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홍제암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6. 6. 2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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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답사의 주목적은 가야산 중턱에 자리한 거덕사지와 사지에 도괴된 상태로 남아 있는 석탑부재 탐방이었다.

하지만 고르지 못한 일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그간 스쳐 지났던 암자의 부도 순례로 방향을 변경하였다.


 

홍제암弘濟庵

해인사 서편으로 일주문에서 원당암 방향으로 진입하면 만날 수 있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암자이다

임란후 홍제암에 은거하던 사명대사는 광해군 2년 속세 나이 예순일곱으로 입적하였는데, 광해군은 자통홍제존자慈統弘濟尊者라는 호를 내리고 스님의 비를 세웠다.


그 뒤로부터 스님의 호를 따라 홍제암이라 하였다.


 

홍제암 부도전


 

계파당성능탑 桂坡堂性能塔

지리산 화엄사의 승렬로 숙종 때 8도 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쌓고,영조 21년(1745년) 북한지를 판각하였으며 1750년 통도사 금강계단을 증축한 스님으로 전한다.


생몰년대는 확인되지 않지만 활동시기를 고려하면 18세기 후기에 조성된 부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송파당각민탑 松坡堂覺敏塔

충주 출생(1596~?으로 송파는 호이며 속성은 노씨이다.

치악산 각림사 한계대사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여 소요대사 문하에서 안거하였으며, 금강산,소백산 등에서 머물렀다.


출생 년도를 고려할 때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부도이다.

 

 

환적당지경탑 幻寂堂智鏡塔

의천 또는 지경스님(1603~1690)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분이다.

속성 문. 본관 선산. 자 지경(智鏡). 호 환적(幻寂). 두(斗)의 아들. 11세에 속리산 복천사의 탁린 문하에 들어가, 1618년 구족계를 받았다. 팔공산(八公山) 동화사에서 유현에게 경론을 배우고, 1623년(인조 1) 청량산에 들어가 일체의 곡기를 끊고 솔잎 등을 생식하면서 31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였다. 29세 때 금강산으로 가서 편양으로부터 화두를 받고 정진하면서, 여러 사찰의 고승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644년 편양이 죽자 정양사에 편양의 탑과 비를 세우고, 1656년(효종 7)부터 여러 사찰을 다니며 후학을 가르쳤다. 1687년(숙종 13) 해인사 백련암에 찬운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좌선하였다. 의성 대곡사·문경 봉암사,춘천 청평사,충주 덕주사,대구 용연사,태백산 각화사,거창 연수사,합천 해인사 홍제암,칠곡 대흥사에 사리를 각 1매씩 봉안하였다 그의 법맥은 휴정(休靜) → 편양 으로 이어져왔으며, 그의 법은 조영照影 ·신경伸敬 ·상희尙熙 등으로 이어졌다


즉 17세기 말의 부도이다.

 

 

예봉당평신탑 禮峯堂平信塔

평신(1869~1896).

속성은 이씨 호는 예봉 지례군(경상북도 김천)출생

상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이다.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지선의 제자가 되었다. 언제나 고행정진하였으며 교학공부와 함께 실천에 힘썼다. 절대중을 위하여 살림살이에 부지런하고 스승으로부터 받은토지와 재물을 절에 헌납하였다.

1855년(철종 6) 서울 경국사慶國寺 법당을 중수하였다.  1896년12월 문도들을 불러 놓고 내가 갈 때가 왔다 하고 사흘 뒤 입적하였다. 해인사 홍제암에 부도를 세웠다.(전남 구례 출신이라는 자료도 있다)


즉 19세기 말 부도이다.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海印寺四溟大師石藏碑.1612년,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것으로, 귀부, 비신, 이수가 갖추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3.15m이다. 2면비이며, 앞면 윗부분에 전서체로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라 새겨져 있고, 끝에 ‘만력 40년 12월립()’이라 기록된 점으로 보아 1612년(광해군 4) 12월에 건립된 사명대사의 승탑에 딸린 탑비임을 알 수 있다. 허균이 지은 것이라 전해지는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1610년 8월 26일 해인사에서 입적했고, 11월 20일 문도들이 화장하면서 정주 1구를 얻었는데, 석종을 만들어 그 안에 간직하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비신은 이제강점기인 1943년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가 민족의 혼을 불러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파손한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는데, 복원할 때의 접합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귀부

 이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1947년,


사명대사 부도비가  2기인 있는 연유를 알아보자

(해인사 홈페이지.자유게시판. 박환태.2005년 3월 4일)


홍제암 입구에는 사명당의 부도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지은 구비舊碑와 광복후 卞榮晩(변영로詩人의 형)이 지은 신비新碑가 나란히 서 있다. 사명당의 비가 新舊 두개가 서게 된 사유는 이러하다.


日帝말기인 1943년 합천경찰서장으로 다께우라(竹浦)라는 악질 왜경이 부임했다. 죽포는 부임하자마자 해인사 법보학원을 어린 학생들에게 불온사상을 가르친다고 폐쇄해 버리고 원장 李古鏡스님, 주지 林幻鏡스님 등 해인사 간부 20여명을 붙잡아 혹독한 고문을 가해 고경스님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환경스님 등은 7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하였다.


죽포의 악랄한 탄압은 여기에 끝나지 않고 사명당 舊碑의 내용중

적장 加藤淸正이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朝鮮有寶乎)’

대사 對曰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無 有寶 在日本)’

가등청정 어리둥절하여 ‘어찌하여 일본에 있느냐?(何謂也)’

대사왈 ‘시방 우리나라에서는 네 머리가 보배임으로 이는 일본에 있는 것이다(我國以若頭視寶 是在日本也)’ 란 문귀가 죽포의 비위를 건더렸다.


죽포는 순사와 석수를 대동하고 기어이 사명당비를 十자로 깨뜨려 파출소 디딤돌로 삼았다. 그뒤 죽포는 통영서장으로 가서 이순신장군을 모신 충렬사의 간판과 영정을 도적질 하다 천벌을 받아 염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지금의 新碑는 해방이 되고 나서 일제의 압박과 설음에서 살아 남은 임환경과 김범부에 의해 정해년(1947년) 5월에 다시 세웠던 것이다.  

 

 

해인사사적비 海印寺事蹟碑 1769년


해인사(海印寺) 사적비(事跡碑)...한국그석문동합영상시스템 해석본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영우합천(嶺右陜川) 해인사(海印寺) 복고(復古) 사적비명(史蹟碑銘) - 병서(幷序)
합천군(陜川郡)의 북쪽 80리(里)되는 곳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가 있는데, 이는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때 승려(僧侶) 순응(順應)이 세운 것이다.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판(板)을 그곳에 보관하였는데, 우리 혜장대왕(惠莊大王 세조)께서 무인년(세조 4, 1458년)에 판각(板閣)을 중수(重修)하고 또 그 경문(經文)을 인쇄하였으니, 그 사찰(寺刹)의 중요성은 다른 사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성상(聖上)이 즉위(卽位)한 지 19년째인 계해년(영조 19, 1743년)에 섬돌 이하 수백 칸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그 당시의 관찰사(觀察使) 김상성(金尙星)이 재물을 내어 도와주고 계획을 세워서 복구하였다. 그 뒤로 21년이 지난 계미년(영조 39, 1763년)에 또 전처럼 불이 났다. 공의 당제(堂弟)인 김상철(金尙喆)이 당시에 또한 관찰사로 있었다. 그가 재물을 내어 도와주고 계획을 세워서 전보다 규모는 배가 되었으나 용이하게 복구하기는 마치 초가집 한 채를 짓는 것과 같이 하였다.


대체로 선왕(先王)의 보적(寶蹟)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써 두 번의 계년(癸年 계해년과 계미년)에 두 김씨(金氏)의 도백(道伯)이 부임(赴任)한 것은 어쩌면 그 사이에 운수(運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는 하늘이 필시 두 공(公)을 보내어 앞뒤로 부임하게 한 것일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더 이상 일컬을 수가 없다.산의 기이한 형세와 절의 빼어난 형세에 대해서는 조매계(曺梅溪 조위(曺偉))의 기록에 모두 자세하므로 이제 기록을 생략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산문(山門)이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은
시로 나라의 은덕(恩德)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 짧은 비갈(碑碣)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보존되기를 바라노라.

숭정기원후 세 번째 기축년(영조 45, 1769년) 6월 일에 세우다.

운객(雲客) 유기(有璣)는 비문(碑文)을 짓고,
신몽준(申夢駿)은 글씨를 쓰고 전액(篆額)을 하다
.

왕비전하(王妣殿下)는 해와 같이 장수(長壽)하소서!
주상전하(主上殿下)는 만세(萬歲)토록 장수하소서!
세자저하(世子邸下)는 천세(千歲)토록 장수하소서!

계파(桂坡), 성능(聖能), 조무(造武), 능교(陵橋)가 돌을 채취(採取)하고 공(功)을 기록해서 기념(紀念)을 하려다가 세우지 못하고 입적(入寂)하였는데, 이제 사적비(事蹟碑)를 세우는데 사용하였다.
도감통(都監通) 조심(照審)
별통(別通) 치연(致演)

편판(片判) 건영(建榮)
편통(片通) 전익(典益)
각(刻) 품관(品官), 품헌(品軒), 영원(永元), 원성(願性)
치(冶) 김차동(金次同) 

 

 

해인사사명대사부도 海印寺四溟大師浮屠. 1612년 추정

홍제암 부도전 뒤편에 자리한 부도는 우리곁에 나투신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71년 8월 9일 동아일보 정만진기자의 기사를 발췌 요약하였다.

"경북대 서수생교수와 해인사 교무승 윤명진 스님은 1770년(영조 46년)의 해인사홍제암중건기 비문에 "홍제암 부군에 사리를 넣은 탑과 비가 있다"는 내용은 근거로 홍제암 주변을 뒤진 끝에 송림속에서 이끼 낀 부도를 발견했다고 한다."


 

방형 지대석과 원형 기단이 일석으로 조성되었다.

긴단에는 복련을 표현하였고, 상부에 탑신 홈을 두어 탑신을 올렸다.

석종형 탑신과 보주도 일석이다.


 

 

답사객의 필독서로 자리한 어느 책자에는 홍제암 부도전 위쪽에 홀로 있는 사명당 부도를 간과하고, 부도전 사명당부도비 옆 환적당지경부도를 사명당 부도로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확인하지 많은 기자. 작가. 블로그. 카페지기 등등의 눈부신 삽질의 결과로 사명당부도는 제이름을 잃고 있다.


2011년 현장 안내문


지금은 수정 되었는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옛님의 숨결방의 사명당 부도 답사기(2011년 6월 5일)에는 당시 부도전 안내문과, 합천군청 홈페이지에도 환적당 부도를 사명당 부도로 설명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선사들께서

부질없는 짓거리 한다고 일갈 하실듯...


2016.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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