을 사는 사찰은 당시 어려운 경제 사정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해인사 주지 소임 이후 1975년 봉은사에 주석하시면서 봉은사의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동국역경원장, 중앙종회의원, 종회의장, 총무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원로회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하였다.

스님의 성품은 매우 꼿꼿하고 엄격하여 종단의 수십년간의 공무 생활가운데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늘 스님은 주머니가 둘 달린 옷을 입고 다니셨는데 오른쪽 주머니에는 공금을 왼쪽 주머니에는 사비를 넣고 다닐 정도로 철저하셨으며, 종단과 절의 어려운 일에 늘 발 벗고 나서곤 하였다.


1987년 6월 3일 봉은사에서 입적하시니 종단 원로회의장으로 영결식을 모신 뒤 봉선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하였다.다비 후 10여과의 사리가 출현하여 현재 봉은사에 봉안된 스님의 부도에 모셔졌다.



동광당 명진스님 부도.부도비(1939~1998)


명진 스님은 오늘날 해인사가 법보 종찰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갖추게 한 장본인이었다. 40년가까이 해인사에 주석하면서 쓰러져 가는 가람을 각종 불사를 통해 새롭게 일으킨 인물이었다.


명진 스님은 1939년 전북 정읍에서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우연히 스님의 집을 찾은 한 스님으로부터 “이 아이가 여덟 살만 되면 합천 해인사로 보내라”는 말 때문인지 스님은 어려서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스님은 55년 16세 되던 해 계룡산 신원사를 찾아 영암 스님을 은사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불문에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60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62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했다.66년 해인사 말사 포교당 주지 소임을 시작으로 해인사 교무국장, 총무국장을 역임한 스님은 74년 조계종 중앙 종회의원으로 피선되면서 2차례에 걸쳐 종단의 중대사에 관여했다.

 

 그러던 스님은 이후 82년 해인총림 주지에 추대되면서 대대적인 도량정비에 나서며 본격적으로 해인총림의 불사를 시작했다. 스님은 스님들이 수행하고 불자들이 기도 정진하는 터전을 정비함으로써 해인사가 눈밝은 납자를 키우고 여법한 진리를 전파하는 가람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스님에 의해 중건 된 건물만도 모두 9채. 많은 대중이 모일 수 있는 회관을 건립하고 종무소의 낡은 기둥을 교체, 요사채에 고성능 보일러를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해인사 범종을 조성했으며 종각도 새롭게 지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은 2년 동안 이뤄진 것이다.그러나 부처님 법을 배우고 따르기 위한 도량을 조성하려는 스님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님은 주지 소임을 마친 이후에도 해인사 길상암을 비롯해 부산 사리암, 대구 청룡사. 의정부 삼은사 등 4곳의 사찰을 중·창건했다.


이 같은 대형 불사가 모두 원만히 이뤄진 것은 스님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다. 스님은 은사 영암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염불제일’이라는 별칭이 따를 정도로 평생을 염불 수행에 천착했던 인물이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신심을 내서 기도하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며 법회에서 일반 불자들에게 강조했던 스님의 말처럼 스님은 자신이 추진하는 일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해인사 법당을 찾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와 함께 스님은 불우한 노인과 부모 잃은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에도 외면하지 않았다. 스님은 자신이 주석하는 길상암에서 15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았으며 입적하기 직전까지 해인사 아랫마을에 대형 양로원을 건립하는 일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을 부처님 도량을 만드는 일과 불우한 이웃을 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던 명진 스님은 1998년 11월 1일 세수 60세, 법납 46세로 입적했다


 

고봉선사지탑(1931~2003)

杲峰慧雄선사

1931년 10월 23일 충북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서 全州李氏 가문에서 탄생하셨으며, 부친은 李鍾德 이시고 모친은 慶州金氏 였습니다. 2남2녀의 자녀 가운데 次男으로 태어난 스님의 속명은 相浩였습니다.17세가 되던 1948년 홀연히 발심하여 가야산 해인사를 입산 출가하여 영월스님을 은사로, 인곡스님을 계사로사미계를 수지 하였으며, 이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慧雄이었습니다.


1950년 19세가 되던 해에 상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신 후 수년간 선원에서 정진을 하시게 됩니다.1956년 25세가 되던해 경하스님께 입실하고 법호를 고봉( 峰)이라 하였습니다. 1958년(27세) 해인사 강원에서 佛祖語錄을 열람하고 大敎科를 수료하였으며, 이듬해인 1959년(28세)에는 가야산 幻寂臺에서 목숨을 내놓고 용맹정진을 하시게 됩니다. 그 해 겨울 幻寂臺 에서 疑團이 獨路하더니 문득 한 경계를 접하시고 다음과 같은 悟道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昨夜千萬毘盧峰(작야천만비로봉)  어제 밤의 그 많던 비로봉들이
今覺一無太虛空(금교일무태허공)  이제 깨고 보니 본래 빈자리네
無無無字亦無空(무무무자역무공)  무라, 무라 하는 무자도 또한 비었으니
幻寂臺下幻寂空(환적대하환적공)  환적대도 환적한 공이네.


1962년(31세) 응석사와 범어사 백흥암에서 일타스님 등과 함께 琢磨長養하면서 수선수행에 일관하였습니다.1964년(33세)에는 포교일선에 뛰어들어 하양포교당에서 중생제도에 전념하셨으며 그 후 1971년(41세)에는 종회의원을 역임하고 1973년(43세)에는 총무원 교무부장 소임을 맡아 종단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1983년(52세)에는 해인총림 선원장에 취임하여 禪風을 진작하고 후학을 제접함으로서 佛祖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며 또한 본분 납자로서의 정진원력은 수행자의 사표가 되었으므로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흠모가 이어졌습니다.


이후 1985년(54세)부터는 해인사 극락전에 주석하시면서 禪德으로서 개인적 수행에 철저하였으며, 총림대중에게는 정신적 스승이 되어주셨습니다.2001년(70세) 8월에 팔공산 갓바위에서 造塔法門을 하시다 병환을 얻으시고 지리산 함소굴에서 요양하면서 문도들과 안거를 나셨습니다. 하루는 시자에게 전법을 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벽암록의 ‘碧巖’ 두 글자를 써 보이고 상좌 智山에게 다음과 같이 법을 전하는 傳法偈를 내리셨다.


碧水深處泥牛耕 (벽수심처니우경)   푸른 물 깊은 곳에 진흙소가 밭갈고
巖刻古佛石人去 (암각고불석인거)   바위에 새긴 고불이 돌사람 되어가네


2003년 3월 13일 正午에 해인사 極樂殿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서로 화합하여 중노릇 잘하라”는 당부를 하신 뒤 臨終偈를 手書 하시되,


一生離相相裏生 (일생리상상리생)  일생동안 상을 버리려는 상 속에 살았는데
一切諸相今際壤 (일체재상금제괴)  모든 상이 이제야 무너지는구나
西傳組道誰問我 (서전조도수문아)서쪽에서 전한 조사의 도리를 누가 묻는다면
伽倻 峰七佛峰 (가야고봉칠불봉)가야산 높은 봉은 칠불봉이라 하리라


라고 하시고, 편안히 열반에 드시니 世壽는 72세가 되시고 法臘은 55세 이십니다.


 

경하율사지탑


景霞載英율사

 

1869년 7월 2일

경북 고령군 임천면 신기동에서 수원백씨 가문에서 부친 白一彩님의 넷째로 출가 하시었다.

1884년

16세 되시던 3월 15일 가야산 해인사에 友蓮화상을 은사로 출가 得度하시고 법명은 載英이시었다.

1885년

17세 되시던 4월 8일 해인사 백련암에서 海耕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시다.

1986년

18세부터 해인사 강원에서 龍溟, 無碍, 應海강백으로부터 사집,사교,대교과를 수료하고 수의과로는 법화경과 범망경을 이수하시었다.

1901년

33세부터 해인사 선원에서 수선 안거 이래  30 안거를 성취하시다.

1918 년

50세에 수도암 선원에 조실로 취임하시다.

1922년

54세에 동화사에서 대구시 포교사로 임명 하시다.

1927년

59세에 해인사 주지에 취임하시다.

1928년

60세에 종회의원이 되시다

1928년

60세부터 10년간 해인계맥인 龍城律師에게 傳戒 받으시고 법호를 景霞라 하셨으며 그후 갈마, 교수, 전계사에 취임하여 많은 계단을 設施하셨고, 70세에 도원화상에게 계맥을 전하시었다.

1933년

65세부터 해인사, 직지사, 동화사, 송림사, 유가사, 호국사 등에서 자비도량참법산림 화엄산림, 정토산림등을 회주로 주재하시다.

1944년

76세에 대중의 권청으로 해인사 주지에 재임하시다.
재임기간중 전임자의 부체를 모두(8천원) 상환하였고, 은행부체도(2천3백원) 해결하였고, 거창에 유실되려던 땅도 찾아서 해인사 소유로 하였고, 그외 명월당, 국일암, 극락전, 보수 및 대적광전 앞 석축과, 관음전 현당의 축대도 수축하였다.

1957년

89세 8월 19일 해인사 국일암에서 입적하시니 세수 89세요 법랍 73세시다.

     

경하 종사께서는 당대 제일가는 律師요, 布敎師요, 法師요, 禪師  이니 理事에 능통하였고 三藏을 廻容하였으니 宗匠으로서 당대 우뚝하였다.   경하종사께서는 臨終을 앞두고  峰스님께 傳法하시고 임종게를  남기시었다.


景霞大和尙 임종게

      
人世百年內   사람이 세상에서 백년을 살아도
      別離無送迎   죽을 때는 보내거나 마지하는 이 없네,
      畢竟了此生   필경에는 모두 이생을 마치고
      孤輪獨照明   외로운 달처럼 홀로 비칠뿐이네.


2016.06.04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