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보은군

보은...보은사 석불입상

임병기(선과) 2015. 5. 2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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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사. 보은읍 삼년산성 북문지 안쪽에 자리한 사찰로 1902년 박경하 스님이 창건하였다.예전에는 불상을 모신 측면 한 칸은 늘 개방되어 있었지만 석불입상은 시건장치로 인해 뵙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었다. 오늘도 확신이 없었는데 새롭게 불사한 미륵전이 보여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석불입상은 일제강점기 보은읍 대야리 미륵댕이에서 모셔왔다고 전하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목과 허리부분이 훼손되어 3 곳을 접합하였으며 목 부분을 후보하였다(본래의 상호로도 여겨지지만 불분명하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고 법의는 통견이다. 습의가 양팔에 드리워져 있으며 군의는 물결을 이루며 발까지 흘러 내렸다. 불전 때문에 보호각 밖에서는 발을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수인은 전법륜인으로 보인다.

 

 

 

 

 

 

201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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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서문지

 

삼년산성의 정문(正門)은 현재 문터를 남기고 있는 서문(西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문의 기초를 이루는 초석을 일부 묻어 놓아 잘 볼 수 없으나, 가장 훌륭한 문틀이 남아 있다.서문은 유구(遺構)에서 볼 수 있듯이 전후(前後) 2차에 걸친 구축(構築)이 있었다. 맨 처음 만든 상대(上代)에 그랬듯이, 수축하면서 다시 만든 하대(下代)에도 서문은 정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현재도 서문은 전체 성벽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를 횡단하여 성벽이 통과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외부로의 출입이 가장 편한 곳이다. 성문 밖에서 바라보면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려다 보이지 않는다. 계곡의 중앙에서 왼쪽(北側)으로 약간 비켜있기 때문이지만, 문터 바로 앞까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능선이 급하게 내려와 있기 때문에 살짝 가려져 있고, 성문이 지세에 따라 약간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기 때문이다.

성에서 정문의 방향은 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성의 서쪽이 가장 적합하다. 서쪽 보청천 유역에 보다 많은 사람이 살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삼년산성은 전략적으로 전투와 보급을 맡는 치중(輜重)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치르는 일이지만, 치중의 경우 다른 의미가 있다. 최전방에 있는 산성에 무기나 식량을 다량 보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년산성의 경우 성이 견고하기 때문에 두 기능이 모두 가능하였던 모양이다.그렇다면 많은 물자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고, 산성의 문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게 한 주된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맨 먼저 만들어진 서문은 상대(上代) 문터라 하며 문지방 돌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니던 자국이 남아 있다. 그것도 수레바퀴의 양쪽 바퀴 사이 너비가 1.66m나 되어 폭이 넓은 큰 수레가 지나다녔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삼년산성에 치중의 임무가 없었다면 그렇게 큰 수레가 통행하였을 까닭이 없다. 산성에 이처럼 큰 수레까지 다니던 문을 만든 것은 이곳 삼년산성의 서문이 유일한 것이다.이 서문으로 드나들던 수레 가운데는 왕(王)이 행차할 때 타던 수레가 넘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백제를 통합하는 전쟁을 진두지휘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왕들은 수레를 타고 주위에 무장한 군인을 비롯하여 많은 시종들이 호위하였다. 그러한 그림이 고구려의 무덤 속에 그려진 벽화에 여럿 남아 있다. 고구려의 평양 장안성(長安城)의 터전에서 발견된 고구려시대의 성문에서도 수레바퀴의 홈인 궤도(軌道)가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수레바퀴 사이의 너비가 1.5m였다. 신라의 수레가 보다 넓었던 모양이다.

신라가 수도인 금성(金城, 지금 경주)에서 수레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은 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수레의 실물 미니어쳐가 남아 있어 알 수 있고, 대구의 시지 지구의 조사에서도 수레의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유구가 있었다. 신라의 호화로운 수레가 삼년산성 서문을 드나들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서문의 좌우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각각 곡성(曲城)이 있다. 문의 북쪽은 약 71m 남쪽은 약 100m정도 떨어져 있다. 두 개의 곡성은 문을 향하여 접근하는 적을 망보아 계곡으로 몰려든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알맞은 위치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성문의 적대(敵臺)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곡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높이는 성문보다 약 30m 정도 높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양쪽의 곡성은 서문을 수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남쪽 곡성과 북쪽 곡성을 연결한 선으로부터 성문까지의 거리는 약 50m가 된다. 성문의 위치가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서 양쪽 곡성의 보호를 받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외부의 적이 침범하는데 일차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이 이곳의 곡성이라 하겠다.

 

 

물론 이차적으로 성문 자체의 튼튼함이 있어야 하겠는데, 위치적인 측면에서 한 번 더 살펴보면, 바깥에서 설령 문을 통과하여도 서벽 안쪽이고 문의 바로 안쪽에 연못(아미지)이 있어서 성안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없다.성문을 통과한 적병은 일단 연못과 부딪치게 된다. 성문을 부순 여세를 몰아 일거에 성내로 진입하려는 적병은 여기에서 일단 저지되며, 주위에 매복한 군사에 의하여 공격하게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평지에 쌓는 성에는 성벽 바깥에 도랑을 파 돌린 해자(垓子)가 있다. 해자는 성문 밖에 설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더욱이 산성의 경우는 해자를 마련하기 어렵다. 따라서 산성의 문 안쪽에 해자를 설치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며, 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제일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문은 삼중(三重)의 방비가 될 수 있으며, 출입이 편한 가장 낮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멀리 밖에서는 문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게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안목과 지견을 갖춘 솜씨라 하겠다.성벽의 두께가 매우 넓다. 실측에 따르면 약 12m 정도이다. 이렇게 넓은 성벽에 연접되는 문은 어떻게 구성해야 되었을 것인가. 성문이 오목하게 들어와 있고 양쪽에 곡성이 있는 모양 자체가 호구(虎口, 문의 문구부에 공간을 둔 것이며, 군사용어이다. 지금은 바둑에서 흔히 사용하지만 본디 성곽에서 나온 말이다)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1차적인 방어 계획이다.

상대 문의 초석과 문지방 돌의 구성으로 보면 문짝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있다. 세상에 성문이 밖으로 열리게 만든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성문은 보통 안쪽으로 열었다가 바깥을 향하여 닫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그런데 삼년산성의 서문은 처음 문이 밖으로 열리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문을 구성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구조상 합리적이 될 것인가.문 초석의 존재로 육축(陸築, 성문으로 통행하는 부분 나머지를 축조한 벽)하고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를 여는 그런 성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목재를 위주로 하는 구조의 성문이었다. 이런 성문의 성벽이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아직도 의문이다.앞으로 이 서문의 구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내어야 한다.

현재도 그렇지만 성문 바로 바깥은 낭떠러지이다. 옛날도 마찬가지였었다고 밝혀졌다. 성문 앞에도 여유 있는 광장이 없다.
발굴과 조사에 따르면 문의 밖으로 박석(薄石, 얇은 돌, 널 판 모양의 돌을 까는 것)을 깐 통로가 있었는데, 지금 성벽이 있는 외측 벽면에 이르면 이 통로도 낭떠러지가 된다. 길은 여기에서 꺾이어 성벽의 바깥 밑으로 해서 계곡을 건너 산기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길과는 반대 방향의 기슭으로 길이 있었다.

서문의 안쪽은 바로 연못이다. 이 연못은 연못으로서의 기능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해자의 구실도 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해자가 성문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까지 접근되어 있었다. 문지방 턱을 넘어서면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안쪽으로는 높아지고, 그 끝에 석축이 있어 연못 벽이 된다. 이런 구성 때문에 문짝이 안쪽으로 열릴 수 없었다. 밖으로 여는 쪽이 오히려 구조상 합리적이었다.성문이 밖으로 열리는 구조는 또 다른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인다.

문보다 좌우의 성벽은 바깥쪽으로 내밀어 있으므로, 문은 골목 안에 위치하는 듯이 호구(虎口)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밖으로 열린 문짝은 이 벽체에 의지하게 되어서 문으로 수레들이 드나들어도 거추장스러울 까닭이 없다.

밖으로 열리는 성문은 성안의 군사들이 갑자기 출동할 때 편리하다. 안쪽으로 열릴 때는 문이 열리도록 물러섰다가 전진하는 만큼의 시간이 단축된다.성문에 접근한 적을 기습한다면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다.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수레에 뿔처럼 앞에 댄 것으로 성벽을 무너트리는 도구) 등이 동원되었다고 가정하면, 밖으로 열리는 문짝은 상하와 좌우가 문틀에 지탱되어서 안쪽으로 여는 형태의 문짝이 빗장에만 의지하는 것 보다 월등히 견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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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짝이 밖으로 열린다는 것은 그러나 차츰 문제가 있게 되었다. 적군이 만약 문에 바싹 다가와 문짝을 지탱하는 문설주를 찍어 문을 부수기가 쉽다.문을 닫고 가로지른 빗장 대목(帶木)도 안쪽에 시설되었을 것이므로 문짝 자체의 견고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문짝이 안으로 열도록 바꾼 것을 보면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문의 밖을 비워서 남겨두지 않고, 거기를 낭떠러지로 만든 것은 공성구(攻城具)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더구나 산기슭으로 나있던 도로가 성벽에 이어지면서 성벽 아래를 지나야만 문에 이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공격군이 이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방어군이 성벽 위에서 지키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설혹 약간의 결함이나 약점이 있었다 해도 문의 방어에는 지장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원거리에서의 화공(火攻)도 큰 효과가 없다. 계곡 아래서는 성문이 올려다 보이지 않는다. 앞을 산세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성문을 공격할 수 있을 자리까지 접근하면 방어군의 사정(射程) 거리 안에 들어서게 되어서 매우 불리하다.
성문이 두꺼운 성벽 안쪽에 위치하게 하려는 배려는 공격을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안이 되었기 때문이다.상대 성문초석의 구조로 보아 문의 양쪽으로는 커다란 네모기둥이 세워졌었다고 보여진다. 네모난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을 지어 서있었다.

 

 

북문지

 

북문은 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북문도 북쪽 성벽의 가장 낮은 위치에 만들었다. 보은사(報恩寺) 북편으로 올라 잘록한 부분인데 바깥은 풍취리이다. 길다란 계곡을 올라온 곳으로 잘록한 곳을 그냥 통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문 밖에 이중으로 성벽을 쌓아 이 벽을 돌아 올라서야 문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적이 바깥 차단벽 앞에 다다르면 이 차단벽에서 공격할 수 있고, 이곳을 돌파하려고 돌아 오르는 위치는 성벽 위에서 공격이 가능하다.


북문의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도 잘록한 부분이 있다. 이곳에 작은 문을 만든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만약 작은 문이 있었다면 암문(暗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통행하는 문)이었을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와 북문으로 접근한 적을 살며시 나아가 공격할 수 있도록 구상된 것일 것이다.

 

남문은 더욱 묘한 이치를 살려 만들었다. 남문은 서문에서 벽을 따라 남쪽으로 나가 끝에 있으며, 안에서 보면 잘록한 부분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서남 모서리에 곡성의 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남쪽 성벽의 서쪽 끝에다가 문을 만들었다 역시 남쪽 성벽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만들었으나, 다른 문과 달리 현문(懸門)을 만들었다. 현문이란 사다리나 줄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가장 뛰어난 방어력을 가지는 성문이다.

바깥에서 보면 성벽을 한참 쌓아 올린 위에다 凹자 모양으로 문 길을 만들었다. 문으로 들어가려면 길다란 사다리를 걸쳐야 되는데, 산비탈에 있으므로 사다리는 매우 길어야 된다. 사다리가 길다보면 그 무게 때문에 들어서 성문에 걸쳐놓기도 어렵다. 또 긴 사다리는 가운데가 늘어져 부러지기 쉽고 흔들려 기어오르기도 어렵다. 삼년산성의 남문은 이러한 양식의 성문을 만들었으나, 그 후 어느 시기인지 모르게 이 성문을 메워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남문이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삼년산성과 관련된 역사 몇 편

 

1.도도가 백제성왕의 목을 베다.

서기 554년 7월에 백제의 대군을 맞아 옥천 지역에서 싸움이 벌어지자 신라군은 형세가 불리하여 졌다.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신라와 백제는 온 국력을 동원하여 국가 존망의 운명을 걸고 싸워야 하였다. 몇 해 전까지 고구려에 대항하여 친구 사이가 되어 힘을 합하여 싸우던 전우(戰友)의 가슴에 서로 창을 겨누고 칼로 목을 베어야 하였다.

신라군은 상주(上州, 尙州 지역과 그 인근)에서 온 군대가 동원되어 막고 있었으나, 형세가 불리하여지자 한강 유역에 새로 설치한 신주(新州)의 군대를 투입하여야 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은 주 내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드디어 승리를 눈앞에 둔 듯한 백제군과 응원군이 도착하여 사기가 다시 높아진 신라군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김무력의 휘하에 비장(裨將)으로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신라 외관 제 3등급의 벼슬 이름) 관등을 가진 도도(都刀)는 백제군을 급히 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게 되었다. 이 때 신라군은 이긴 기운을 타고 크게 백제군을 이겨, 백제의 최고 관등인 좌평(佐平) 4명과 사졸 29,600명을 목베어 말 한 필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참패를 안겨주었다.



2.김헌창의 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청주에 서원경이 설치되면서부터 삼년산성은 신라 서북지방의 요충이자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위치를 청주방면으로 내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고려 초기까지 삼년산성은 여전히 관방상 중요성을 가진 곳으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 14년(822) 3월에는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 김헌창(金憲昌)이 그의 부친 김주원(金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이 때에 삼년산성도 격전의 와중 속에 휘말리게 된다.  앞 책,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3월 18일.
 
김헌창은 신라 정부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여 세 규합에 나섰다. 김헌창이 거느린 반란군은 자신의 부임지인 웅천주(공주)를 거점으로 하여 신라의 9주 5소경 중에서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및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을 비롯한 전국 아홉 개의 주 가운데 다섯 개의 주(州)와, 다섯 개의 소경 가운데 세 개의 소경을 장악함에 따라 김헌창의 반란은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신라 정부는 장웅(張雄).위공(衛恭).제륭(悌隆) 등으로 구성된 반란 진압군을 편성하여 대처하고 나섰다. 장웅의 선발부대는 도동현(道冬峴, 영천)에서 처음으로 반군과 접전을 벌여 이를 격파하였고, 조금 후에 도착한 위공과 제륭의 본대와 합류한 후 상주와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반란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여세를 몰아 속리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반군의 예봉(銳鋒)을 꺾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신라 정부군은 여러 군과 합세하여 김헌창의 본거지인 웅진성(공주)을 공격하니, 김헌창은 하는 수 없이 자살함으로써 이 반란은 마침내 진압되고 말았다.삼년산성 전투에서 김헌창은 이 성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속리산의 험한 곳으로 피하였다가 패하고 말았다. 삼년성이 함락되어 중앙 정부군이 장악한 것이 김헌창 반란군에게 큰 타격을 줄 정도로
양군간의 전세 결정에 분수령이 된 셈이다.


 

3.왕건의 패전

한편 삼년산성이 가진 군사적인 첨병기지로서의 역할은 고려시대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이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날 정도로 후삼국시대에도 고려와 후백제간의 중요한 쟁패 지역이었다. 후삼국시대에 고려 군과 후백제 군과의 대결장은 크게 보은?회인?문의?청주?괴산?충주로 연결되는 중서부 전선과, 상주.대구.합천 등지의 동부전선 두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중서부 전선은 서남 지방을 장악한 후백제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교통 상으로나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서부 일대의 호족들은 고려와 후백제 세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의 향배(向背)를 바꾸기 일쑤였다. 따라서 두 나라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928년까지만 해도 고려 측의 전세는 925년 10월에 벌어진 연산진(燕山鎭, 문의) 전투를 제외하고, 삼년산성.청주.죽령 일대에서 매우 불리한 형편이었다.928년 7월 왕건이 이끄는 고려 군이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곧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11년 추7월 병진.


 이에 후백제 군은 삼년산성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청주까지 쳐들어 왔다. 위급한 상황에 빠진 고려 군은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으나, 마침 탕정성(蕩井城, 온양)에 주둔하고 있던 유금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후백제 군을 청주에서 격퇴시킬 수 있었다.

유금필 군대는 청주에서 3천여 명의 후백제 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독기진(禿岐鎭)까지 후백제 군을 추격하여 3백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삼년산성에서 수습되는 유물 가운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것이 매우 많다. 고려 태조 11년(928), 즉 신라 경순왕 2년에 태조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군장동의 태조가 진을 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남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 삼년산성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싸운 군사가 누구의 휘하인지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후백제 견훤(甄萱)의 군사이었음에 틀림이 없다.견훤은 본래 상주의 가은(加恩) 사람으로, 왕건과의 많은 싸움이 대부분 상주 부근인 문경(聞慶).안동(安東).대구(大邱) 등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상주 부근의 지리에 밝은 견훤으로서는 삼년산성의 중요함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쇠약해진 신라의 영향권 밖에 있는 삼년산성을 쉽게 장악하여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후로부터 삼년산성의 존재 가치는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4. 국경선에 위치하였을 때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은 이미 끝나고 지역을 지키는 하나의 산성으로, 또는 군창으로 그 모습이 바뀌고 말았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삼년산성에 군창이 있어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이 험조(險阻)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높고 험한 산성이 역시 고려시대에 이어서 계속 사용되어 왔으며, 성의 견고함을 이용하여 특히 군창(軍倉)을 두어 중요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까지는 이 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종실록』에 의하며 우승지(右承旨) 조위(曹偉)가 삼년성을 이야기하면서 유사시 피난처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成宗實錄卷271 成宗 23年 十一月

 성종 23년(14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백 년 전으로 평화롭게 지내던 때이다.이때 삼년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일단 유사시 사용할 수 있음을 주장한 것과, 삼년성이 험하고 완고함을 그 이유로 설명하고 있음은, 그때까지도 삼년산성은 지금과 같이 많이 무너지지 않고 있어서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선조(宣祖) 30년(1597)에 충청 병사(兵使, 兵馬節度使를 줄여 부르는 명칭) 이시언(李時言)은 삼년성을 지키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宣祖實錄? 卷84 宣祖 30年 丁酉 正月삼년성은 곡식을 모으기 쉽고 황간(黃澗)과 영동(永同)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삼년성을 지키면 왜적의 통행로를 막아서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즉 왜적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를 미리 지키고 싶다는 것은 삼년산성이 교통의 요충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견고한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용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와 같이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에 축조되어 10세기 전반 후삼국 쟁패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주도권을 다투기 위한 요충으로서 널리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삼년산성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7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호서승람]에서 무너진 곳이 21곳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후 삼년산성은 돌이끼가 낀 채로 점차 무너지고 흙에 덮여 제 모습을 보기는 어렵게 되어왔다.

 

보은사.

 

본래는 삼년산성 답사 보다는 도유형문화재 312호 보은사의 석불입상을 뵙기 위해서였다. 성안에 위치한 보은사는 좌측 열린 법당만 공개되어 있고 요사는 닫혀 있었다. 석불입상이 있다는 문화재설명문이 보이지 않아 과연 불상이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보은 보은사 석조여래입상

보은사 석불입상...문화재청

 

*** 삼년산성 글은 보은문화원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1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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