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추적추적 비 내리는 폐사지 스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비에 젖어 오작동 된 폰카가 정상작동 되기까지의 짧은 틈동안 텅 빈 머리로 텅 빈 절터를 풀린 동공으로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서봉사지 서봉사의 창건과 창건자, 페사시기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에 사지에 남아 있는 탑비의 주인공인 국사 현오玄梧가 주석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태종실록 7년(1407년) 12월 2일조에 따르면 용구(龍駒.용인) 서봉사를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사지는 광교산 자락 구릉지 경사면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6단의 석축 계단을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한 산지가람이다. 절터의 전체 남북 길이는 130m, 동서 폭은 90m이다. 현재 절터 대부분은 폐허 상태로 탑재와 부도 및 석등의 부재들이 널려 있고, 현오국사비각과 탑지 부분만 부분 정비된 상태이며 현재도 발굴 진행중이었다.
서봉사현오국사탑비와 비각. 탑비는 1185년(명종 15)에 세웠고, 비각은 1979년에 건립하였다
현오국사종린 탑비玄悟國師 宗璘塔碑(인종 5, 1127~명종 9, 1179) 증시현오대사비명贈諡玄悟國師碑銘이라는 제액을 2열로 전서하였고, 비문은 이지명(李知命)이 짓고 유공권(柳公權)이 해서로 써서 민구(敏求)가 새겨 1185년(명종 15)에 세웠다.
비문 번역본에는 현오국사의 속성은 왕王씨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석사, 귀신사,중흥사,국태사? 주지를 역임한 기록이 보인다. 또한 '부도'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용어라면서 현재는 승탑으로 공식칭이 변경된 부도라는 단어도 비문에 등장하고 있다.
장방형 비좌, 비신은 점판암이다. 비신의 둘레에 당초문을 둘렀고 이수가 없이 청하 보경사 원진국사비,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비 처럼 모서리를 모죽임한 귀접이 형태의 비석이다.
贈諡玄悟國師碑銘(題額)
증시현오국사비명(贈諡玄悟國師碑銘) [제액(題額)] 오직 우리 국사 스님께서 이와 같은 비당(粃糖)과 추환(芻豢)을 불쌍히 여겨 부귀와 벼슬을 콧물과 침처럼 천시(賤視)하여 마치 헌신을 버리듯 영원히 돌아보지 아니하고,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을 좋아하며, 선행(善行)을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었다. 선천적(先天的)으로 타고난 품성(稟性)으로써 위(謂) (결락) 물 위에 뜬 거품과 같아서 환신(幻身)이 실로 제불(諸佛)의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진성(眞性) 중에서 설법(說法)하시어 화엄(華嚴)의 색(色)과 공(空)이 민멸(泯滅)함과 이(理)와 사(事)를 함께 밝혔다. 거울을 갈아 광명(光明)이 드러남에 있어 그 광명이 거울 속으로부터 나오며, 모형(模型)을 태우고 불상(佛像)이 나타나는데, 그 불상이 모형 밖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다. (결락) 일(一) (결락) 진실로 정각(正覺)을 구함에는 동교(同敎)의 교리만한 것이 없다. 이에 귀의하는 마음으로 복응(服膺)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희유(希有)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스님의 휘는 종린(宗璘)이요, 자는 중지(重之)며 속성은 왕씨(王氏)이다. 대방광(帶方公) (결락) 주(主) (결락) 불(不) (결락) 기우(器宇)가 굉심(宏深)하여 다른 아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항상 부도(浮圖)와 불상을 볼 때마다 문득 불면(佛面)을 쳐다보고 공손히 예경(禮敬)하였으며, 심지어 음식에 조금이라도 누린내와 비린 냄새가 풍기면 두드러기가 온 몸에 나타났다. (결락) 진망(塵網)에 얽매인 바가 되지 않았음을 (결락) 여기에서 가히 엿볼 수 있겠다. 나이 겨우 13살 때, 교(敎) (결락) 원(院)에서 간청하여 득도(得度)하고 법문(法門)이 되었다. 인묘(仁廟)께서 일찍부터 대각(大覺)의 여풍(餘風)을 계승 발전시킬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기꺼이 원명(圓明)국사(國師)에게 명하여 (결락) 시시(示時). 인자일(因自日) (결락) 희문자(喜文字). 15살 때, 불일사(佛日寺)에 나아가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으니, 신유년(辛酉年) 12월이었다.
6월 29일 병이 매우 심하여지므로 스님은 손으로 일몰처(日沒處)를 가리키면서 숙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수족(手足)의 굴신(屈伸)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결락) 개경(開京) 동남쪽 귀법사(歸法寺)에 유해(遺骸)를 임시 안장(安葬)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장사와 49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7월 16일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충질(任忠質)과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 최광유(崔光裕)와 내시(內侍)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 (결락) 등을 보내어 (결락) 국사로 책봉하되, 시호를 현오(玄悟)라고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이 달 17일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毗)하고, 이 해 11월에 장단현(長湍縣) 대탁산(大倬山)에 안조(安厝)하였다. 장사하는 날에 하늘로 뻗은 오색(五色) 기운이 무지개와 같아서 영구차를 따라 갔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비상함을 경탄(驚歎)하였다. 자(自) (결락) 골(骨). 개(皆) (결락) 춘추는 53세이요, 법랍은 39였다.
그러므로 스님께서는 질병에 대하여 사(死)와 생(生)을 보되, 동일체(同一體)로 여겨 기도하지도 아니하고, 치료하지도 아니하여 (결락) 조용히 입적 (결락) 하였으니, 곧 스님의 마음가짐이 일반인들의 마음가짐보다 특이함을 알 수 있다. 문인(門人)들이 행장(行狀)을 갖추어 임금께 건의하기를, "우리 스님의 유골(遺骨)이 이미 음택(陰宅)에 나아갔으니, 하조(下詔)하시어 행적비를 세울 수 있도록 감히 성청(誠請)하옵니다" 라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臣) 지명(知命)에게 명하여 비명(碑銘)을 지으라 하였으나, 신(臣)은 별다른 재주가 없고, 대강 문자를 조금 알 뿐이어서 굳이 (결락) 사양하였으나, 마지 못하여 문인(門人)이 기록한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억지로 서술하고 명(銘)하여 이르되,시방세계(十方世界) 화장찰해(華藏刹海) 어느 곳이든 진진찰찰(塵塵刹刹) 미진국토(微塵國土) 두루 다하여 자재하게 유희하신 스님의 경지(境地)넓고 넓은 바다 속의 비늘과 같네! 1.열반세계 가고옴이 둘이 아니고 터득하신 진여세계(眞如世界) 무하유(無何有)일새.이름없고 모양없는 공(空)같은 마음 두두물물(頭頭物物) 삼라만상 몸아님 없네! 2.휘황찬란 그 광명(光明)은 수월(水月)과 같고 아름다운그 향기는 춘화(春花)와 같네.괴겁(壞劫) 때가 이르러서 겁풍(劫風)이 부니 3.무명(無名)구름 사라진 후 맑은 하늘에 마음달이 온 세계(世界)를 비추는구나! 스님께선 삼한국(三韓國)을 보호하시어전쟁바람 사라지고 태평(太平)이 되다. 4.어찌하여 딴곳으로 가시렵니까? 자비구름 널리 덮어 감로(甘露)를 뿌려 행원(行願)따라 교화(敎化)함이 신(神)과 같을새.빙(氷)설(雪)에다 글 새기듯 힘을 다하다. 5.위대하신 스님 행적(行跡) 간략히 적어 천만년(千萬年)이 지나도록 길이 전하여 지날수록 더욱 더욱 새로워지다. 6.대정(大定) 25년 을사(乙巳) 2월 일에 문인(門人) 등이 왕명을 받들어 서봉사에 비를 세우고 흥왕사(興王寺) 대사(大師) 민구(敏求)는 글자를 새기다
부도는 부도는 어디에 계실까?
2016,06.24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디지털용인문화대전,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참조,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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