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관풍헌.자규루

임병기(선과) 2016. 7. 2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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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두번 째 영월 답사길에 관풍헌과 자규루에 관한 글이 남아 있다.

오류도 보이지만 그대로 옮겨온다,

그즈음에는 사진은 전혀 찍지 않았었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가 누웠는가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어니 그를 슬프하노라

소나기 재를 넘어며 예의 황진이 무덤가에서 읊었다는 조선제일의 풍류가 임백호의 시조가 떠오른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병들게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도 몰래 임제의 시조를 습관처럼 흥얼거린지가 꽤 오래 되었어니...

이게 아니지 17세에 삼촌으로부터 약사발을 받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단종에게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가 어울릴 텐데... 서강이 말없이 흘러가는 소나기재 정상 선돌을 내려보며 10수년 전에  다녀온 저 아래 청령포를 되새기며 기억을 더듬는다

천만리 머나 먼길 고운 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대 없어 냇가에 앉았어니
저물도 내맘 같아 울어 밤길 예놋타(?)

이번 답사길 왕능이 보고 접어 정확히 단종의 장능과 세종의 영능을 비교해 보고픈 맘이었기에 가야고분군이 위치 함직한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잡은 솔내음 풍기는 산길을 오른다. 목숨을 걸고 밤길 시신을 수습한 무장 영월 엄씨의 시조 엄흥도가 암장하고 후에 영월 사또 박충원이 단장하였다는 장능은 아쉽지만 왕능의 일반적 유형에서 크게 벗어 나지는 않았다

규모가 적고 곡장이 얕고, 세조에 대한 한 때문인지 무인석이 생략 되었지만 능 지킴이 사자상, 정의를 의미하는 양, 혼이 놀고 가는 혼유석 장명등이 갖추어져 있다. 다른 능과 달리 엄흥도, 박충원, 문종에게 단종을 보필하겠다고 맹세한 탓에 끝내 죽음을 당한 사육신, 생육신, 단종복위에 연루된 금성군을 비롯한 많은 인물의 제각이 있고 홍살문 정자각이 일직선 상에 있지 않다. 어찌된 연유인지 신도(神道)는 보이지 않고 정자각 마루에는 용두만 외롭게 앉아 있다.

운 좋게 재를 오리는 제례복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을 만나 흔치 않는 볼거리를 보는 구나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건만 대학생 들이 역사의 현장을 찿아 퀴즈 풀이를 하는 KBS TV 촬영 중이란다.
제기럴 내 복에 무슨....

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한 장능의 원당 사찰인 보덕사는 들리지 않고 예전에 들리지 못했던 그 시절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세파에 몸을 내놓고 있는 관풍헌과, 영원히 자규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자규루를 돌아보고 관풍헌 앞에서 무엇에 홀린 듯한 착각에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건축의 정형이야 있어랴 마는 관풍헌은 3동의 건물이 나란히 일직선상에 있고 놀랍게도 가운데 동은 약사여래불이 모셔진 약사전이다.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활용중이라지만 왕능의 원당사찰에는 극락전 아미타불을 모셔야 옳지 않은가?

또 소설 한편.....
우리 민속 특히 무속에서는 신을 모신다. 당 신앙에도 그러하지만 세상에서 한을 품고 죽은 사람들이 약발이 잘 받기에, 기자 신앙의 효험은 최영장군의 혼이 최고이고, 임경업 장군 등이 무속에서는 추앙(?) 받는 귀신 들 이기에 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 단종을 신각에 모신 곳도 많다는 것과 연결 해보면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약사여래불이 모셔진 것도 크게 궤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군. "

소설 한편 탈고 ㅋㅋㅋ...

여주의 세종대왕의 영능은 천하의 길지이고 영능 탓에 조선조가 200년은 더 존속 되었다는 속설도 있지만 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 이씨의 묘자리 였다. 오늘날 이수성 전 총리의 관향이지 아마... .
기생과 묘 자리는 먼저 차지 한 놈이 임자 건만.....?????

규모면에서 장능과 비교 할 수 없지만 홍살문에서 능까지 일직선 상에 있고 신도(神道)가  홍살문 부터 정자각 까지 놓여 있다 신도란 신이 다니는 길인데도 참배객 들은 아무른 의식도 없이 신도를 걸어 가고 있다. 왕도 다닐 수 없는 참도이거늘...
능 참배 시에는 가운데 높은 길을 걷지 말고 우측의 낮은 길로 참배하여 나올 때는 좌측 낮은 길로 나오는 것이 예의인 줄 누구하나 설명해 주지 않아 안타깝다.

일반 민가에서는 무덤 앞에 상석이 있어 제물을 놓지만 왕능 앞의 상석을 혼이 머무는 “혼유석”이라 하며 제물은 정자각(丁字閣)에 놓고 예를 받들지만 온통 마루에는 잡상으로 도배질 되어 있고 건물에 대한 설명 즉 丁자 모양의 건물이라 정자각이라 한다는 안내문이 나를 열 받게 한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 아닌가?
아픈 역사라도 한 맺힌 과거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들에게 올바른 전달이 되면 좋을텐데...

정자각???
중국놈들 자기들 왕은 황제이기에 조선의 임금은 왕이라 강요했고 능 앞의 전각도 지놈 들은 태양이라 여겨 日字閣이라 하면서 속국인 조선이 어디 감히 황제를 흉내 내야며 중국황실에서 丁자 좌향에 위치한다고 정자각을 지어라 하지 않았든가!!!
대한제국 고종은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났기에 황제라 하고 능 앞에도 정자각은 사라지고 일자각을 회복했지... 외세의 영향이든 말든!!!!

성군이라 불리워 지는 세종도 살아 생전에 맘 고생 무지무지 많았든 왕이 아니었든가
재위 32(?)년 동안 10년 이상 상복을 입어야 했고 외삼촌, 장인이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태종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것을 보아야 했고 평생을 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과도한 영양 섭취, 운동부족, 문란한 성생활로 단명한 다른 왕에 비하면 54세에 승하 하셨어니 장수한 왕이지만 이생에서 한도 많았겠지.

그래서인지 신륵사는 명복을 비는 원당 사찰의 면모를 갖추어 극락전이 주전이다.
당연히 명부전이 있고....

짧은 기간이지만 세종, 단종, 상원사의 세조의 자취까지 더듬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하룻밤 이틀 낮의 여정 이었다.

나의 기억에 의존한 답사기여서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2.7월말

 

 

관풍헌觀風軒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1392년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보덕사 포교당으로 활용되어 중앙에 약사전. 좌측에 객사였던 관풍헌, 우측 부속건물 이 남아 있다.

세조 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먹고 1457년 10월 24일 사사된 곳이라 전한다.

 

 

 

넓은 아량일까?

사찰 전각이 중앙에 배치되어 관아건물을 부속채로 두고 있다.

 

 

 

약사전에 걸린 벽화. 그림은 운보 김기창화백 작품 같다.

예전 보덕사 답사기에 올렸던 글을 가져 왔다.

 

그림은 단종과 추익한의 이야기로 묘사한 내용으로 추익한과 더불어 단종의 시신을 우습한 엄흥도, 정사종의 글을 다음에서 검색했다.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외로운 나날을 보낼 때, 산머루를 따다 드리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한다.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관풍헌에서 사약을 내리던 그날도 추익한은 산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임금에게 바치려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단종을 만났다. 추익한이 단종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탄 단종은 태백산으로 간다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추익한이 급히 단종의 처소로 와보니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단종과 만났던 계사폭포에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고, 그리하여 추충신은 단종임금과 함께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자규루子規樓.
영월군수 신숙근이 세종 10년(1428)에 창건하여 매죽루라고 하였으나, 후에 단종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자규사’ 및 ‘자규시’로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름이 자규루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후 선조 38년(1605)의 대홍수로 폐허가 되었는데, 강원도관찰사 윤사국(1728-1809)이 정조 15년(1791)에 영월을 순찰할 때 옛 터를 찾아 중건하고 단종의 시를 봉안하였다.

 

 

            단종...자규시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血淚春谷落花紅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何奈愁人耳獨聽

 

 

20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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