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다는 것 익숙하다는 것 그래서 소원疏遠하지는 않았는지 오래전 인연 짓고 무심히 흘러보낸 시간이 가물가물 작심하고 봄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참 서러운 일이 잖아요.
2016.05.08
고려초 문신 김극기의 시에는 병화를 입기 전의 황룡사 모습이 보인다.
黃龍寺 황룡사...金克己 김극기(1150~1204)
오후탐탐우五侯耽耽宇 귀족들의 큰 집은 당하불수서當夏不受暑 여름에도 더위를 받지 아니하는데 염관치실위炎官恥失威 더위 맡은 신 위엄 잃은 것 부끄러워 누옥번천노陋屋煩遷怒 누추한 집에 자꾸 화풀이를 하네 초심수사심焦心愁似火 마음을 태우니 시름은 불과 같고 삭체한여우爍體汗如雨 몸을 녹이니 땀은 비오듯 하네
*황룡사 주변을 표현한 듯
원수섭정능願隨葉靜能 원하건데 섭정능을 따라서 비입청허부飛入淸虛府 청허부로 날아 들어가 신기청요섬身騎靑瑤蟾 몸은 푸른 옥두꺼비를 타고 수롱백옥토手弄白玉兎 손으로 흰 옥토끼를 놀리고 싶다 가석범골성可惜凡骨腥 슬프게도 평범한 이 몸은 더러워 운소실귀로雲霄失歸路 구름낀 하늘에서 돌아갈 길 잃었네
불여고유인不如叩幽人 숨어사는 사람을 찾아가 점쇄청연어霑灑淸軟語 맑고 부드러운 말에 젖느니만 못하리 효기리고등曉起理枯藤 새벽에 일어나 마른 등나무 짚고 래심서사현來尋西社玄 와서 서사의 깊은 곳을 찾는다 와연요체태蝸涎繞砌苔 달팽이 침은 섬돌 이끼에 둘려 있고 조롱침운수鳥哢侵雲樹 새 소리는 구름 걸린 나무에 재잘재잘
*황룡사 경내 표현
전각과장려殿閣誇壯麗 전각은 웅장하고 아름다움 자랑하여 심공욕비거尋空欲飛去 공중을 향하여 날아가려 하는구나 일실만다화一室曼陀花 한 집 가득히 만다라꽃은 빈분락옥진繽紛落玉塵 어지러이 떨어져 옥티끌 같네 좌구황금압坐久黃金鴨 오래 앉아 있노라니 황금 향로에선 침연횡전루沈煙橫篆縷 향 연기가 구불구불 가로 흩어진다
*전각에 대한 표현으로 보인다.
활화시방다活火試芳茶 불을 피워 향기로운 차 달여보니 화자부백유花瓷浮白乳 꽃 무늬 자기에 흰 젖빛이 뜨네 향첨미우연香甛味尤永 향기롭고 달콤한 맛 더욱 은은하구나 일철공백려一啜空百慮 한 번 마시자 백가지 생각 사라지네
*요사에서 차를 즐기고
모색입평림暮色入平林 저무는 빛이 평평한 숲에 드니 장랑명법고長廊鳴法鼓 긴 행랑에서 법고가 운다 재미만상교才微萬象驕 재주는 적고 온갖 경치는 거만하니 파필음우고把筆吟尤苦 붓을 잡아 시 읊기가 더욱 괴롭구나
*회랑과 법고도 언급되어 있다.당시에는 법고가 회랑에 설치된 것 같다.
황룡사 당간지주...하늘사랑님 사진
황룡사지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하부, 원형간공의 흔적이 보인다. 분황사 당간지주로 그 모습을 유추해 볼 수 밖에...
현재 발굴지역에 속해있어 사진을 담을 수 없었다.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황룡사지는 현재 발굴이 중단된(2016.05.05일에는 다시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태인데, 앞으로의 발굴기는 상황에 따라 발굴 계속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한다.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신라삼보(新羅三寶)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솔거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감로운무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또,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親幸)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우물지
서금당지
동금당지
금당지. 정면 9칸, 측면 4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이는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인 경주로 실어 와서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3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9층목탑지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9층목탑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출처/문화재청
황룡사찰주본기는 통일신라 경문왕 11년에 왕의 명에 의해 중심사찰이자 성전사원인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로서, 구층목탑의 건립 과정과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가 아닌 중수 당시에 제작된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본기는 박거물이 찬하고 요극일이 썼으며 이를 승려인 총혜와 조박사 연전이 전각한 것이다. 특히 황룡사 목탑 건립과 관련하여『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후대의 史書 기록과 상호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찰주본기의 역사적·기록사적 위치는 중대하다고 하겠다.
금동사리함의 내외면에 쌍구체(雙鉤體)로 쓴 찰주본기는 9세기대에 주로 쓰였던 서체로 염거화상탑지(844년), 창림사 무구정탑원기(855년), 중화3년명사리기(883년)등과 더불어 이 시기 유행했던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도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의식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사리함의 문비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된다.
국립경주박물관 구층목탑 모형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심초석 목탑의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m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다. 그 심초석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다. 1964년 12월에 도굴꾼이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훔쳐갔으나, 그 뒤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다.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鷹遊)·말갈·단국(丹國)·여적(女狄)·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고려 광종 5년(954)때에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에 완공했고 정종 2년(1035), 헌종 1년(1095)에 보수공사 3년(1012)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보호에 힘썼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 침입으로 병화를 입은 후 오늘에 이른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황룡사 구층탑...일연/삼국유사
귀공신부압제경鬼拱神扶壓帝京 귀신들의 도움 받아 서울 땅을 진압하고 휘황금벽동비맹輝煌金碧動飛甍 휘황찬란한 색깔 속에 용마루는 나는 듯 등임하시구한복登臨何啻九韓伏 올라보니 어찌 변방 나라 복종으로만 그치랴 시각건곤특지평始覺乾坤特地平 비로소 온 천하의 태평한 이유 알겠네
국립경주박물관 치미...황룡사지출토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잘 알기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다음, 다음백과사전,위키백과 사전 자료를 참고 하였다.
2016.0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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