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김천시

김천...운수암 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6. 2. 4. 07:35
728x90

 

 

 

암자로 가는 길...김은숙


오리나무 빼곡 찬 호젓한 이 숲길

사위는 적막뿐 노을이 빗겨 가고

하늘밑 가리왕산이 고성인 양 누웠는데

이 목숨 누구이기에 인연이 닿아서

처연한 노을 업고 암자에 오르는가

불타는 우리네 육신 바람으로 갈 것을


암자

우리들도 시인이 그린 그러한 정서를 품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에세이에 자주 오르내리는

호젓한 산길, 댓닢, 바람소리, 물소리, 잘 늙은 절집 등이 스쳐 지나가고


하지만

요즈음의 암자 가는 길에 그런 로맨틱한 감성은 사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시나브로 문명의 이기에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운수암 극락보전


2012년 4월 20일 대구매일 게재된 학교후배인 박용우 기자의 "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17>직지사 산내 암자들"에서 운수암 내용을 발췌해 왔다.


직지사 경내를 통해 황악산 등산로를 따라 2㎞를 오르면 운수암(雲水菴)을 만난다. 등산로 주변은 진달래`벚꽃 등 봄꽃들이 피어나 찾는 이들의 눈을 호사시켜 주고 있다. 암자에 들어서면 새롭게 조성한 3층 석탑이 있다. 전각에도 단청을 입혀 산뜻한 느낌을 준다. 운수(雲水)는 직지사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언제나 구름 속에 갇혀 있어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방치돼 오다가 1964년 보인(普仁) 비구니에 의해 중창됐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암자 주변에는 건축물 흔적과 대형 맷돌 등이 발굴돼 상당한 규모의 암자였음을 말해준다.


암자에는 중창을 둘러싼 호랑이의 전설이 전한다. 해방 후까지 절이 불타 없어지고 산신각만 겨우 남아 있었다. 여러 스님들이 절을 중수하려고 찾아 머물렀지만 그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문을 두드리거나 흙을 뿌려 스님들이 놀라 며칠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방치돼 있던 것을 비구니 보인이 주지인 녹원 스님에게 청을 넣어 불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보인 스님이 운수암에 머물자 더 이상 호랑이의 해코지가 없어졌다고 한다. 팔순의 보인 스님은 “호랑이 같은 큰 짐승은 보지 못했고 토끼는 자주 절 마당에 내려왔다”고 말했다.


보인 스님이 운수암을 짓기 위해 쏟은 정성은 눈물겹다. 스님은 김천시내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매일 쌀 3되를 동냥해서 불사를 시작했다. 지금처럼 잘 닦여진 신작로가 아니고 길의 형태도 없는 오솔길을 걸어서 내려가 탁발을 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이곳은 산세가 높아서 찾는 불자도 드물었다. 궁리 끝에 주지스님의 허락을 받아 고시생을 받아들여 하숙을 시켜 불사에 보탰다. 노(老)스님은 “이곳 터가 좋아서인지 공부를 한 사람 중 판`검사가 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된다”고 자랑했다. 그는 “공양을 위해 반찬거리를 사러 바랑을 메고 매일 시내까지 갔었다”며 “고시에 합격한 분들이 나중에 불사를 하는 데 많은 보탬을 주었다”고 말했다.


큰 법당인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보전 현판 옆으로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거대한 용머리가 양쪽에 조각돼 있다. 또 관음전 처마 밑에는 공을 굴리는 듯한 형상을 한 돌로 만든 돼지 3마리가 익살스럽게 앉아 있다. 큰 법당 뒤편 산산각에는 다른 산신탱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큰 몸집의 호랑이가 산신 옆에 앉아 있어 이채롭다.


 

아미타삼존불

지장보살.아미타여래.관음보살


 

산신각


 

맷돌 2기

어처구니를 망실 했지만 지난날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운수암 삼층 석탑.

2011년 9월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운수암을 들린 주 목적이 디지털김천문화대전에 실린("직지사 운수암 석탑재.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직지사 운수암 석탑재는 직지사 산내 암자인 운수암 극락보전 뒤에 석탑재가 있다.") 석탑재 답사였다


"석탑재가 있다"?

참 불성실한 조사라는 선입견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석탑부재가 한 둘인가? 더구나 사진도 없이...


잔설과 겨울바람이 주인처럼 자리한 적막강산인 암자 곳곳을 뒤졌지만 석탑재는 오리무중이다.

발길 돌리기 못내 아쉬워 요사에서 스님을 찾았더니 극락보전 앞의 삼층석탑을 가리키며 부재를 복원한 석탑이라고 말씀 하신다.


그럴리가?

다시 여쭈었더니 2.3층 탑신과 옥개석이 운수암에 남아 있었던 석탑 부재라고 하신다.

그래도 미심쩍어 하는 나에게 "고려초기 석탑입니다" 라고 부드럽지만 강한 톤으로 일침을 가했다.



 

스님께서 옛부재라고 말씀하신  2,3층 탑신과 옥개석

세월의 인연은 걷어내고, 숨기고픈 연륜은  다시 윤곽을 깊게 드러내었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상부는 볼록하게 공굴리고 다시 흘러 내렸다.

추녀는 평면이나 처마의 반전이 날카롭다.

옥개석 하부에는 절수구가 표현 되었고 층급은 4단이다.


아쉽게도

복원한 초층 옥개석에는 절수구를 표현하지 않았다.


탑신석

인연과 연륜을 걷어냈다고 하지만 내눈에는 옛부재는 아닌 듯 하다.


스님 말씀처럼 고려초기의 석탑으로 추측된다.


 

 

복원한 초층 옥개석. 낙수면은 2,3층과 동일하게 복원하였다.

 

 

옛부재를 활용한 석탑으로 보이는가?

절집에서 옛부재 활용을 기피하는 까닭은 새롭게 조성하는 것 보다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연과 연륜을 그대로 간직했다면 금상첨화이었을텐데...


그래서

늙은 석탑은 장인의 혼이 배인 작품으로 모셔지지만

오늘 날의 석탑은 기계가 찍어 낸 제품으로 치부 되는 것이다.


출처:http://optimizen.blog.me/20042750146에 실린 2007년 10월 16일 사진( PC에서 찍음)


사족 아닌 사족.

글을 마무리 후 검색 결과

2007년 등산객이 찍은 사진에는 추녀가 훼손된 옥개석 2개와  초층 탑신석이 남아 있는 석탑이었다.

현재 석탑의  날까로운 옥개석 반전은 복원된 모습이며, 초층 탑신석이 본디부재 여부인지는 확인 하지 못했다.


 

어?

넘어간다. 넘어가!!!


내 마음도 저럴까?


2016.01.27

728x90
728x90

'경상북도 > 김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천...보광리 석탑재  (0) 2016.02.10
김천...제석리 석탑재  (1) 2016.02.05
김천...직지사 부도전  (0) 2016.02.03
김천...송죽리 석조보살입상  (0) 2016.02.02
김천...극락산 마애칠불  (0) 2014.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