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정조대왕 태실

임병기(선과) 2016. 7. 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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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태실.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한다.


분명 정조대왕 태실을 찾아 왔는데 안내문에는 정종대왕태실로 기록하였다. 더구나 안내문 내용에는 정종과 정조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어 혼란스럽다.전공자나 학자가 아닌 사람은 당연히 조선 2대 임금 定宗정종을 떠올리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여러자료에도 통일이 되지 않고 제각각으로 표기되어 당혹스럽다.


정양리의 태실은 분명 정조대왕태실비이다.

왜 정종正宗이 정조正祖로 묘호가 바뀌어 추존되었을까?

본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고 묘호는정종(正宗)이었으나, 1899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의 4대조를 추존할 때 고종의 증조부가 된다는 이유로 정조로 변경되었으며, 동시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어 바뀐 이후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정조대왕실록이 아니라 정종대왕실록이다.


 

참고로 왕조실록의 묘호에 관한 글을 가져왔다(굵게 마킹한 부분)

正祖 54卷, 24年(1800 庚申 / 가경(嘉慶) 5年) 7月 6日(丙戌) 1번째기사

(原文)

○丙戌/議政府館閣諸臣,【領議政沈煥之、左議政李時秀、右議政徐龍輔、大提學洪良浩、行吏曹判書藝文提學知春秋李秉鼎、行兵曹判書弘文提學金載瓚、戶曹判書李在學、禮曹判書李晩秀、刑曹判書韓用龜、工曹判書兼知春秋李得臣、行大司憲徐邁修、行副提學金祖淳、吏曹參判李益運、戶曹參判徐瀅修、禮曹參判閔台爀、兵曹參判曺允大、刑曹參判金履翼、工曹參判姜彝正、同春秋鄭尙愚ㆍ李魯春、大司諫兪漢寧。】議上諡號曰文成武烈聖仁莊孝。【經天緯地曰文, 禮樂明具曰成, 保大定功曰武, 秉德遵業曰烈, 窮理盡性曰聖, 施仁服義曰仁, 履正志和曰莊, 繼志成事曰孝。】廟號曰正宗、【以正服之曰正。 敬依。】純宗【中正純粹。】宣宗,【聖善周聞。】殿號曰孝寧、孝元、孝定,【初以孝寧敬依後用孝元。】陵號曰健陵、【敬依】睿陵、文陵。

【태백산사고본】 54책 54권 67장 A면

【영인본】 47책 288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국역)

의정부와 관각(館閣) 제신이【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대제학 홍양호(洪良浩), 행 이조 판서 예문제학 지춘추 이병정(李秉鼎), 행 병조 판서 홍문 제학 김재찬(金載瓚), 호조 판서 이재학(李在學),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 형조 판서 한용귀(韓用龜), 공조 판서 겸 지춘추 이득신(李得臣), 행 대사헌 서매수(徐邁修), 행 부제학 김조순(金祖淳), 이조 참판 이익운(李益運), 호조 참판 서형수(徐鎣修), 예조 참판 민태혁(閔台爀), 병조 참판 조윤대(曺允大), 형조 참판 김이익(金履翼), 공조 참판 강이정(姜彝正), 동춘추 정상우(鄭尙愚)·이노춘(李魯春), 대사간 유한녕(兪漢寧) 등이다.】


의논하여 올린 시호는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경천 위지(經天緯地)를 문(文)이라 하고, 예악 명구(禮樂明具)를 성(成)이라 하고 보대 정공(保大定功)을 무(武)라 하고, 병덕 준업(秉德遵業)을 열(烈)이라 하고, 궁리 진성(窮理盡性)을 성(聖)이라 하고, 시인 복의(施仁服義)를 인(仁)이라 하고, 이정 지화(履正志和)를 장(莊)이라 하고, 계지 성사(繼志成事)를 효(孝)라 한다.】하고, 묘호(廟號)는 정종(正宗)【이정복지(以正服之)를 정(正)이라 한다. 삼가 그대로 따랐다.】·


순종(純宗)【중정순수(中正純粹)를 순(純)이라 한다.】·선종(宣宗)이라【성선주문(聖善周聞)을 선(宣)이라 한다.】하고, 전호(殿號)는 효령(孝寧)·효원(孝元)·효정(孝定)이라【처음에는 효령을 따랐다가 나중에 효원을 썼다.】하고, 능호(陵號)는 건릉(健陵)【삼가 그대로 따랐다.】·예릉(睿陵)·문릉(文陵)이라 하였다.


 

태실.태비.아기씨태비(?)

이 글을 준비하면서 문화재청 홈의 설명문에 실린  태실 1기를 뵙지 못한 헛답사였다고 가슴을 쳤다.


"태실은 현재 2기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받침돌 위에 둥근 몸돌을 올리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며 그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다른 하나는 원통형 돌함(石函) 위에 반원형의 뚜껑돌을 얹은 모습이다."


하지만, 1기는 태실 어디에도 없다.

문화재청의 사진에 보이는 태실 1기는 영월 태실이 아니라 서울에 옮겨 간 곳의 사진 같다. 따라서 1기는 아기씨 태함으로  옮겨오지 않았거나 결실 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실(胎室)은 조선 제22대왕인 정조(正祖)의 태(胎)를 안치했던 태실(胎室)로서 정조(正祖)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英祖) 29년(1753)에 영월읍 정양리(正陽里) 계족산(鷄足山 ; 胎峰)에 처음 조성(造成)되었고 정조(正祖)가 사망하자 순조(純祖) 원년(元年)(1800)에 가봉(加封)을 하고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1929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전국의 태실(胎室)을 창경원안으로 옮길 때 태(胎)항아리를 꺼내 갔으며, 태실(胎室)과 태실비(胎室碑)는 광산의 개발(開發)로 매몰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1967년 영월읍 K B S 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復元)하였다.


*순조 원년은 1800년?, 1801년?

자료마다 제각각이니 우짜자는 이야기인가?


 

지대석 위에 둥근 중동석을 올리고 8각형의 개첨석을 얹은 모습이며 난간을 둘렀다


 

화려한 문양이 조식된 난간석 안쪽 팔각 기단석에는 안상을 조식하였다.

편구형 중동석 중앙에는 8송이 화문을 표현하였고, 상하부에 고리를 연결한 문양을 새겼다.


 

8각 개첨석 마루를 높게 마련하였으며, 2단의 복련과 연주문 괴임위 보주를 한 부재로 조성하였다.


 

 

정종대왕태실비


정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正祖胎室石欄干造排儀軌)에 의하면 "정조의 태를 안치했던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 29년인 1753에 안태사 서명구에 의해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태봉에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국왕이 된 뒤 석물을 추가하는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민폐를 우려하여 후일로 미루었다. 그 뒤 정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 원년인 1800년에 가봉을 하고 태실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부

귀부는 귀갑문과 하엽문을 조식하였다.


 

이수와 비신

이수는 쌍룡을 양측면에 배치하고 사이에는 운문을 채웠다.

비신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비신 후면

가경 육년십월이십칠일 건(嘉慶 六年十月二十七日 建).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손아기씨태실비

전면에는 건륭17년乾隆十七年九月二十二日丑時生元孫阿只氏胎室’, 후면 건륭18년‘乾隆十八年正月二十一日’명문이 음각되었다.고 하지만 육안으로 구분 되지 않는다.


건륭 17년(1752년)9월 22일은 정조의 출생일.후면 건륭18년(1753년)정월21일은 비를 세운 날짜로 보인다.


   

 

기왕이면

하마비도 세우고, 금표석도 조성하였으면 좋았을텐데.

20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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