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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학림사 부도. 약사여래좌상.약사여래삼불좌상

임병기(선과) 2015. 11. 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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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사와 학도암 마애관음보살까지가 오늘 답사 예정 동선이다.

그래야만  내일 구리에서 일정을 시작할 수 있어 마음은 급하건만  짧은 가을해는 하루를 재촉하고 있다.

다행히 벌써 어둠이 내린 산사로 가는 길은 한적하여 진입이 용이하다.

 

 

학림사 초입 주차장 옆에 위치한 부도

본래위치 여부는 전하지 않으며 무명 부도와 尙宮蓮華상궁연화 부도이다.

 

 

尙宮蓮華상궁연화 부도

방형지대석위에 홈을 두고 위에 탑신을 올렸다. 상부에는 두껑 모양의 띠를 둘렀으며 보주는 반파 되었다.

사찰에 상궁의 부도를 모신 까닭은 학림사가 왕실과 관련 있는 사찰임을 암시하고 있다.

 

 

명문이 희미하다

물론 촬영 테크닉이 가장 문제지만...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

 

 

종형탑신 상부에 복련을 표현하였고 연주문위에 보주를 두었다.

 

 

 

약사전. 부도를 지나 사찰로 들어가는 우측 돌계단 위쪽 낮은 담장으로 둘러쌓인 약사전

사찰 경외에 위치한 약사여래에 전각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불상과 전각을 동시대에 조성하지 않은 듯하다.

 

 

약사여래좌상. 불두와 불신의 비례가 맞지 않다.

소발에 육계는 낮고 방형 상호는 입체감이 없다.입은 가늘게 음각하였고 귀는 짧다.

좁은 어깨위에 걸친 대의는 통견이며 손은 작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내눈에는 약합, 약기 등의 지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후보한 대좌 때문에 배꼽아래 모습은 볼 수 없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전한다. 대좌는 후보하였다.

 

 

 

 

 

학림사는학이 알을 품고 있는 듯 학포지란鶴抱之卵 형국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때인년에 원효대사하였다는 설이 전해오며 이후 고려시대까지 법등이 꾸준히 이어져 공민왕 시기에는 왕사 나옹스님에 의해 크게 번성하였다고 전한다. 정유재란에 전화를 입고 1624년 무공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780년 최백과  궤징스님,1830년 주담화상 등이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학림사는 근처 흥국사와 더불어 덕릉 즉 덕흥대원군의 원찰로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전한다.

 

 

오백나한전 약사여래삼존

 

 

조선후기에 경주불석으로 조성된 석조약사여래불상으로 나발에 중간계주와 정상계주를 표현하였다. 목을 앞으로 내민 조선후기 불상의 전형으로 법의는 변형된 우견편단, 본존은 약합을 지물로 들고 있다. 삼도는 생략되었고 불상 하부의 복장공에서 복장유물이 있었으나 발원문, 조각승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근데 주존이 약사여래일 경우 협시불의 존명은 무엇인지?

문화재지정 명칭처럼 두리뭉실하게  "약사여래삼불"로 칭하면 되는 것인가?

 

수습된 복장유물

"노란색 비단에 싸인 후령통 2점, 1477년(성종 8)간 『묘법연화경』권4∼7, 조선후기에 간행된 『묘법연화경』권5, 1531년(중종 26)간 『비로자나총귀진언()』 2점 외에 다라니는『일체제불전신사리진언범서약초다라니()』, 『즉설모다라니()』, 한글로 인쇄된 『즉셜노다라니』와 기타 부적 다라니 외 4점의 조선후기 다라니가 수습되었다"...내이버 지식백과

 

 

 

 

여유로운 답사?

언감생심

늘 바쁘다.

추사도 보았을 노송앞에서 여유로움을 가졌으면 좋았을텐데...

 

201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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