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분황사

임병기(선과) 2016. 5. 20.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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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안다는 것

 익숙하다는 것

 그래서

 소원疏遠하지는 않았는지


 오래전

 인연  짓고

 무심히 흘러보낸 시간이 가물가물


 작심하고

 봄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참

 서러운 일이 잖아요.

 

 2016.05.05

 

 

분황사 당간지주

분황사 사역 바깥  황룡사지에 위치해 있어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분황사 당간지주라 불러주고 싶다.

 

 

한 쌍의 돌기둥이 남북으로 맞보고 있으며,위로 올라 갈수록 줄어들면서 상부는 바깥쪽으 둥글게 모죽임하였다.

특별한 문양은 조식되지 않았다. 지주에는 3개 원형 간공이 있다.

 

 

분황사 당간지주의 거북모양 당좌는 유례가 없는 양식이다.

등에는 연화문을 장식한 방형 당좌를 설치하였고 그 위에 방형 받침을 두었다.

받침 한쪽으로 낙수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이 파져 있다.

 

 

지주석의 3개 원공

분황사 당간지주는 우리나라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분황사 3개 원형공(O-O-O) - 사천왕사지 3개 혼합간공(口-O-口) - 보문사지 3개 방형간공(口-口-口) - 남간사지 3개 간공(十-O-O)으로 진행되었으며 이후 간공이 줄어들거나 생략되면서 상부에 홈을 두는 형태로 변화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번幡·당幢·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금광명경소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하루는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다.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755년(경덕왕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6700근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 한문준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 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오늘

분황사에서는 1330주기 원효성사 제향대재를 봉행제례 준비로 분주하다.


 

모전석탑模塼石塔

자연석 방형 기단위에 3층의 탑신석이 남아 있다.

4방향 모서리에는 네마리의 사자가 호위하고 있으며 숫자는 내륙, 암사자은 동해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탑의 암질은 안산암이며,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1. 2층  6단, 3층은 5단인데, 낙수면은 1. 2층 10단, 3층은 방추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층 몸돌 4방향에 감실을 두고 인왕상을 시립시켰다. 조성시기는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대로 추측되며,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북면 인왕상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은 현존하는 금강역사상 중에서 조성 시기(634년)가 가장 빠르다.

인왕상은 초층 각면의 감실 문비 좌우 암좌 위에 봉안하였다.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근육질 몸매에  얼굴은 험상궂은 모습이다. 금강상은 무기를 들지 않은 권법 자세로, X자형의 천의를 입고 있다.

 

 

북면 감실안의 부처님

 

 서면 인왕상

 남면 인왕상

 동면 인왕상

 

분황사 모전석탑의 기단 모서리에는 4마리의 사자가 놓여있다. 1915년 수리 이전에 기단 위에는 6마리의 석사자가 있었다고 한다. 석탑의 보수 이후 현재의 4마리를 기단의 모서리에 각각 배치하고, 나머지 2마리는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현관에 한마리가 전시되어 있다.


사자상 중 2마리는 물개라는 설,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는 설은 논외로 한다.

 

 

  

 

 

 

석조부재


 

 

 

고려분황사화쟁국사비高麗芬皇寺和諍國師碑

고려 숙종 때 원효 스님께 화쟁국사和諍國師, 의상 스님께 원교圓敎국사의 시호를 내리고 비를 절에 세워 그 공덕을 길이 보존케 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그 후 고려 명종 때 원효 스님이 출가한  분황사에 세웠으나 현재는 귀부만 남아 있다.


 


받직육면체의 대좌 위에는 비신 홈을 두었고, 옆면에는 타원형의 안상을 표현되었으며  비좌에는 앙련과 복련이 새겨져 있다.  

 


비좌상부의 김정희 글씨

비좌는 추사 김정희가 분황사 절터 근처에서 발견하였다고 전하며, 이를 확인하는 글귀 차화쟁국사지비적 추사 김정희此和靜國師之碑蹟 秋史 金正喜라는 명문을 남겼다. 추사가 1817년  32세 때 무장사 비편을 찾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을 때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정靜 은 쟁諍 오류라고 한다.


 


삼룡어변정三龍魚變井

전설에 따르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 왔다고 한다. 그 뒤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물 내부의 사각형은 불교의 를 사성제,바깥 팔각 팔정도,안쪽의 원은 원융圓融의 진리眞理를  뜻한다고 한다.

팔정도

정견(正見):올바로 보고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고

정어(正語):올바로 말하고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고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고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노력하고

정념(正念):올바로 생각하고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보광전

 

 

 

약사여래입상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화마를 입었으며, 약사여래불은 1609년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건물로 밝혀졌다.

 

 

약서여래후불탱.1901년

 

 

석조약사여래입상

 

 

약사여래불은 불신과 광배가 하나의 부재이며 볼륨감이 뛰어난다.

두광은 겹동선으로 표현하였고 광배 외연에는 화염문이 조식된 듯 하다. 상호 일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원만상이며 귀는 길게 어깨에 닿았다. 나발(?)에 육계가 뚜렷하며, 삼도는 희미하다. 

 

대의는 우견편단, 승각기는 가슴을 감사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고, 하반신 옷주름은 U자 형태이다. 두 손은 복부에 두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다. 8세기 중후반 작품으로 추측된다.

 

* 기분이 좋지 않아 사진도 직지 않았지만 약사여래입상 옆에는 일본양식의 석등이 놓여 있다. 철거하였으면 좋으련만

 


 

 

분황사지 우물터에서 발굴된 석불좌상.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


 


분황사...김극기(1150~1204)


이끼 두른 빈 섬들에 들렀고, 대竹는 처마까지 떨치고,
경내境內가 맑으니 여름 더위가 사라진다.


한가한 스님은 맑게 웃으며 눈을 돌리고,
객이 취하여 목소리가 높아지고 붉은 수염 떨치네.


나는 연못에서 혜원慧遠을 생각하는데,
유문공公은 도연명을  떠올린다.

 
술잔을 머금고 취하여 돌아갈 길 잊었는데,
쓸쓸한 저녁 볕이 발簾의 반쪽에 내린다. 


*혜원慧遠...중국. 동진의 승


고려초기에도 선비들은 절집에서 술을 마신 듯...


201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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