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영동군

영동...두평리 오층석탑

임병기(선과) 2015. 6. 1.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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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20일 청주에 사는 님들과 영동 답사 동선에 두평리 석탑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날 내린 눈으로 기도원 옆 소로를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었다.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시간이 벌써  8년이 지났다.

 

 

자풍서당

조선 정종∼태종 재위시(1398∼1418)에 설립한 서당으로  남수문 이충범 김문기 박수홍 전팽령 등을 배출하였다고 한다.처음에는 풍곡당豊谷堂이었으나  광해군 6년(1614)에 한강 정구가 이곳에 자법정풍資法正風으로 강학을 장려한다는 의미로 자풍서당으로 바꾸었다. 인조 4년(1626)과 현종 5년(1664), 숙종 18년(1692)에 중수를 하였으며, 1974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도 지역의 18문중에서  음력 10월 19일을 제를 올린다고 한다. 정면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에 넓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이곳의 유생들이 글 읽는 소리를 양산8경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오층탑은 자풍서당 중정에 자리하고 잇다. 이곳은 풍곡사지豊谷寺址로 전해지고 있으나 사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매몰되어 있던 석탑재를 몇 차례에 걸쳐 발굴하였다. 현재 부재는  옥개석 5매, 탑신석 1매, 노반석 1매 이다. 옥개석 받침은 전층 4단이며, 낙수면 물매는 깊지않다.상면에는 초층 2단, 윗층  1단의 탑신괴임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1개의 풍탁공이 있다. 4층 탑신석 일부 시멘트로 보수하였고 우주 탱주는 새기지 않았다.상륜은 노반만 남아 있으며 상부에는 풍탁공이 있다고 한다.석탑의 조성시기는 고려전기로 추정된다.

 

 

 

 

 

 

4단 옥개 받침. 시멘트로 보수한 4층 탑신석

 

 

탑신괴임은 1층 옥개석 상부 2단이며 위층은 1단이다.

 

 

 

 

자풍서당 이름을 지은 한강 정구 선생은 내고향 성주 출신으로 생가, 묘소, 회연서원에 관한 글은 이미 올렸다. 하지만 한강 선생이 왜 이곳 영동에 머물렀는지에 관한 내용은 찾지 못했다. 그 단초를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광해 72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11월 10일(갑자) 2번째기사)에서 찾았다. 즉 계축옥사에 대한 상소를 가지고 한양으로 향하다가 이곳 영동에서 병환으로 머문 듯 하다.하지만  자법정풍資法正風의 의미는 숙제로 남아 있다.

 

"전 참판 정구(鄭逑)영남에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요즈음의 일을 논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구가 변란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정에 달려가다가 영동현(永同縣)에 이르러 병으로 실정을 알리는 소를 올리고, 교지를 받고 돌아갔는데, 출발할 때 별도로 차자 하나를 갖추어 올렸다."

 

변란은 1614년 계축 옥사를 뜻한다.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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