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보령시

보령...성주사지

임병기(선과) 2014. 12. 2.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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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글을 찾아보니 마지막으로 다녀온 날이 2004.04.19 이다.

그날 보령에 거주하시는 우리카페 최고 어르신(저의 어머니와 연세가 같아 이모님으로 호칭하는 분이다)과 동행했었다.. 최근까지도 성주사지에서 해설사로 근무하신 분으로 이번에 연락을 드렸더니 서울가는 중이이서 뵙지 못했다.

 

예전 답사기에 오류도 보이지만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올린다.

물론 그때는 사진을 찍지 않았으며 올린 사진은 2014년 10.26일 촬영하였다.

 

보령/성주사지...무영탑 이모님과 동행

 

사람에 따라 문화재의 이해,시각이 다르겠지만 누가 뭐래도 폐사지의 느낌,분위기는 해질무렵이라고 생각하여 오늘 일정의 대미를 성주사지로 동선을 계획했다. 하지만  흐린 날씨 탓에 구름에 자리를 내준 석양은 볼 수 없어도 무영탑 이모님과 동행은 저녁노을 보다 더 아름다운 서경임에 분명하지 않은가?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성주사지도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한 사찰로 무염국사의 성주산문 이다. 구산선문은 

중국 유학파 스님들이 귀국 후 신라의 제도권에 편입되지 못하고 서라벌 변방의 백제, 고구려 영토에서 선종이라는 새로운 학파로 무장하여
수행하고 득도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쇼킹한 가르침으로 무장한 선종사찰을 의미한다.

성주사라는 사찰명도 성인, 즉 무염국사가 주석하던 절이라는데서 유래되었으니 사적을 뒤지지 않아도 한 시절의 영화를 가름할 수 있다.  보령 역시 신라하대에 왕권의 권위가 무너지고, 중앙의 통치력이 레임덕에 빠질즈음 지방호족인 "김양"의 재정적 지원이 지대했다는 것도 구산선문 사찰로 일문을 이룰 수 있었다는 공통적 현상이다.

구산선문의 배경, 부도의 조성,철불(실제로 금당터에는 일제 강점기 까지 철불이 있었다고 한다), 이형석탑 등 일반적 패러다임을 무영탑님에게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제서야 웃으시며 성주사지에 문화유산 해설사로 계신다는 말씀을 하셔서 부끄러움에 부드러운 성주산이 각진 암산으로 다가오는 느낌 지울 수 없더라.

금당의 석등, 오층석탑도 통일신라 하대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석탑의 특징인 1층 몸돌의 방형의 받침이 있어 모호한 시대의 분류를 다시 확인했지만 내눈엔 회랑터로 짐작 되는 주추의 흔적에 눈이 더 오래 머물더라. 회랑이 있다는 것은 대가람이었다는 사실보다 왕실과 연관짓는 단초로도 볼 수 있다. 

 

 

백제시대 오합사와 관련하여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 년에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 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삼국 사이 의 치열했던 정복 전쟁으로 솟구쳤던 백성의 원망을 달래 보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던 듯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오합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불우한 이야기를 간직한 절이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를 돌며 울다가 며칠 만 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의자왕 19년 오합사에 큰 붉은 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고 씌어 있다. 이미 1960년에도 간간이 나오는 백제 기와조각들 때문에 오합사로 추정되어 왔으며 본격적인 발굴에서는 백제 시대 기와  조각들이 더욱 많이 출토되었다.

영남 지방의 산지형 폐사지와 달리 넓은 대지위에 주위를 둘러싼 낮은 돌담이 주는 분위기는 낯설어 보이며,황량하다는,처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까닭을 찾아 볼 수록 감이 무딘나에게는 보고도 느낄 수 없는 그야말로 화중지병에 불과하니...

심하게 멸실된 석불을 둘러 성주사지에서 가장 미스테리로 알려진 나란히 선 3기의 석탑앞에서 여러 설--중앙의 탑은 부도탑이다, 또한 1974년에 밝혀진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이 세 탑이 정광, 약사, 가섭 세 여래의 사리탑이라고 적혀 있다.--을 되짚어 보지만 어찌 내가 알겠냐만은, 혹 구산선문 사찰 특징의 하나인 이형석탑과 대비하여 생각해보면 기존의 일금당 일탑,일금당 쌍탑의 형식에서 벗어난 문화적 발로로 3기의 석탑을 조성하지는 않았을까?

구산선문의 도입과 더불어 보이는 부도와 부도탑이 전각속에 보호된 채로 있으니 산문의 개산조인 낭혜화상의 부도비다.
이지역 특산인 검은 남포 오석으로 조성된 화려한 비에는 명문이 있어 여타의 부도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그 시절의 사회적 상황과,성주사의 사적을 추론해 볼수 있는 보물이다. 또한 신라 최치원의 사산비문의 하나로 알려진 명문이라 이해는 못 하지만 더욱 새로운 느낌으로 답사객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제 하루를 마감해야할 시점인데, 무영탑님은 먼길을 달려온 나에게 저녁을 사주시겟다며 대천읍내 일식집으로 안내하신다.  음식을 먹으며 그간의 이야기와 오늘의 이야기를 정겨웁게 이끌어 가신다. 젊은 내가 부끄로울 정도로, 고문은 물론 신간 소설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폭을 넓히시며박학한 면모를 소리없이 발하시어 긴 시간이 이 순간에는  정지된 듯 하다.

또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 대천의 콘도에 도착했지만 긴 여정의 피로감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무영탑님이 싸주신 안주와 쇠주가 어우러진 맛 보다도  사람의 정, 단지 사이버에서 만났음에도  정을 나누어 주신 무영탑 이모님의  고귀한 정 때문임에 분명하리라...

무영탑 이모님께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200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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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당지 앞 오층탑. 석등

 

 

 

 

 

 

 

금당터

 

 

금당터 소맷돌

 

 

금당터 석불대좌

 

 

금당 뒤편 석탑 3기(안내문에는 부도탑으로로 명기되어 있다)

 

중앙탑

 

 

동탑

 

 

 

서탑

 

 

 

강당지

 

 

석불입상

 

 

 

 

낭혜화상비

 

 

 

 

 

 

 

사적비 터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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