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
이런저런 사연으로 여러번, 그것도 혼자가 아닌 둘(?)이서 들렸던 절집이다.
숨기고픈 사연이 있었던가?
사진 한 장 없다.
2002년에 남긴 글이 보인다.
당시에는 사진을 찍지 않았을 때이고, 그 이후 사진은 왜 없을까?
여러 곳에 오류가 보이지만 그대로 옮긴다.
그 또한 나의 모습이기에...
201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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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초입부터 싱그런 신록의 풋내음과 송홧가루에 취해 목월의 윤사월을 더듬어 보지만 문설주,눈먼 처녀,외딴집...
몇 개의 단어만 아른아른 거린다
가지산 석남사 참으로 다녀 가고픈 절집이 아니었던가?
비구니 참선 도량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 까지 논란이 많은 도의선사의 부도가 보고 싶었기에 가슴 설레이며 기분 나쁘게 포장된 솔밭길을 들어서니 계곡물 소리가 아득하게, 어지롭게 때론 가깝게 들리며 귀에 가득하다.
이런 나의 심성을 연암이 환생하여 열하일기를 다시 쓴다면 아마 잡놈의 스키!!! 라고 말하리라.
침계루(枕溪樓) 계곡을 베게 삼아 조성된 누대. 이곳에서 법을 알고, 경을 파고, 참선 정진이 가능할까? 차라리 목침 베고, 죽부인 껴안고, 와선삼매나 즐기면 왔다!!! 일텐데...
역시 덜 떨어진 화상다운 발상에 씨익 웃음 지으며 누를 올라서니 3층 석탑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어깨에 힘을 팍 주고 있다. 왼지 대웅전과는 조화롭지 않는 느낌 지울 수 없다. 도의선사가 진신사리를 모시고 세운 탑이었으나 임란시 멸실된 것을 1973년에 복원하였다는 안내문에 고개가 갸웃 거렷지만 기왕이면 1층 탑신 괴임돌을 2단 또는 1단으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 홀로 3단이다.
하긴 찍어낸 기와로 치장한 대웅전 지붕도 번들번들 개기름 같지만, 대웅전 기단부의 계단 소맷돌의 용 두 마리에 건방지고 사악한 맘 던져버리고 , 산중에 잡귀가 그렇게도 많은지 어칸, 협칸, 문은 온통 솟을문양 이다.
옆문을 들어서니 항마촉지 수인의 본존불이 닫집도 없는 연화좌대에, 우물반자 닫집 삼아 앉아서는 "어이 화상아!! 나는 볼 것 없고 후불탱이나 보고 가거라 너 아니? 겸재가 회갑인 나이에 그린 작품이야"라고 말한 듯 하지만 불행히도 내겐 즐길 만한 안목이 없음을 죄스러 하며 삼배 후 잠시 눈감고 입정에 들려고 했지만 전각 밖의 소란스러움에 저 처자들 꼬라지나 봐야 겠다며 꼰 다리를 풀었다.
어미이 눈 앞에 펼쳐진 넘 좋은 그림에 난 대웅전 기둥에 기대서서 소리 없이 한참이나 지켜 보았다. 텅빈 뜰에 운력을 마친 젊디 젊은 비구니 들이 삼삼오오 석등을 벗 삼아 밀집 모자 옆에 끼고 호미 자루 던져 버리고, 온갖 자세를 잡고. 웃음 머금은 채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어찌 조동탁은 저 여승의 머리를 보고 "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고..." 라는 아름다운 시어를 생각 할 수 있었는지 이놈은 송춘희가 부른 "인적 없는 수덕사의 밤은 깊은데.... 아아아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라는 전국민의 애창곡 수덕사의 여승만 떠오르는데......
조사당은 은행의 금고인양 큰 자물통으로 안팍을 단절 시켜버렸기에 목탁소리, 나무아미 타불을 따라 극락전 문을 빼꼼이 들여다보니 여승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염불에 몰입하고 있다. 에이 이왕 들킨 몸 팔작지붕, 겹처마, 다포식인 극락전에 들어가 낭낭한 염불 소리 들어며 유리 상자에 갖힌 미타 삼존 알현하고 천장을 올려 보았더니 두 마리의 용이 들보 위에 목을 걸치고 긴 콧수염을 날리고 있다.
비구니 도량 이어 선지 정갈하기 그지없는 절집 뜰은 밟기조차 두렵다 요사채 뒷편에 작은 뜰을 일구고 박을 심고서는 대나무로 가로세로로 엮어 지붕 위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가을날 보름달이 휘영청 비치는 날에 온다면 아스라한 유년의 고향집 정취를 맛보리라
觀水洗心 맑은 물처럼 마음 비우고 흐르는 물처럼 세상사 따르니 큰 바다 물처럼 내마음 넉넉하리....
흘깃 읽어보고 종각에 올랐다 (올라가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있기에 팻말에 올라가지 않고 계단을 밟고... ㅋㅋㅋ)
상대에 괴상한 모습만 아니라면 상대에 물린 방형의 젖가슴(乳廓), 검푸르고, 뽕긋한 9개의 젖꼭지(乳頭), 음통, 한 마리의 포뢰, 비천상, 2곳의 당좌. 하대의 당초운문이 뚜렷한 철저하게 신라 범종을 흉내낸 최근의 범종이다, 500년 후쯤 우리의 후손들은 이시대의 특징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참선방인 정수원에는 들리지 못하고 높은 계단 위에서 작지만 아담한 3층 석탑을 내려다보고 안내문을 읽고 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왼지 대웅전 앞의 석탑이 대웅전에 비해 크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탑이 본디 대웅전 뜰의 탑이란다. 기이하게도 신라 말의 탑이면서도 탑신 괴임돌은 1층*4, 2-3층*3개이다, 괴임돌로만 보자면 통일 전의 탑 양식이지만, 하기단에 안상이 음각된 것을 제외하고는 우주, 탱주도 없어 오히려 고려의 탑으로도 여겨지지만, 전문가들이 신라 말의 탑이라고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석남사는 도의선사가 창건 하였다지만 구산선문의 일반적 특징인 철조여래불, 이형의 석탑도 없을 뿐더러 반개혁 세력인 선종 사찰이 도의선사 시절에 경주 근교에 자리 잡기에는 다소 무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도의선사 부도를 가렸더니 불사중이어서 길이 끊겼다, 우회하여 담벼락을 넘고 가고팠지만 차라리 스님께 부탁을 하려고 댓돌 위에 하얀 고무신 가지런히 놓여진 요사채에 "스님"하고 불렀다.
나의 얘기를 듣고 난 스님이 "처사님! 오늘은 인연이 아닌 모양입니다". "처사님! 그냥 믿으세요"라며 나의 맘을 꿰뚫고 계신다. 최근 들어 갑자기 부도의 주인공 확인차 답사객이 많은 듯 했다.
그래 내가 적덕을 짓고, 공덕을 일군 후 찾아 뵈어야 겠다. 시건방지게 살아온 일상 반성도 하고,. 그러다 보면 좋은 인연도 맺겠지. 진공선사가 조성한 도의선사의 분사리 부도라고 최완수님은 이미 인연을 쌓았거늘......
2002.5월
다시 2016년 1월로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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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지난번 답사에도 개인소개가 없었다고 지청구를 들어 간단히 얼굴을 익힌 후 절집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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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각지의 꾼들이 집결하였다.
훗날 중요한 사진 자료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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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후면
莊嚴寂滅道場장엄적멸도량.선종 사찰의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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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답사객에게는 사치, 주인에게는 불편
그래도
황톳길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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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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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밭을 지나며... 정호승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눈 내리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누군가 걸어간 길은 있어도 발자국이 없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 끝내는 작은 발자국을 이룬
당신의 고귀한 이름을 불러본다 부도 위에 쌓인 함박눈을 부르듯 함박눈! 하고 불러보고 부도 위에 앉은 작은 새를 부르듯 작은 새! 하고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사람들은 오늘도 검은 강물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않지만 더러는 강가의 조약돌이 되고 더러는 강물을 따라가는 나뭇잎이 되어 저녁바다에 가닿아 울다가 사라지지만 부도밭으로 난 눈길을 홀로 걸으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들린다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켜는 소리가 보인다 저 작은 새들이 눈발이 되어 거문고 가락에 신나게 춤추는 게 보인다 슬며시 부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의 맑은 미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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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양종지봉당거기대사부도.18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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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당세위대사부도.18세기 후반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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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화백대사부도.17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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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월당덕휘대사부도.17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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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迦智山)동쪽 기슭,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위치한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입니다. 고헌산맥은 저 멀리 강원도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줄달음질을 치다가 도중에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형성한 뒤 다시 뻗으면서 형성되는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영취산 등의 영산 명봉들을 이루어 놓고 있습니다가지산에는 석남사, 신불산에는 간월사, 영취산에는 통도사 등의 신라 명찰이 들어 앉게 되었으니 불심과 영통한 법운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남사(石南寺)란 이름은 가지산(迦智山)을 석면산(石眼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헌덕왕(신라제41대憲德王 서기809-826)에 한국에 최초로 선을 도입한 도의국사 (道義國師)가 일찌기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 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해 창건하셨습니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 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하여 최초로 선문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시조가 되었으나 고국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3년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창건이후 여러 차례 중건중수(重建重修)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후 1674년 (현종 15년)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영(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 태주 (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성진(性眞)이 단청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香閣)을 증축 하였고, 희철(熙哲)선사가 명부전을 세웠습니다. 1803년(순조 3년)에 침허(枕虛), 수일(守一)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가 1912년 우운(友雲)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나 한국전란으로 폐허가 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고찰의 모습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습니다.이렇게 폐허가 된 것을 1957년 비구니(比丘尼) 인홍 (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시설을 중수중창을 하고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검당 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크게 각 당우를 일신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비구니들의 수도처로서 많은 비구니들의 정진하는곳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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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강선당(講禪堂) · 조사전(祖師殿) · 심검당(尋劍堂) 등 30여 동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791년(정조 15년)에 세운 극락전이 있으며 다음 가는 건축물로는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도의국사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의 엄나무구유 · 돌구유 등이 있습니다...석남사 홈
![](https://t1.daumcdn.net/cfile/blog/2447673E56A6ACBA06)
대웅전과 사리탑(1973년)
대웅전은 1974년에 인홍스님이 해체하여 복원한 정면 3간 측면 2간, 겹처마 다포형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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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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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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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석가여래삼존.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제작연대는 숙종 42년(1716년) 청월추연이 지은 석남사적에 의하면 임진왜란 후 현종(1660~1674) 때 중창하며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 항마촉지 수인을 하고 있다.
협시보살 존상은 문화재청 발간 사찰문화재총람에는 제화갈라불, 미륵불로 표시하였고 석남사 홈페이지에는 문수,보현 보살로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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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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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화갈라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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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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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리구시.조선후기
엄나무로 만들었으며 간월사(澗月寺) 명문으로 미루어 간월사에서 옮겨온 구시로 추정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70D544656A6AD5D24)
수조.
화강암 재질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작품으로 전한다. 방형의 일반적인 수조와 다르게 모서리의 안과 밖을 둥글게 다듬어,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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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밖. 맷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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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석탑
대웅전 중정에서 옮긴 석탑이며 예전에 비해 주변 환경이 정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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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전형의 2층 기단의 삼층석탑이지만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몇개의 특징을 지닌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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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층탑신 괴임이 4단이며 흔치 않은 작례이다.
기단면석에는 1개 탱주와 양우주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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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단 저석과 면석이 일석이며 저석이 낮고, 면석에는 면마다 4개 안상이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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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 상부의 탑신괴임이 3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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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 받침은 전층 4단이다.
탑신에는 양우주를 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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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단 갑석 상부에 조출된 상기단괴임을 갑석 바깥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유형은 석남사 석탑의 큰 특징의 하나이다.
즉 갑석 끝부분 2단 괴임의 하부는 넓은 호형, 상부는 좁은 각형이다.
노반석 위 상륜부는 후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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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270C5E4056A6AD6A23)
극락전
1674년에 지은 석남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1974년 인홍스님이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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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스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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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편 부도
이번 답사 자료 준비중에 낭공대사 부도로 밝혀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문화재청(석남사 승탑,도의국사 부도로 불리어 왔다), 울산시청(석남사 승탑), 석남사(도의 국사) 자료에는 도의선사 부도 또는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로 등재되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525254256A6AD743D)
문비 측면의 존상에 대하여 울산시청과 문화재청의 자료가 서로 다르다.
또한 하대석 면석에 새겨진 동물상도 사자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에 코끼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자와 사천왕상으로 생각한다.
울산시청 홈
승탑의 지대석은 평면이 8각형으로 상부에 1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하대석을 올렸다. 하대석은 2단 형식으로 하단은 면석에 역동적인 사자상獅子像을 앙각하였다. 하대석 상단에는 구릉무늬가 돌기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중대석은 가운데가 볼록한 팔각형을 유지하며, 각 면에 안상을 장식하고 그 안에 꽃무늬를 배치하였다. 상대석은 하부에 각형 1단의 받침을 두고 가운데 꽃무늬가 장식된 8엽의 앙련문을 조각하였다. 탑신석은 각면에 우주를 세우고 상하에 인방을 가로질러 사각형으로 구획한 후 그 안에 문비와 사천왕상을 배치하였다.
문비 안에는 자물쇠와 2개의 원형 문고리를 표현하였다. 옥개석은 사각형의 서까래를 표현하여 홑처마의 목조건조물을 모방하였다. 지붕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각 면은 7개의 기왓등을 표현하였다. 상륜부에는 앙화석, 보개석, 보주 등이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석남사승탑은 팔각원당형의 통일신라말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1962년 5월 해체보수되었으며, 이때 기단 중단석 윗면 중앙에서 직사각형의 하리공이 확인되었다.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전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문화재청 홈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을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와 탑신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神將立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25C444056A6AD6E2E)
![](https://t1.daumcdn.net/cfile/blog/244DDE4256A6AD6F0A)
![](https://t1.daumcdn.net/cfile/blog/2740564256A6AD713A)
![](https://t1.daumcdn.net/cfile/blog/23401E4256A6AD7204)
![](https://t1.daumcdn.net/cfile/blog/2525254256A6AD743D)
낭공대사의 부도인가?
[출처] 후삼국시대에 활짝 핀 石燈예술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29]|작성자 ohyh45
그런데 필자는 제26회에서 <석남사 부도>를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3대 조사로 사실상 가지산문을 처음 일으켜 세운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의 부도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寶林寺 普照禪師 彰聖塔)> 양식과 비교하면서 <보조선사 창성탑>이 세워진 뒤에 이를 본딴 가지산문 계열의 부도일 듯하다고 보았고, 가지산문의 초조인 도의(道義)선사 부도로 세워진 것일 수 있다고 추론했었다. 이는 석남사에 전승돼 오는 도의선사 부도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합리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면서도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문(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文)> 내용에서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년)이 경주 부근 석남사에서 돌아가고 그곳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경대사 부도>를 재확인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다가 미술부 소재구(蘇在龜) 학예관이 이 문제를 이미 울산에서 출간할 향토지에 거론했다는 말을 듣고 <석남사 부도>가 <낭공대사 백월서운탑>일 것이라는 그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였다.
비석과 함께 있지 못하여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가지산이란 산 이름과 연관지어 가지산문 초조인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러면 어째서 <석남사 부도>를 낭공대사 행적의 부도로 추정하는지를 밝히기 위해 경북 봉화군 명호면(明湖面) 태자리(太子里) 태자사터에 남아 있다가 1918년 경복궁으로 옮겨온 <신라국 고양조국사 교시낭공 백월서운지탑 비명병서(新羅國 故兩朝國師 敎諡朗空 白月栖雲之塔 碑銘幷序)>의 내용 중 그 해당 부분을 옮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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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태자사지. 교시낭공 백월서운지탑 비 귀부.이수...옛님의 숨결 2584 참조
“신덕(神德)대왕(912∼916년)이 큰 뜻으로 빛나게 다스리고자 은총을 내려 대궐로 부르자 정명(貞明) 원년(915) 봄에 이르러 대사는 갑자기 선승들을 이끌고 제향(帝鄕; 왕도, 서울)으로 올라왔다. 전례에 의해서 남산 실제사(實際寺)에 안주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절은 곧 이에 앞서 성상(聖上)이 재상으로 있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임금(효공왕)께 드렸다가 이어서 대사(낭공대사)에게 부탁하여 영원히 선종사찰로 삼은 곳이다.
이때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궁 밖에 나와 머무는 곳)로 맞아들여 거듭 자비로운 얼굴을 뵙고 이에 기다리던 마음을 열어 다시 무위(無爲;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스러짐)의 설법을 들었다. 사양하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특별히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에 여자 제자가 있었으니 명요(明瑤)부인이다. 신라 종실이고 나라의 으뜸 귀족이었는데 대사를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불교를 존숭하여 석남산사(石南山寺)를 받아서 영원히 머물러 지켜주기를 청하였다
가을 7월에 대사는 심히 마음에 흡족하여 비로소 이 절에 머물러 살기로 하였다. 멀리 4악(四岳, 동악·서악·남악·북악)에 이어져 있고 높게 남쪽 바다를 눌렀으며 시냇물이 다투어 흐르니 마치 금여곡(金輿谷; 쇠수레가 구르듯이 물소리가 요란한 골짜기)과 같았고 바위와 산봉우리가 높음을 다투니 자개봉(紫蓋峯; 붉은 구름이 뒤덮고 있는 봉우리, 衡山 第一峯의 이름이기도 함)인가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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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사 낭공대사비...문화재청
참으로 은일(隱逸이 사는 그윽한 곳이고 또한 승려가 살 만한 아름다운 곳이었다대사가 두루 영산을 찾아다녔으나 거처를정하지 못하더니 비로소 이 산에 이르러서야 임종할 곳으로 생각하였다. 명년(916) 2월초에 이르러 조금 편치 않더니 12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인생이 유한하니 나는 갈란다. 지켜서 잃지 말도록 너희들은 힘써라’ 하고 승상(繩床; 줄을 엮어 만든 침상이나 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근엄하게 돌아갔다. 나이 85세, 승납 61세였다. (중략)
17일에 이르러 삼가 색신(色身)을 받들어 서쪽 봉우리 기슭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성고대왕(聖考大王; 돌아가신 아버지 대왕, 신덕왕)이 홀연히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참으로 가슴 아파하며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의식을 감호(監護; 감독하고 보호함)하게 하고 이어서 조문하고 제사드리게 하였다.
정명 3년(911) 11월중에 이르러 동쪽 언덕 위로 개장(改葬)하니 절에서부터 300보쯤 떨어졌다. 전신이 흩어지지 않고 신색(神色)도 평상시와 같았다. 문하인들이 거듭 자애로운 얼굴을 뵙고 감격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석호(石戶; 돌문, 석실의 뜻)를 베풀고 막아버렸다. (중략)
제자 신종(信宗)선사, 주해(周解)선사, 임엄(林儼)선사 등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한마음으로 지키니 모두 상족(上足; 제자를 스승의 발에 비유하여 제자 중 뛰어난 이를 일컫는 말)에 해당하였다. 항상 부지런히 수호하며 오래도록 간절하게 추모하였으나 늘 큰 바다로 먼지가 날아가거나 높은 바람에 번개가 끊어지듯 할 것을 생각하고 여러 번 대궐에 나아가 큰 비석을 세워주도록 청하였다.
금상(今上; 지금 임금, 경명왕)이 왕위를 이어 교종을 존숭하고 선종을 떠받듦이 전왕조와 다름이 없어 시호 드리기를 낭공(朗空)대사라 하고 탑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하였다. 이에 하찮은 신(臣)에게 명하여 마땅히 붓방아질을 닦으라(비문을 지으라) 하니 인연(仁, 최인연 878~944)이 굳게 사양하였으나 면치 못하고 명령에 대답하여 이를 좇는다.
변변치 못한 말을 늘어놓아 남긴 공적을 법대로 찬양하였으나 비유하건대 표주박을 이끌어 바다를 되질한다 해도 큰 바다의 깊이를 알 수 없고 대통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아도 푸른 하늘의 광활함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일찍이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고 친척으로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억지로 꾸몄다는 일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로써 법은(法恩)에 보답하노라.
” 그런데 비석이 이곳 석남사에 세워지지 않은 이유는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의 뒷면에 새겨진 <신라국 석남산 고국사비명후기(新羅國 石南山 故國師碑銘後記)>에 분명히 밝혀놓았다. 낭공대사의 법손(法孫)인 석순백(釋純白)이 지은 글인데 관련 부분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직 대사는 당나라 시대 신라국 경명왕 천우(天祐) 연중(904∼922년)에 법연(法緣)이 끝나서 경명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이어서 최인연 시랑(侍郞)에게 칙명으로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혼잡하고 사람들이 교활하여 성대한 일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로써 해는 새로워지고 달은 묵어가나 비문을 세우지 못하였다.뒤에 고려국이 이미 4군(四郡)을 평정하여 3한(三韓)을 솥발처럼 바로 세우자 현덕(顯德) 원년(954) 7월15일에 이 큰 비석을 태자산(太子山)에 세운 것은 좋고도 좋은 인연이 있어서였다.
이에 국사의 문하에 신족(神足) 제자로 국주사(國主寺) 승두(僧頭)인 건성원(乾聖院) 화상(和尙)이 있었는데 법휘는 양경(讓景)이고 속성은 김씨이며 자는 거국(擧國)이었다. 대사를 위해서는 몸도 되고 마음도 되며 왕을 위해서는 귀도 되고 눈도 되었다.장차 꽃다운 먼지를 바람이 쓸어가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구름이 녹이며 (행장을 기록한) 노란 비단이 해지려 하는데 푸른 비석을 세우지 않을까 두려워 스승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스스로 귀부(龜趺) 딸린 비석을 세웠다.
화상의 조부 애()는 원성왕의 내손(來孫, 5대손)이고 헌강왕의 서장인으로 (중략) 안으로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을 맡았고 밖으로는 패강도호(浿江都護)를 맡겼었다. 부친인 순례(詢禮)는 (중략) 안으로 집사함향(執事含香)에 이르렀고 밖으로 삭주장사(朔州長史)에 다다랐다.”
경명왕(917∼923년) 초기인 918년경에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최인연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세상이 안정되자 광종 5년(954), 즉 현덕 원년 7월15일에 가서야 봉화 태자사에 비로소 낭공대사의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비석 세우는 일을 자담하여 주관한 이는 국주사의 승두이자 건성원 주지인 양경화상이었는데, 그는 낭공화상의 고족제자이고 신라 왕족의 후예였다. 이때 이 일에 동참했던 9명의 낭공화상 제자들이 낭공 문중의 중심인물들이었던 듯한데 낭공 재세시에는 어려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뒷날 문중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고 적고 있다.
용담 식조(龍潭 式照)·건성 양경(乾聖 讓景)·연곡 혜희(谷 惠希)·유금 윤정(宥金 允正)·청룡 선관(靑龍 善觀)·영장 현보(靈長 玄甫)·석남 형한(石南 逈閑)·숭산 가언(崇山 可言)·태자 본정(太子 本定) 등 9인이 그들이다.
여기서 보듯이 석남사 주지 형한과 태자사 주지 본정이 이들 9인의 중심 인물에 들어 있다. 이로써 석남사와 태자사가 모두 낭공문도들이 차지하고 있던 절인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두 절에 낭공대사의 부도탑과 부도탑비가 따로 세워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석남사 부도>, 즉 낭공대사 부도가 하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의 양식을 계승하게 되었을까. 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년)은 사굴산문(山門)의 개산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의 수제자로 가지산문 제3대 조사인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현재로서는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도 그 부도 양식이 상호 계승관계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문제는 이 <석남사 부도>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의 주인공인 봉림사 진경(眞鏡)대사 심희(審希, 855∼923년)를 통해서야 해결될 수 있다.
봉림산문의 초조(初祖)이자 혜목산문(慧目山門)의 제2대 조사인 심희는 문덕(文德) 초년(888)부터 건녕(乾寧) 말년(898)까지 만 10년 동안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에 주석하면서 참선과 교화를 행하고 있었다 한다. 최인연이 용덕(龍德) 4년(924)에 지은 <유당신라국 고국사 시진경대사 보월능공지탑 비명병서(有唐新羅國 故國師 諡眞鏡大師 寶月凌空之塔 碑銘幷序)>에 기록된 내용이다.
송계가 강진 월출산 밑에 있는 지명이니 이곳에서 장흥 보림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그가 송계선원을 찾아가기 4년 전에 보조선사의 사리탑과 탑비가 세워진다. 그러니 새로 세워진 보조선사의 부도와 탑비는 그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 진경대사의 뇌리에 새겨진 <보조선사 창성탑> 양식이 장차 낭공대사 사리탑인 <석남사 부도>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진경대사의 보월능공탑으로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이 연결고리를 추적하려면 두 비문에 나타난 낭공대사와 진경대사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진경대사는 888년부터 강진 송계선원에 머물렀다 하는데 바로 그 어름인 892년에 견훤이 완산주(完山州), 즉 전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武珍州), 즉 광주를 손안에 넣고 자립한다. 그러니 송계선원 일대가 차츰 전란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진경대사는 898년 송계선원을 떠나 설악산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이곳도 이미 궁예가 차지하여 전란의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어져 있었다.
그래서 명주(溟洲; 강릉)로 일시 피란해 머문다. 그것이 대체로 900년 전후한 시기였던 듯하니 진경대사 나이 46세 전후한 때이다. 이때 69세의 노경에 접어들었던 낭공대사 행적도 사굴산문의 근거지인 이곳 명주에 머물고 있었다. 아마 진경대사는 이때 낭공대사를 찾아뵙고 그와 인연을 맺었을 듯하다.
그러나 궁예가 901년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를 자처하다가 뒤이어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철원(鐵圓)으로 도읍을 옮기기 시작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자 이들은 함께 강릉을 벗어나 신라 왕도인 서라벌로 자리를 옮긴 듯하다. 이해 7월 효공왕이 73세의 낭공대사를 왕사로 초빙한 것을 계기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함께 떠나왔던 진경대사는 경주를 거쳐 곧바로 김해로 찾아갔던 듯하다.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그곳의 실력자인 김율희(金律熙, 蘇律熙와 동일인, 쇠유리의 한자표기에서 뜻을 취하면 김율희가 되고 음을 취하면 소율희가 된다)가 선종을 외호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그의 보호를 받으며 선지(禪旨)를 전파할 목적으로 찾아갔다고 보아야 한다.
진경대사 자신이 김유신의 후손으로 임나 왕족의 후예였으니 이곳은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김율희도 그의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 김해는 진경대사에게 있어서 전란을 피해 있으면서 선지를 펼치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막 50대로 접어든 진경대사는 이곳에서 김율희의 도움으로 창원 봉림산에 봉림산문을 개설하여 혜목산문(慧目山門)의 기치를 일신한다. 이렇게 김해에 와서 터를 잡아 안도하고 나자 진경대사는 강릉에서 인연을 맺어 신세진 낭공대사를 김해로 초빙한 듯하니 낭공대사가 경주를 떠나 김해로 가는 것이 907년 늦여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공대사는 이곳에서 진경대사와 김율희 부자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915년까지 머물다 다시 신덕왕의 초청을 받고 이해 7월16일 경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바로 명요부인의 청으로 석남사로 내려가서 다음해인 916년 2월12일 이곳에서 돌아간다. 85세의 고령이었다.
이때 진경대사는 62세의 노인으로 봉림산문의 주인이 되어 이곳으로 피란해 오는 구산선문의 선사들을 보살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선종계에서 그의 위상은 막강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낭공대사의 사리탑과 탑비 건립에 그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되었을 듯하다.
사리탑 건립에 진경대사가 직접 관여하게 된 데는 낭공대사와의 친분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진경대사가 낭공대사 사리탑이 건립되는 917년 11월보다 1년 뒤인 918년 12월 4일에 신라왕도 경주로 올라가서 국사가 되는 것으로 보아도 이런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낭공대사의 부도인 <석남사 부도>가 진경대사의 의도에 따라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양식을 계승하면서 단순해지고 다시 진경대사 자신의 부도인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석남사 부도> 양식을 계승하면서 더 단순해지는 과정을 거치는 듯하다. 그 결과 호남의 부도양식이 영남으로 전파되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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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의 겨울...목필균
가지산을 품어 안은 천년 도량에 들어 잠시 숨을 고른다
세월 마디마디에 머물다 흩어진 이야기들 치마폭에 감추고
먹물옷 백팔 배로 오계의 고통 신음없이 견디어 내는 여인들
대웅전까지 따라와서 사철 푸른 대숲을 흔드는 질긴 인연의 숨소리
안으로 안으로 비워지는 대나무도 옹이진 마디로 겨울을 견디는 것을
정구업진언 정구업진언 정구업진언
입이 있어도 마음이 있어도
묵언수행 천 년이 걸려도 내가 없다는데 내가 있다
2016.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