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무열왕 때 품일 장군과 아들 화랑 관창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황산벌로 가던 중 이 곳 중갱이골에서 머물게 되었고, 품일 장군이 돌아오면서 전사한 관창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사찰을 건립하여 품관사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곳 사지에서 태평흥국太平興國(976~983년)명과 죽주竹州銘 와편이 확인되어서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의 사적은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1592년)때 소실되었고, 고종 조에 영동 현감 김재순이 전해오던 석조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해 법당을 마련하였더고 한다 석불좌상은 1932년 도난당했다. 중 1946년 9월 20일 박남파 스님과 신도들이 4칸 법당, 요사채를 창건하고 금성사라 하였다고 한다.
석탑앞 대좌. 석불 대좌로 추정되며 복련을 조식하였고 상부에 2단의 팔각 괴임이 있다. 아래 부재는 근자에 후보하였다. 대웅전 옆에도 심하게 파손된 대좌가 한 기 있다고 하나 직접 보지 못했다. 이 부재와 더불어 연화대좌 상대석과 하대석으로 추정된다. 조성시기는 나말려초로 전한다.
대웅전 삼존뷸 옆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금성사에 전해오다 도난당한 불상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상이라고 한다. 나발, 중간계주, 정상계주가 표현되었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인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변형된 우견편단, 결가부좌 이다.
사찰벽화로는 흔치 않은 그림이다.
옛날 어느 절에 덕이 높은 승려가 제자 몇 명을 가르치며 살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힘써 도를 닦았는데 유독 한 제자만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 멋대로 행동하였다. 그가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죽게 되었는데, 다음 생에서는 물고기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냥 물고기가 아니라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물고기가 되었으므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은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어대고 슬피 우는 것이었다. 스승이 물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자기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일찍 죽은 제자가 아닌가?
그리하게 되면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교훈으로 삼게 될 것이며 아울러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 그 소리를 듣고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스승은 그 부탁에 따라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을 한 목어(목탁)를 만들어 침으로써 많은 중생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
2015.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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