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원주시

원주...입석사 삼층석탑.다층청석탑부재.흥양리마애여래좌상

임병기(선과) 2016. 10. 1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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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을 뒤져보니 2006년 3월에 현재 영양으로 귀촌한 종화님과 들렸어니 강산이 한 바퀴 돈 후 다시 찾았다.

오류가 보이는 글도 수정않고 옮겨 둔다.

지난 발자취 이기에...

 

 

입석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답사꾼들도 다층청석탑, 마애여래좌상만 둘러보고, 이 석탑은 놓치기 쉽다.

신,구부재의 조합의 탑으로, 개인적으로는 옛부재를 활용하여 복원한 절집 스님들을 존경한다.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건 스쳐간 님들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하층기단 갑석 1매, 면석 1매, 상층기단 갑석 1매, 초층 탑신석이 본래 부재이다.

소형 석탑으로 고려 중기 이후(13세기 말)에 조성된 석탑부재로 추측된다.

 

달넘새님이 상층기단 갑석의 절수구와 부연, 깊은 부연을 강조했던 탑으로 확인 해보길 바란다.

 

 

 

 

마애불 가는 길

 

 

청석탑재와 여러 부재들을 올려 놓았다.

불대좌와 청석탑 부재는 동일 석탑재가 아니다.

청석탑 부재는 하기단 갑석, 옥개석 2개가 유존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유존하는 다층청석탑과 부재는 해인사 원당암을 시작으로 모두 16기가 있다.

(옛님 카페 우리나라의 석탑 공지 글 참조 요)

 

1.합천 해인사 원당암 석탑

2.김제 금산사 석탑

3.원주 보문사 석탑

4.원주 입석사 석탑재

5.충주 창룡사 석탑

6.아산 세심사 석탑

7.의성 대곡사 석탑

8.대구 동화사 염불암 석탑

9.고령 반룡사 석탑(고령 박물관)

10.창녕 법화탑 석탑

11.진주 두방사 석탑

12.보은 법주사 여적암 석탑

13.영월 요선정 석탑

14.문경 미면사지 석탑재(새재 옛길 박물관)

15.제주 수정사지 석탑 부재

16.금강산 보덕암 석탑

 

그 조성 배경은 분명하지 않으나 왕실과 관련성, 즉 원당사찰이라는 설이 있다.

 

 

마애여래좌상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님이시다.

 

-보살상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법상종, 미륵불

-중간 계주의 표현

-방형 대좌.

-궁예 불상

-버선코

 

 

 

 

 

 

201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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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석사 초입에서 국립공원 직원이 길을 막지만 종화님이 소지한 '문화재 위원' 증명으로 무사 통과는 물론 흥양리 마애불, 3층탑 위치를 소상히 설명해준다. 치악산 주요 등산로의 하나인 입석사는 선바위로 인해 붙여진 가람이며 우리나라 많은 지역에 분포한 立石은 다양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입석대에는 혼자만의 수복강령 부귀다남을 소원한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아래에는 근래에 조성한 절집 전각과 요사가 보인다.

 

치악산 입석사 입석대


입석대 앞에 위치한  탑은 "조선 태종(1400~1418)이 즉위한 후 어린 시절에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 운곡 원천석을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며 나타나지 않으므로 태종이 그를 생각하며 세운 탑이라고 전한다."

 

두툼한 방형의 연화대좌는 석탑 기단이 아니라 석불 대좌로 보인다. 탑도 화강암, 점판암 두 기의 탑 부재로 복원한 듯하며  청석재질의 옥개석으로 미루어  청석탑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무리 등산로에 위치한 불완전한 탑이라도 등산객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아쉽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돌을 올려 놓고 싶을까? 제자리에 있어야만 의연하고 아름다운 것인데...

 

입석대 삼층탑

 

운곡 원천석

 

"고려말 조선초의 은사(隱士)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字)는 자정(子正), 호(號)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의 손자이고, 종부사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의 아들로, 원주 원씨(元氏)의 중시조(中始祖)이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일찍이 이방원을 가르친 일이 있어 그가 태종(太宗)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직접 집으로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 피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같이 높은 지조와 절개를 보였다.

 

고려말에 정몽주, 이색 등 많은 유학자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사적이 소각 당하는 화(禍)를 당하자 정몽주는 신현의 사적을 수거하여 치악산에 은거하는 원천석에게 보냈고, 이에 후세에게 전할 중요한 임무를 갖고 화해사전(華海師傳)을 저술하였다. 문학적으로 깊은 소양을 가졌던 원천석은 그가 남긴 운곡시사(耘谷詩史) 속에서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운곡 원천석 묘비및봉분/문화재청

 

 

회고가(懷古歌) 

 

흥망(興亡)이 유수(有數)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 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 객(客)이 눈물 계워라.

 

 미수 허목(許穆)은 선생의 묘갈(墓碣)에서,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원천석의 정신은 원주의 사상적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역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출처 다음


입석사 흥양리 마애불


곱슬머리, 통통한 얼굴, 좌우대칭인 통견의 법의, 수인은 오른손은 가슴, 왼손은 복부에 두었다.결가부좌한 오른발이 위에 올라온 항마좌이다. 마애불상은 두광, 신광, 결가부좌, 연화대좌가 보이고, 불두는 양각이나 목아래 부분은 굵지 않은 터치로 선각으로 나타냈으며, 삼도도 뚜렷하지 않지만  안내문에 의하면 고려조 1090년에 조성되었다는 글이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눈발이 흩날려 걱정이 앞선다. 혹 강원도 옛님을 찾는 여정에 애로가 발생할지 않을지......

 

200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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