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철원군

철원...도피안사

임병기(선과) 2009. 4. 26.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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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 궁예의 땅. 넓고 기름진 평야. 그 평야의 젖줄인 한탄강.한탄강과 어우러진 고석정.직당폭포 천혜의 비경과 자원을 두루 갖춘 고을이다. 하지만 현실은 분단의 상징으로 각인된 비무장 지대 땅굴, 노동당사등 민족의 아픔이 서린 땅으로 다가온다.

 

그길위에 섰다. 도피안사를 창건한 도선국사는 오늘을 예견했을까? 155마일 철망이 걷히는 날 철원 땅은 우리에게 영원한 도피안이 될 수 있을까? 노산 선생이 휴전선 답사를 끝내고 동해안 바닷가에서 슬퍼서 안타까워서 목 놓아 울었다지만, 나는 자유로운 왕래가 이루어지면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쁨으로 찬탄 할 것이다.

 

철원은 우리 모두에게 피안, 피안의 고장이라고...

 

 

그래 피안(彼岸)이라고 했다. 번뇌, 해탈, 열반이라는 말보다 저 강건너 세상이 극락이라는 표현이 더 좋다. 극락으로 가는 길은 아주 쉬웠다. 강가에 반야용선은 사라지고 피안교가 놓여 있어 까다로운 심사도, 업경대도 없고 시왕도 휴가중이었다.

 

그래. 그럴거야. 살아 생전 적덕을 쌓고 좋은 인연을 지으라는 암시일거다. 피안은 멀고 어렵고 도달하지 못할 세계가 아니라 늘 우리 곁에 머무르는 세상이라고......

 

창건 설화속으로 들어가보자.

 

속세를 넘어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절집 도피안사에는 『도피안(到彼岸)』이라는 이름 속에 창건자의 깊은 원력이 서려 있다. 이 절은 865년(경덕왕 5) 당대의 고승인 도선국사가 1천5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철불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된 사적기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러 가던 도중 불상이 없어져 찾았더니, 도피안사 터에 안좌하고 있어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철불은 도피안사가 자리한 화개산이 물위에 떠 있는 연약한 연꽃의 모습이어서 삼층석탑과 함께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새 시대의 도래를 꿈꾸는 민중의 정성이 이적을 보인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 절을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하나로 삼았으며, 창건 이후 천년동안 그 명맥을 이어왔다고 하나 자세한 중수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에 도선국사가 지금의 대적광전에 봉안된 철조불상을 철원 수정산의 안양사에 모시기 위해 승려들과 함께 불상을 이운하던 중이었다. 당시 철조불상을 실은 암소를 위해 먼 길을 재촉하면서도 안양사를 향한 지름길을 찾던 중, 현재의 도피안사 절터인 철원읍 화지리 암소고개 마루에 도착하게 되었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길을 찾지 못하고 승려들과 암소 역시 지쳐 있던 중이라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희한하게도 암소 등에 실렸던 불상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국사를 비롯하여 승려들은 몹시 당황하여 철불을 찾아 헤맸으나 불상은 보이지 않고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낙담하여 돌아온 후 한 스님이 지금의 동송읍 관우리의 도피안사 터에 이르렀는데, 그 불상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에 도선국사는 이곳에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이 절을 800의 비보사찰(裨補寺刹) 중 하나로 삼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철원읍에 전해오는 마을전설로 철조불상의 신이와 영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보사찰로서 도피안사의 진산인 화개산이 물에 떠있는 연약한 연꽃의 모습이기에, 석탑과 철불로 산세의 약점을 보호하고 국가의 안위와 외세의 침략을 대비코자 한 도피안사의 창건설화로도 알려져 있다..한국전통사찰정보

 

 

 일주문은 없었지만 피안에 세계에도 통과의례는 있었다. 사찰에서가장 일반적인 배치였다.

 

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서방 광목천. 북방 다문천

 

 

도피안사 3층석탑.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의 명문으로 856년(신라 경문왕 5)경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을 8각의 돌로 높게 2단이며,하대석ㆍ중대석ㆍ상대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은 선종의 도입과 철불 조성으로 대변되는 신라하대 지방호족의 강한 세력화의 영향으로 통치 기반과 지배력이 약화된 서라벌과 다른 문화의 차별화를 고려한 의도된 조성으로 보여진다. 내가 구산선문 사찰 답사기에서 언급했던 철불 조성 배경과 궤를 같이 한다는 의미이다. 

 

탑신은 기단과 달리 통일신라시대 석탑 형식이다. 상륜에는 노반이 남았고, 다소 높아 보이는 몸돌에는 우주가 있고, 옥개석 받침은 위로부터 3*3*4이며, 모서리 반전도 날카롭다. 

 

 

도피안사 석탑의 매력은 역시 기단이다. 하대석 기단은 8각으로 2단을 쌓고 면마다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위 기단에는 복련이 곱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중대석은 팔각으로 높게 조성하였으며, 상대석에는 앙련이 넉넉하게 피어 있다. 초층 탑신 방형 받침도 두텁다.

 

전체적으로는 불상 대좌를 연상케하는 기단 구성이다. 많은 탑을 보았지만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식인데 이번 답사길에는 천안 미륵사에서도 보았다.

 

 

혼자 잘 놀고 있는 유현이를 불렀다.

-.대적광전 참 좋다 그쟈?

-.그렇지예? 작고 조촐하게 자리했지만 금당안 부처님의 위엄이 크게 느껴지지예? 

 

혜곡 선생이 극찬한 소백산 무량수전의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고건축 안목을 가진 무지랭이지만 도피안사 대적광전은 객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이다. 부르지 않아도 다가가고 싶다.

 

얕게 화장한 얼굴속으로 보이는 피부도 곱고, 어머니 살내음이 날 것 같다. 살짝 내민 막돌로 얼기설기 흐틀게 쌓은 축대도 천연덕 스럽다. 철불을 모신 일부 구산선문 사찰 전각의 거드름도, 객을 압도하는 거만함도 위세도 부리지 않았지만 단아함속에 범점 못 할 위엄이 느껴진다. 자신을 낮추어 주인공을 더욱 경배하게 하는 그런자세의 전각으로 보았다면 나의 건방인가?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주심포, 겹처마 전각이다. 낮은 이벌대 기단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어칸과 협칸은 4분합 띠창살로 꾸몄다. 

 

 

전각에서 중정으로 살짝 내민 축대.막돌을 네벌로 흐틀게 쌓았다. 창살은 민가에 널리 조성된 띠창살이다. 답사기 마친후 유홍준 전 청장의 도피안사 답사기를 꺼내보았더니 대적광전 전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나의 시각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다만 유청장님 글의 사진에는 축대가 장방형 장대석으로 높게 조성되어 있어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박공부분에는 풍판이 없는 모습이다.

 

수덕사 대웅전, 거조암 영산전, 환성사 심검당 처럼 서까래, 도리, 장혀, 들보가 드러나 시각이 즐겁다.

 

고 고주찬 대령

 

법당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봉안 배경을 옮겨왔으니 우리님들 답사에 참고하길 빈다.

 

도피안사 철불은 광복 후에는 공산치하에 들어갔다가 6·25전쟁 때 완전 폐허가 되어 불상 또한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 후 민간인통제구역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으며, 1953년부터 미 34단이 이곳에 주둔하다가 1957년에는 국군 15사단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9년 어느 날 제15사단 이명재(李明載) 장군의 꿈에 도피안사의 부처님이 나타나, 불상이 땅속에 묻혀 답답하다고 계시하였다. 

 

꿈을 꾼 이튿날 전방 시찰을 나갔던 장군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부근의 한 민가에 들어갔다가 그 집 안주인의 모습이 꿈에 본 여인과 똑같은 것을 보고 안주인에게 현몽한 꿈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장군은 꿈속에 보았던 절터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 여인의 안내를 받아 불타 없어진 도피안사 터를 찾아가서 땅속에 묻혀 있던 철불을 발견하였다.

 

이렇듯 천년 전 도선국사에 의해 조성된 철불은 이명재 장군에게 현몽하여 그 몸을 드러냈고, 고주찬 대대장과 함께 장병들의 손에 의해 도피안사가 재건되었다. 이후 사찰관리는 군에서 군승(軍僧)을 두어 관리하였으며, 1985년 사찰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어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인 신흥사의 말사가 되었다.

 

 

우리 카페 어느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비로자나불. 나발, 얼굴은 갸름하며, 다른 불상에 비해 귀가 짧다. 지권인 수인, 법의는 통견으로 층단식 옷주름이 층단을 이루며 무릎위까지 내려왔다. 

 

수차례 언급하여 선종 사찰과 철불에 대해서는 더이상 피력하지 않겠다. 다만 구산선문과 선종 사찰 답사시에는 신라 하대 중앙 권력의 통치권 누수, 지방 호족의 지원으로 철불이 등장하고 풍수지리 도입, 부도 출연, 조사당 조성들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철조비로자나불은 몸체뿐만 아니라 대좌도 철로 조성했다. 불상의 뒷면에는 긴 명문이 있는데, 이를 통해 불상은 865년(신라 경문왕 5)에 철원지방의 신도 1천500명이 뜻을 모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香徒佛銘文幷序
夫釋迦佛晦影歸眞遷儀越世紀世掩色不鏡三
千光皈一千八百六載耳慨斯怪斯彫此全○○
○來哲困立願之唯願卑姓室遂棨椎自擊○
○覺長昏換庸鄙志契眞源怒以色莫朴○見
唐天子咸通六年乙酉正月日新羅國漢州北界
鐵員郡到彼岸寺成佛之侍士○
龍岳堅淸于時○
覔居士結緣一千五百餘人
堅金石志勤不覺勞困

 

대저 석가불이 모습을 감추고 진리로 돌아가시어
삼천 빛이 비치지 않은 지가 무릇 1,806년이 되었으나 슬프고도 기이하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뜻을 내어 세웠다.  

당 함통 6년(경문왕 5년, 865) 1월에
신라국 하주 북쪽 경계의 철원군 도피안사에서
불상을 조성할 시사(侍士)가 거사를 구하여 1천500여 명과 결연하고,
금석처럼 변하지 않는 뜻을 굳건히 하여 힘쓰니 피곤한 줄 몰랐다.

 

 

철대좌.

 

대좌는 단정한 3단 구조로, 상대석에는 세겹의 앙련이 보인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중대석은 팔각이고, 하대석에는 복련위에 귀꽃이 피어 있다.  

 

 

후불탱

 

 

열반적정

 

200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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