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포항...운제산 오어사

임병기(선과) 2015. 12. 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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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사

기억조차 하련하다

아마

마지막 순례길이 20년도 넘은 듯 심지어 낯설기까지 하다.

 

운제산 산행 목적이었는데

부산, 퐝에 사는 동호인들의 동참으로 10월 마지막 날 멋진 하루를 보내었다.

 

오어사 입구에서 좌측에 놓인 다리를 건너 원효암 순례후 본절로 내려 오는 가장 짧고 순탄한 코스로 산행과. 답사를 하였다. 길지 않은 산행이었지만 운제산에는 만산홍엽의 만추의 절경이 펼쳐지고 오어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장소도 알게되었다.

 

 

신라 26대 진평왕(579∼632)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당시엔 사명이 항사사라고 했으며 갠지스강의 많은 모래처럼 많은 승려들이 왕래하여 사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어사가 위치한 운제산은 운제산은 원효, 혜공, 자장, 의상스님께서  계곡의 구름을 사다리삼아 이산 저산 오르내렸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한다. 또하나의 유래는 신라2대왕 남해왕비 운제부인의 성모단이 있어서 운제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사찰의 유래가 실려 있다. 오어사에서 원효 대사와 혜공 대사가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둘이서 계곡 상류에서 놀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서로 법력을 시험하여 보고자 하여, 고기를 낚아 다시 살리는 재주를 겨루었다. 그런데 둘의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좀체 승부가 나지 않다가 딱 1마리 차이로 승부가 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중 고기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주장하였다고 한 데서 '나 오(吾)'와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기를 놔준 곳이 오어지(吾魚池)이다. 
 

그러나 그 뒤의 연혁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고려시대의 연혁에 관한 다른 문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에서는 1736년(영조 12) 화재로 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1741년 치철 스님 등이 중건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여러 계를 조직해 사찰의 중수 및 운영에 보탬이 되도록 한 것이 눈에 띤다. 1811년 산내암자인 의상암에서 출발한 등촉계(燈燭契)를 비롯해서 1823년(순조 23) 염불계(念佛契)를 조직해 사찰을 중수하였으며, 1864년(고종 1)에도 칠성계(七星契)를 만들어 사찰 중수에 힘을 모았다. 이 같은 계의 조직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도 이어져 이 해에 나한전을 중수할 때 계가 활용되었다.

 

 

맷돼지도 굴러 떨어진다는 가파른 길에 위치한 오어사 포토존.

 

 

 

자장암

 

 

원효암

 

관음보살좌상

 

 

 

관모을 착용하고 목거리.팔목과 팔뚝에 팔찌를 끼고 있다.지권인 수인이다.

장엄 비로자나?

보살상?

 

일제 강점기의 상으로 추측하나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신장탱

 

 

불기 2983년(1956년)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법고대

 

 

시주비(1920)

아래 명문 해석.포항역사사랑 이상령님 글이다.

 

 

林寺 住持         기림사 주지 金景雲                 김경운

通度寺 住持          통도사 주지

金九河          구하  

 

 

住持 朴鰲岩         주지 박오암

化主 李㧶(갱)    화주 이갱수      

大正九年庚申七月四日  1920년 경신년 칠월 사일

石手 黃在五                 새긴이 황재오

 

 

自百兩以上石刻  스스로 백 냥 이상 시주한 사람을 새기다

徐廷錫  朴振喜   서정석                   박진희

子龍洛  李熙喆   서정석의 아들 용락  이희철

   龍浩  金元龍   서정석의 아들 용호   김원룡

   浩鋿  河受圖   서정석의 아들 호상   하수도

河迷坤  吳興守   하미곤                     오흥수

朴太伍  文元度   박태오                     문원도

李圭煥              이규환

崔翊洙              익수

宋元鎬              송원호金光彦              김광언

金汶榮              김문영

李相昊              이상호

金龍河              김룡하李南北              이남북

 

 

수조

 

 

오어사 대웅전은 석가 삼존불을 모신 전각으로, 불벽을 구성하여 불화를 걸었다.삼존불 위에는  닫집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장엄하였다.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여 연꽃무늬로 단청했다. 정면 3칸에 측면 3칸으로, 잘 다듬어진 자연석을 5층으로 쌓아올려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은 후 원형기둥을 세워 상부가구를 구성하였다. 다포계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공포는 외2출목으로 구성했으며 공포 상부에 놓여 밖으로 돌출되는 보머리는 봉황머리를 조각하고 귀포의 상부는 용머리를 조각했다.

 

 

대웅전 정면 3칸에는 모두 청판이 있는 꽃살 삼분합문을 달았다. 분합문은 하부에 청판, 중간부에 꽃살, 상부에 빗살을 두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측면에는 창호와 출입문을 두지 않았지만 후면 어칸의 중심부에 전면과 같은 꽃살청판문을 외여닫이로 시설하였다.

 

 

후면 어칸의 외여닫이

 

 

 

 

목조석가여래 삼존(1765년)

 

 

석가

 

약사

 

 

아미타

 

 

 

영산회상(1900년)

 

 

지장시왕(1900년)

 

 

 

 

 

 

목어(조선후기)

 

 

 1995. 11. 16 오어사 상류 오어지 준설 작업중 굴삭기기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진 좌측에 굴삭기 흔적이 보인다.

 

보물 제1280호. 동화사(桐華寺)  순성대사를 도감으로 하여 스님들이 공동으로 발원하여 삼백 근의 중량을 들여  정우(貞祐) 4년, 즉 1216년(고종 3)에 대장(大匠) 순광(順光)이 만들어 오어사에 걸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룬 용뉴는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는 목에는 비늘과 갈기가 매우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용의 이마 위로 솟아난 뿔이 앞뒤로 갈라져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용의 입안과 오른발 위로 보주가 표현되었는데, 특히 발 위의 보주는 칠보문처럼 투각 장식되었다. 연당초문으로 장식된 음통에 마치 새 깃털 같은 용뉴의 갈기가 함께 부조되었고 음통 꼭대기에는 작은 보주가 둘러져 장식되었다.

 

천판의 바깥 테두리에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복엽의 입상화문대 돌출시켰고,  상대와 하대에는 활짝 핀 연꽃과 연꽃을 줄기로 연결시킨 연당초문을 유려하게 부조하였다. 상대 아래의 연곽에는 연화 위에 높게 돌기된 연꽃봉오리가 9개씩 배치되었으나 일부는 부러졌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몸체에는 구름 위에 무릎을 꿇고 합장한 보살좌상을 앞뒤 두 곳에 부조하였다.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상의 양팔을 감고 두광 위로 솟구친 세 가닥의 천의는 매우 섬세하지만 약간 부자연스럽고 경직된 모습이다. 보살상 사이에는 당좌를 배치하였는데, 당좌는 원형의 자방 주위에 여의두형의 엽문을 두르고 다시 그 바깥을 이중의 도식적인 연판으로 장식하였다.

 

 

 

 

 

 

칠성계원유공비(1864)

박물관에는 2기의 목비가 전시되어 있다. 각각의 비의 명문으로 조선후기에 사찰의 황심한 조세 공출 등으로 사찰의 재정이 파탄지경이었으며, 스님과, 유학자들이 사찰계를 조직하여 사찰 재정을 충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염불계원 유공비(1823)

스님과 마을 사람 150여명이 계를 조직하였다는 기록이다.

 

 

삿갓

 

 

 

해월당경연탑 海月堂敬?塔

 

 

환운당묘흡탑 幻雲堂妙洽塔

 

 

대오당종해탑 大悟堂宗海塔

 

 

용계당탄변탑 ?溪堂坦卞塔

 

 

 

부도전.

옹기종기 7기의 조선후기 부도

멋을 한껏 부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 당호를 새긴 부도, 보주에 연꽃인 핀 부도

이제는 모두 어울렁 더울렁 따사로운 가을볕을 즐기고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인간사도 그러할텐데

이전투구, 아비규환

쯧쯧...

 

201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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