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해인사 원당암 마애부도

임병기(선과) 2016. 6. 22.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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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암(2011년 6월 촬영)

 

원당암願堂庵

고대에 속하는 유물은 대부분 원당암이라 불러지는 산내(山內) 속암(屬庵)에 있다. 물론 청량사라고 불려지는 가까운 거리의 사찰에도 중요한 석조유물이 상당 수 전해지고 있지만 이보다는 원당암이 해인사와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 절의 본래 이름이 봉시사(鳳棲寺)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 제 51대 진성 여왕 대에 와서부터 각간(角干)위홍(魏弘)의 원당(願堂)으로 되었기 때문에 원당암이라고 하는 별칭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진성 여왕과 각별한 관계에 있던 각간 위홍이 진성 여왕 즉위2년(888)에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혜성대왕 원 당으로 삼았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진성 여왕은 즉위 11년이 되는 897년 6월에 왕위마저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북궁(北宮)해인사에 머물다가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웃한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또한 진성 여왕은 즉위 전에는 이미 북궁공주(北宮公主)다고 불려졌고, 또한 이때의 북궁은 신라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해인사를 가리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원당암에 있는 중요 유물들은 대체로 진성 여왕대에 와서 위홍을 위한 원당으로 지목되면서부터 이곳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제작은 888년에서부터 897년에 이르는 약 10년 사이의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현존하는 중요 석조 유물로는 보물 제 516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그리고 배례석을 비롯하여 보광전의 축대 등을 지목 할 수 있다...원당암 홈페이지

 

 

작은 다리를 건너면 길옆이었던 마애부도

큰 다리가 가설되어 이제는 내려다 보아야 한다.

 

게으른 중생

원당암 부처님께 배례도 드리지 않고  다리 아래로 내려 갔다.

 

신심이 돈독하지 못한 중생에게

석종형 선각 마애부도가 보이겠는가?

 

 

인파당사리탑堂 舍利塔

 

가난한 절집 사정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 것도 남기지 말라는 선사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바위에 당호만 새겨 두었다.

 

그 비사가 월간해인에 실려 있으니...

 

 

인파당사리탑은

1846년 스님 입적후 150여년 지난후 원당암에 주석하시던 혜암대종사께서 글자를 새겨 뜻을 기리었다.

 

2008년 월간해인 10월호 월간 해인에 실린 기사를 가져왔다.

"인파당 스님은 조선 개화기 시대 스님으로 백련암에 주석하시다 지난 1846년, 열반에 드신 큰스님이다.

평소 도덕이 고매하고 학문과 시에 능통하시어 생존시, 많은 스님들로부터 백낙천의 후신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분으로

공부 또한 깊어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해인사에서 나신 도인 중 한분이라 존경받고 있다.

 

스님이 입적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 다비식을 치뤘다. 살아계시면서도 이미 깨달음이 깊은 도인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주신 터라 제자 스님들은 다비식 후에 보여질 인파스님의 사리에 대해 만만치 않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다비한 자리를 아무리 뒤져도 사리는 한 과도 나오질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큰스님들에 대한 평가가 입적 후 남기신 사리의 수와 빛을 발하는 정도 등 눈에 보여지는 것들로 인해 다시 한번 재론되는 바,스님을 모셨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여간 당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도인 스님의 다비식이었고 잔뜩 기대를 갖고 치러낸 다비식이건만 사리 하나 나오질 않았으니 제자들의 허탈감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제자들이 모여 그간의 스님 행장을 놓고 갑론을박 서로의 잣대를 들이대며 돌아가신 큰스님에 대한 평가를 놓고 시비분별심에 빠져 있을 즈음, 다비식이 있었던 마당에 오색 빛 한줄기가 나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놀란 제자들이 그 빛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바로 지금의 자리인 원당암 근처 큰 바위 위였다.그 상황이 하도 괴이하여 바위를 올라가보니 그곳에 인파스님의 사리가 놓여 있었다.비로소  제자들은 사리가 있네 없네 하며 일시적이나마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 빠져 마음을 혼란시켰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돌아가시면서까지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시고자 다시 사리로 모습을 나타내시어 분별심을 없게 해주신 스승의 제자 사랑과 생존시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다시 조용한 자연으로 돌아가 흔적없이 바람처럼 묻히고자 했던 도인 스님의 깊은 뜻을 기리고자 제자들은 그 자리 그대로인 큰 바위 위에 구멍을 파고 스승의 사리를 모셨다.

 

그리고 150년이 지난 10여년 전, 인파 도인의 자연과 더불어 하나는 삶에 대한 큰 가르침이 흐른 세월만큼 희미해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혜암대종사가 비로서 스님의 이름 한 자를 새겨 다시 흔적을 남기시니 공부가 모자란 후대는 다시 한번 인파당 스님의 큰 뜻을 새기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대로인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인파대사의 마음에 반하는 빚을 지었으니 스승을 팔아 공부인으로 거듭나겠다는 제자들의 아름다운 욕심인 바, 후대가 어렵게 빚을 진 그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가?

이 부근인데...

 

사진...달넘새님

 

이끼와 담쟁이에 숨어버린 부도

사리공이 보이지 않는다.

 

 

이끼 제거는

오히려

선사의 뜻에 반하는 것일까?

 

201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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