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철원군

철원...동송읍 마애불상

임병기(선과) 2014. 9. 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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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군 동송읍. 철원은 접적지역이며 민통선이 지근이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은  긴장되고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지자체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들린 동송읍의 분위기는 대구의 밤거리 보다 더 활력이 넘치고 민통선 접경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숙박 시설이 아주 럭셔리한(리모컨을 자유자재로 컨터롤 할 수 없다는 자조적인 표현?) 모텔에서 숙면을 취하고 새벽 일찍 금학산을 향했다.

 

 

동송초교 방향으로 운전을 하며, 새벽운동 중인 어르신에게 마애불을 여쭈었더니 가장 짧은 길을 안내해준다며 차에 오르셨다. 당신께서는 육군 원사로 전역 후 고향으로 귀향하지 않고 철원에서 자리 잡았다며 이렇게 환경이 좋은 곳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철원 사랑이 대단하다. 운동시설과 약수터가 있는 장소에서 편도 20분이면 마애불에 이른다.

 

 

사적이 전하지 않은 절터의 금학산 등산로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불두를 별석으로 올리고 큰 바위에 불신을 선각하였다. 약간 뒤쪽으로 기울어져 눈비에 노출된 상태이다. 직접 주변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불상을 새긴 장인들이 절대 저 상태로 봉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보호각이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애불 자료를 검색중에 철원에 거주하시는 분의 블로그에 흥미진진한 글이 있어 옮겨온다.

 

글 출처:철원사람 박건국(http://blog.naver.com/owoo3015/120066255764)

 

"철원 금학산과 궁예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풍수에 능했던 도선은 “금학산을 진산으로 도읍을 정하면 국운이 300년에 이를 것이나 고암산을 진산으로 도읍을 정하면

국운이 3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고 예언했다. 그러나 궁예는 고암산을 진산으로 선택했다. 결국 예언처럼 궁예는 나라를 세우고 26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궁예가 고암산을 선택하자 금학산은 사흘밤낮을 울었으며, 그 후로 금학산에서 나는 취나물은 써서 먹지 못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금학산 속에 있는 마애불상이다. 마애불상은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안내판에 따르면 건립 연대를 통일신라 말에서 후삼국시대로 명시하고 있다. 궁예가 철원에서 활약하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마애불상이 있는 산을 수 십대에 걸쳐 소유하고 있는 종가에 따르면 금학산의 마애불상은 대대로 미륵불로 모시며 섬겨왔다고 한다. 마애불상속 부처의 모습이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불이라면 금학산에 얽힌 궁예의 설화와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했던 궁예의 미륵사상 그리고 마애불상 간에는 특별한 연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금학산은 해발 947m를 자랑하며 철원평야 위에 우뚝 서있어 더욱 크게 느껴지는 철원군을 대표하는 산이다. 구글에서 바라본 금학산 사진을 보면 커다란 학이 힘찬 날개 짓으로 비상하는 모습을 닮아 그 이름도 금학(金鶴)산으로 붙여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사진에 표시된 진등과 (구)백마탑 고개가 학의 두 다리가 되면서 두 다리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 바로 긴발리라 불리고 있어 금학산과 학의 관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긴발리는 한자로 이장족 마을로 표기되었고 현재 철원군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있는 이평(二坪) 리의 ‘이’자는 이장족 마을의 ‘이’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래 사진에 표시된 마애불상이 있는 곳은 금학산을 학으로 보았을 때 몸통의 끝자락으로 바로 알을 낳는 생식기 부근에 해당되기에 풍수를 알지 못하는 누구라도 마애불상이 있는자리가 금학산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실리를 선택한 궁예

 

궁예대왕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처음부터 쇠벌에 도읍을 정하고자 한 것은 오리산을 중심으로 광대하게 펼쳐진 평강고원과 철원평야를 기반으로 백성들을 배불리고 중국대륙을 도모하여 대동방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지태를 비롯한 신하들이 도선의 예언을 들먹이며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해야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궁예는 몇 백번을 생각해보아도 태봉국의 도읍은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궁예가 마음에 두고 있는 궁예도성 터는 어떠한가? 궁터 주변에는 지평선을 바라볼 만큼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고 사시사철 땅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여기저기 산재하여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도선이 아무리 뛰어난 예언가라 해도 금학산을 진산으로 도읍을 정하는 것은 실리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궁예는 대동방국을 건설하고자하는 원대한 꿈을 가지는 일국의 황제가 풍수쟁이가 하는 말에 놀아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금학산 마애불상의 탄생 

 

그러나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니 금학산이 사흘 밤낮을 울었으며, 산에서 나는 나물은 써서 먹지 못한다는 여론이 있어

궁예는 은밀하게 금학산을 둘러보게 된다. 넓은 평원위에 우뚝 솟은 금학산은 산세가 장엄하며 산위에 오르니 송악(개성)까지도 관측이 되는 명산 중에 명산이 분명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선의 예언이 허언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사흘 밤낮을 울었다면 필시 금학산은 궁예를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니 금학산의 섭섭함을 달래 줄 수 있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바로 금학산 중에서도 명당을 찾아 자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미륵불을 세우고 암자를 지을 것을 지시하게 된다. 마침 적당한 크기의 돌을 세워 미륵불을 새겼고, 주변의 돌을 다듬어 연꽃 문양의 3층 석탑을 쌓았다. 그렇게 지금의 마애불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마애불상의 훼손과 궁예의 몰락

 

왕건은 도선의 예언대로 고암산을 진산으로 도읍을 정한 궁예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선은 왕건의 집안에서 융숭하게 모시는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궁예의 태봉국 기운이 더욱 뻗어나는 것에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태봉국을 손에 넣고자 기회만을 엿보던 왕건은 도선의 예언이 빗나갈 것 같은 불안감에 백방으로 방책을 구하게 된다.

 

결국 금학산에 세워진 미륵불이 있음으로 궁예의 기운이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한 것과 같이 수백년을 이어갈 것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다. 왕건은 마애불상이 있는 곳에 수백명의 부하를 보내 미륵불을 제거할 것을 명하게 된다. 이 때 미륵불이 전체적으로 뒤로 젖혀지면서 무릎 부분 에 심한 균열이 생겨나고 머리가 뒤로 꺾이는 심각한 훼손을 당하게 된다. 또한 연꽃 문양의 석탑이 무너지고 암자는 불타게 된다. 그 후 궁예의 기운도 마애불상의 꺾여진 머리처럼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역사에 묻혀진 진실일 수도

 

지금까지 역사적 근거도 없이 당시와 연관된 설화와 남아있는 흔적만을 가지고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늘어보았다.사실이 아니라 해도  금학산 마애불상에 올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기록된 역사로 전해오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역사 속에 묻혀진 진실의 일부 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금학산을 찾는 산악인들에게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잠시의 휴식이 된다면 이 또한 금학산을 찾는, 철원을 찾는 사람들의 핑계거리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이 이야기가 백년쯤 뒤에는 설화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머리를 바로세운 마애불상의 모습은 오히려 장수의 모습에 가깝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포스에서 바로 자신이 미륵이라 생각했던 궁예가 자신의 모습을 남기려했다는 생각을 해본다.1100년전 역사를 누구라도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다.믿었던 수하에게 왕권을 찬탈당한 궁예라면 그에 모습은 목이 꺾인 마애불상과 같은 모습으로 일그러지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통일한국의 수도를 준비하는 철원군에서 대동방국을 건설하겠다던 궁예의 기상을 기억하며 마애불상의 머리를 아니 궁예대왕의 기상이라 생각하며 지난 2007년 잘못된 모습을 바로 잡았다. 역사 속에 일그러진 태봉국의 후예라기보다는 거대한 나라를 꿈꾸었던 대동방국의 후예로서 통일한국을 위해 한걸음씩 준비하는 것이 철원에 사는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 본다."

 

 

소발, 육계가 높고 상호는 장방형이다. 코끝만 약간 훼손되었고 눈썹을 둥글고,  눈두덩이를 불룩하게 묘사하였다.삼도가 뚜렷하고  수인은 변형된 시무외인, 여원인 형태로 보인다. 불신 아래 바위에도 법의 하단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어 본래는 한 돌이었음을 알 수 있다.조성시기는 고려전기로 추정된다.

 

 

 

 

석등 하대석.

 

 

 

옥개석. 마애불 정면 10여미터 등산로 주변에 위치 풍탁공이 있고, 1단 탑신괴임, 3단의 옥개받침이 있다.

 

 

 

 

 

탑신석. 양우주가 조출되었다.

 

 

반대편 옥개석. 위의 옥개석과 동일한 유형이다.

 

 

'동송읍마애불상' 문화재청의 공식적인 명칭이다. 어떤가? 언제 어떤 사유로 명칭이 확정되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해불가이다. 금학산 마애불 또는 이펑리사지 마애불로 지정되어야하며 사지명이 밝혀지면 당연히 절터명을 붙이면 된다. 근데 바쁘신 분들이 이런 쪼잔한 일에 고개 돌릴 여유가 없을 것이다.

 

 

마애불을 뵙고 있는 도중에 산아래에서 울려퍼지는 아침 점호 구호가 금학산을 휘감고 돈다. 안개속으로 산아래 연병장을 그리며 바위에 걸터 앉아 30년 더 지난 푸른 제복의 내모습을 반추해보니 야릇한 흥분감이 전신으로 전해온다. 궁예의 옛터전 태봉을 거쳐 백두산, 두만강까지 자유롭게 왕래할 그 날은 언제일지. 더 나아갈 수 없는 현실이 밉다.

 

2014.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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