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대구...광해대왕 태실

임병기(선과) 2015. 9. 17. 07:04
300x250
300x250


 

 

 

광해대왕 태봉

흐릿한 가을날 오후, 연경동 태봉마을

며칠전 경북대에서 열린 세종대왕 자태실 학술세미나 참석 후, 대구에 있는 광해대왕의 태실을 둘러보고저 했던 기억을 되살려 길을 나섰다. 그러나 연경동 택지개발공사로 예전에 들어 갔던 입구가 막혀 있어 돌고돌아 접근했지만 여기서부터는 차량도 더이상 진입할 수 없도록 턱을 설치하였다.
 


입구에 보이는 안내문에는비의 건립시기를 1573~1619년이라고 했다.

이는 아기비에 관한 추정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를 검색해보면 1건의 기사가 등재되어 있다.

대구부사 안도의 공훈에 관한 내용으로 대구에는 광해군 태실만 남아 있어  광해군 태봉 개보수 공사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안내문은 오류가 있다.

1611년 태봉의 개보수가 있었다면 애기비와 사라진 가봉비는 그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광해 45권, 3년(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9월 30일(병인) 5번째기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대구 부사 안도(安燾)가 수토관(守土官)으로서, 태봉(胎封)을 수개(修改)할 때 비록 조금 분주하여 애를 쓴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직분상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한데, 특이하게 기릴 만한 일이 뭐가 있기에 당상의 중한 가자까지 내림으로써 상을 참람되게 베푼다는 기롱을 초래하시는 것입니까. 물정이 다들 불편하게 여기니,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안내문 옆 평이한 산길 200여미터 위. 

중동석 외의 석물을 추정되는 부재가 택지조성에 다른 매장문화재 조사로 덮개로 덮혀 있다.

가봉비와 중동석 난간석의 부재여부는 불투명하다.
 

 

아기비 석물



왕가의 태실이 하삼도 특히 경상북도에 집중한 까닭은 무엇일까?

동기감응에 다른 명당 풍수?

이미 자리잡고 있는 지방호족의 묘자리를 빼앗아 호족의 발호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
 

아직도 정설은 없다고 한다.
 

 

아기비


만력 명문

개첨석과 가봉비 귀부로 추정되는 부재 향좌측 아래에는 아기비 비편이 널부러져 있다.

비편에는 용아지씨태실(龍阿只氏胎室), 다른 비석에는 왕자경(王子慶)이란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또 다른 비편에는 만력(萬曆)’ ‘一月0日建’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역시 덮개로 덮혀 있어 전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파손이 심해 복원도 어려워 보인다.

누구의 만행이었을까?

 

그날의 만행을 기억할텐데

산하는 말이 없고 새로운 주인공을 맞이 할 터잡기에 분주하다.

 

2015.09.16


300x250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