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영동군

[스크랩] 영동...천태산 영국사

임병기(선과) 2008. 6. 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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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에 위치한 영국사는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라 문무왕, 진평왕 때라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고 국청사라 하고 산이름도 천태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후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하하던 공민왕이 국청사에 들러 국가의 안녕을 빌었다고 하여 영국사(寧國寺)로 하였다. 행정구역상의 지명인 누교리도 왕의 영국사 출입을 도우기 위하여 칡넝쿨로 다리(橋)를 매달아서(紐) 유래하였다고 한다.

 

금강을 끼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양산면 일원은 빼어난 절경으로 양산 팔경이 전해오며 영국사는 그중에서도 제 1경이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전사한 무열왕의 사위 김흠운을 애도한 양산가의 무대이기도 하다.

 

신라 사람이 애절하게 불렀던 정확한 양산가는 전해오지 않지만 조선조 성리학자 김종직이  남긴 양산가 가사는 객관성을 잃고 다분히 승리자의 색채가 강해 보인다.

 

도야지 같은 원수의 나라 나의 조국을 침노하나뇨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나라 위한 충정 어이 참으리 
창을 매고 내 집을 밀리 떠나와 풍참노숙 싸움터로다. 
무찌르던 어느 날 밤 놈들 칼날에 장하도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네 
돌이켜 바라보니 양산의 구름 타오르는 불기둥 살벌하고나
오호라 슬프다 우리 대장부 북쪽 원수 칼 끝에 쓰러지다니
천추에 빛나는 호국의 영령 길이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2005년 강한 바람을 타고 천태산을 삼키려는 듯한 화마를 티비 화면을 통해 지켜보면서 가슴 졸였던 기억이 새롭다.몇일 지난후 현장을 방문했던 기자가 올린 기사의 제목 "영국사야. 살아 있어 반갑다"에 느꼈던 가슴 찡한 감정을 되새기며 어둠이 쫓아오는 눈 쌓인 산길을 올라갔다.


 

이 길은 신라 김흠운 장군,백제 군사, 공민왕, 이름없는 초동급부도도 오르락내리락 했을 것이니 한시절 왕의 사위를 그리며 노래했던 사대부가의 양산가 보다는 양산지방에 입으로 전해오는 민요 양산가를 흥얼거리고 싶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세.
난들 가서 배 잡아 타고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양산 창포장에 잉어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금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장게가 논다 장게가 논다.
양산 수풀속에 무구리 장게가 논다.

 

발 뒷굼치까지 근접한 어둠이이지만 겨울을 품고 있는 장대한 폭포앞에서 한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다.  동장군이 무색하게도 맨들맨들한 바위면이 마치 겨울날 반소매를 입은 여인을 보는 듯 하다.

 

잠시후 계곡의 어둠은 사라지고 하루의 마지막 햇볕을 듬뿍 즐기고 있는 영국사가 멀리서 웃음 짓는다. 영국사 영욕의 세월을 지켜본 500년 넘은 은행은 눈 내린 겨울산사 주위풍광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어른 여러 명이 손을 맞잡아야 될 만큼 굵으며 국가의 큰 난이 발생하면 소리내어 울고, 아직도 이 년마다 많은 자식을 낳고 있다니 생명력, 종족 보존 능력에 경외심을 느낀다.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룬 결과겠지만 내눈에는 은행나무에 둘러쳐진 금줄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갖추지 못한 산골 절집이기에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려는 소박한 스님들의 심성이 금줄로 표현된 것은 아닌런지?


 

최근에 단장한 만세루를 누하진입하여 대웅전에서 바라본 중정이다.

산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햇볕을 넉넉하게 쬐고 있는 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작년에 복원한 대웅전은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어칸을 활짝 열고 예불을 준비하든 스님이 땀에 젖은 나를 보고 "처사님 들어오셔서 쉬어 가세요"라고 했지만 산아래 주자창에 홀로 남겨둔 동행인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쉼은 사치겠지.


 

대웅전 뒤 옛절터에서 옮겨온 삼층탑으로 대웅전 과 일직선상이 아니다. 이런 이유는 풍수적 이유, 화재등으로 인한 금당터 이건 등 여러설이 있지만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1층 몸돌의 문비, 하층기단 면석의 안상, 상기단 면석 전체를 차지한  큼직한 안상이 독특하지만 특이점은 없는 신라 하대의 일반적 유형이다.


 

4개 옥개석 받침, 기단 갑석은 소리없이 기울어져 있고, 1층 몸돌 물쇠와 문고리가 선명히 돋을 새김되었다. 옥개석 경사는 완만하며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올려진 모습이며 풍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일부 자료에는 상기단 면석이 잘못 복원되었다고 하였으나 반풍수 눈에는 오밤중이다. 혹 현재의 안상은 바로 잡은 모습인가?


 

어둠은 코밑까지 드리우고 있는데 팔각 원당형의  원각국사 부도는 커녕 공사로 다른 한 기의 부도도 찾을 길 없이 원각국사비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석종형 부도에 만족했다.  탑몸돌 위에는 상륜부에는 흔치 않은 형식의 보주가 있다.

 

 

하대석, 상대석 앙련 복련은 한 잎의 연꽃으로 새겨 고려하대 부도 유형을 간직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현재 대웅전 뒤 영국사 본래 절터다.

밭으로 용도변경 되었지만 석축은 옛 자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앉아있다.

 

 

원각국사 비석 귀부이다. 꼿꼿한 목에 힘줄이 강건한 인상이나 무거운  모습의 고려 귀부의 전형이다.

등에는 육각 귀갑문을 표현했으며 비좌에는 덩굴문이 남아 있다.

원각국사가 왕사임에도 귀갑에 王자를 새기지 않은 연유를 모르겠다.


 

"비석은 고려 의종 7년(1154)에 선사가 되었고, 명종 1년(1171) 9월 12일 왕사가 된 원각국사비 이다.
원각국사는 대선사 교웅의 밑에 들어가 아홉 살에 중이 되었다.

선사의 유골은 영국사에 모셔졌으며, 고려 명종 10년(1180) 한문준이 비문을 지어 원각국사비를 건립하였다고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권에 그 전문이 소개되고 있다. 비몸돌(碑身)은 점판암 1장으로 되었으며, 비문은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그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다."...문화재청

 

귀부 뒤에 방치(?)된 이수이다. 네마리 용이 구름을 타고 있는 이수 중앙에 원각국사 전액을 넣었다.


 

내려오는 길에 오른 망탑봉 흔들바위로 크기가 6m, 높이 8m, 무게는 10여톤이라고 한다. 마치 고래가 입을 벌리고 헤엄을 치며 바다 위를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혼자서 흔들어도 움직여서 흔들바위라고도 한다.



 

망탑봉 삼층 탑을 만나러 왔건만 오늘은 인연이 아닌가 보다.

 

다시 뵈로 오겠습니다. ()()()

 

2007.01.2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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