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철원군

철원...심원사

임병기(선과) 2009. 4. 24.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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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첫걸음인가? 정확히 30년전 푸른제복 시절 경기도 연천에 근무했었다. 어느날 영문도 모르고 군용 트럭에 탑승하여 도착한 지역이 철원군 비무장 지대로, 155마일 탱크 저지선 방벽 작업에 동원되었었다.

 

그래서인지 설레이고 접전 지역이라는 묘한 감정이 사로잡았다. 친구놈들이 그렇게 되내이던 6사단을 통과할 무렵에는 잊고 지내던 친구놈들 얼굴이 스쳐갔다. 추억이 아름다운 세대가 되어 버렸지만 군시절 3년동안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이 보고 싶다.

 

 

산골 작은 절집으로 생각했었는데 비약하면 축구장만한 중정이 낯설다. 전국 제일의 지장도량 특히 생지장도량으로 알려져 순례객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종무소에 들러 부도전을 수소문했더니 경기도 연천에 있다고 했다.

 

아뿔싸!!! 미련한 중생.어쩌겠냐? 심원사 답사의 또 하나 목적인 지장보살을 뵈으면 그또한 즐거움 아닌가? 심원사 창건 관련 이야기를 전통 사찰 정보에서 가져왔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위치한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薩 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으로, 『심원사지(深源寺誌)』에 의하면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설립한 영원사(靈源寺)ㆍ법화사(法華寺)ㆍ도리사(?利寺)와 함께 영주산(靈珠山)의 4대사찰 중 하나로 창건되었으며, 당시의 이름은 흥림사(興林寺)였다고 한다. 영주산의 4대사찰 중 나머지 3개 사찰은 고려 때 폐사되었으나 흥림사만은 명맥을 유지하며 전승되었다.


720년(성덕왕 19)에는 사냥꾼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지장보살의 감화를 입어 산내암자인 석대암(石臺庵)을 세워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859년(신라 헌안왕 3)에는 범일(梵日) 스님이 천불을 조성하고 이듬해에 성주암(聖住庵)ㆍ남암(南庵)ㆍ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였다."

 

 

명주전.  명부전, 지장전, 시왕전, 영원전과 같은 전각으로 지장보살이 명주(明珠)를 들고 있기 때문에 붙인 전각이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명주전 현판 글씨가 퇴경 권상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이 편액은 1962년 자자일, 즉 하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인 7월 보름에 쓴 글씨라고 한다. 우리가 사찰 답사시에 흔히 만나지는 못하지만 2년전인가 문경 "사불산 대승사" 편액에서도 보았다.

 

우리님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퇴경 권상로에 대해서 간단히 옮겨 온다.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1879 ~ 1965)는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1896년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서진(瑞眞)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그는 김룡사 불교전문강원을 마치고, 원종(圓宗) 종무편집부장, 문경 대승사(大乘寺) 주지, 조선불교월보사 사장, 불교사 사장,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불교조계종원로회 원장, 동국대학교 초대총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퇴경은 일생을 한국불교학의 정립과 불교사상의 선양에 전념하였던 근대의 고승이며, 조선불교사 등 3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펴낸 위대한 불교학자였다.

 

현재 사찰에 남아 있는 편액으로는 서울 화계사 <삼각산제일선원>, 철원 심원사 <명주전>, 밀양 표충사 <예제문>, <고령정>, 문경 대승사 <사불산대승사>, 영주 희방사 <희방사>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게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인과에 관하여 생각케하는 심원사 창건 설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옛 신라시대의 이야기로, 당시 강원도 철원땅 보개산 기슭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가지가 휘도록 먹음직스러운 배가 열린 어느 해 여름날, 까마귀 한 마리가 배나무에 앉아 짝을 찾듯 ‘까악까악’ 울어대고 있었다. 배나무 아래에는 포식을 한 독사 한 마리가 여름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때 까마귀가 다른 나무로 날아가는 바람에 가지가 휘청거리며 커다란 배 한 개가 독사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은 뱀은 화가 나서 독기가 오른 머리를 하늘로 쑥 뽑아 사력을 다해 독을 뿜어내었다. 독기가 살을 파고들면서 순식간에 까마귀는 힘이 쑥 빠진 채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뱀도 너무 세게 얻어맞은 데다 독을 다 뿜어내어 죽고 말았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어처구니없이 까마귀와 뱀이 함께 죽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까마귀와 뱀은 죽어서까지도 서로 원한이 풀리지 않았고, 뱀은 죽어서 우직한 멧돼지가 되고 까마귀는 암꿩으로 환생하였다. 멧돼지가 된 뱀이 먹이를 찾아 산을 헤매던 어느 날, 마침 암꿩이 된 까마귀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멧돼지는 전생의 일을 기억하며 살며시 등성이로 올라가 발밑에 있는 큰 돌을 힘껏 굴렸고, 암꿩은 미처 피할 겨를 없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까마귀를 죽인 멧돼지는 속이 후련하였다.


그러나 이때 사냥꾼이 그곳을 지나다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꿩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단걸음에 자신의 오두막집으로 내려가 부인과 함께 요리를 해먹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태기가 없던 사냥꾼 아내에게 그달부터 아기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열 달이 지난 후 사냥꾼의 아내는 옥동자를 분만하였고, 두 내외는 금지옥엽 정성을 다해 아들을 키웠다. 이윽고 아들은 씩씩한 소년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활쏘기를 익혔다. 그러나 전생의 업보를 통해 태어난 아이는 멧돼지를 잡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고,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사냥을 허탕치고 두 부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 아들이 멧돼지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 저기 멧돼지가 있어요!”
아들의 외침을 들은 사냥꾼은 정신이 번쩍 들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멧돼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멧돼지가 죽은 것을 확인한 아들은 기뻐 날뛰며 소리쳤으며, 장성할수록 더욱 멧돼지를 증오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세월이 흘러 사냥꾼은 사냥도구를 아들에게 물려준 채 세상을 떠났고, 중년에 이른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전히 사냥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개산으로 사냥을 나간 아들은 그날따라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산돼지를 발견했다. 그 산돼지는 우람할 뿐 아니라 온몸에서 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보는 순간,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적중시켰다. 그러나 금멧돼지는 피를 흘리면서도 여유있게 환희봉을 향해 치닫는 것이었다.


그는 멧돼지가 숨어있는 곳까지 쫒아 올라갔지만, 멧돼지는 간 곳이 없고 돼지가 있어야 할 장소에 지장보살 석상이 샘 속에 몸을 담근 채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석상의 몸에는 사냥꾼이 명중시킨 화살이 꽂혀 있었고 사냥꾼은 그 묘한 광경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까마귀와 뱀의 인과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처님께서 멧돼지로 화현하여 화살을 맞은 까닭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물 속에 잠긴 작은 석상을 꺼내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석상은 보기보다 무거워 끄덕도 하지 않았고 날이 저물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튿날 그 자리를 다시 찾은 사냥꾼은 또 한번 놀랐다. 어제 분명히 샘 속에 잠겼던 석불이 어느새 물 밖으로 나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이에 크게 깨달은 그는 석불 앞에 합장하고 출가하기를 결심하게 되었으며, 그를 따르는 3백여 무리를 동원하여 절을 짓고 석불을 봉안하였다.


지금도 강원도 철원 보개산에 가면 신라시대 이순석이란 사냥꾼이 지었다는 절 석대암이 있으며, 이 절의 주불인 지장보살은 석 자의 키에 왼손에는 구슬을 들고, 왼쪽 어깨에는 사냥꾼의 화살이 박혔던 자리라고 전하는 한 치 가량의 금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후 이 이야기는 살아 있는 지장보살의 가피를 입은 심원사 창건설화로 변용되어 아래의 ‘황금멧돼지와 사냥꾼’라는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명주전 지장보살. "두건을 쓴 모습으로, 내리감은 두 눈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으며,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다. 상호의 이목구비는 중앙으로 몰려 있지만 자비로운 모습이며, 턱 중앙에는 보조개를 머금은 것 같은 홈이 파여 있다.


석대암(石臺庵) 창건설화를 증명하듯 왼쪽 어깨에 이순석이 쏜 화살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오른손 위에는 가슴 아래로 한 알의 보주(寶珠)를 쥐고 있다. 전반적으로 신체는 상호에 비해 신체가 세장한 모습으로 불신은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이 지장보살은 도금을 하여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칠이 벗겨지고 말아 현재에도 개금이나 장식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더욱 정감있는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경기도 연천...심원사지 부도군/출처:문화재청

 

심원사 부도를 보겠다고 철원을 찾았다. 이 부도는 연천군에 위치한다.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보개산 심원사 터에는 모두 12기에 이르는 부도와 2기의 비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 때 발간된『심원사지(深源寺誌)』에 의하면, 1925년 심원사 동쪽에 있던 비와 부도 전부를 지금의 터로 옮겼다고 하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파손 또는 밀반출되어 현재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이곳에 있는 비와 부도의 주인공들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하던 제월당(霽月堂)·취운당(翠雲堂)·풍담당(楓潭堂)·호연당(浩然堂)·청하당(靑霞堂)·청심당(淸心堂) 등 휴정의 법맥을 이은 승려들이다.

부도들은 8각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으며 종모양도 섞여 있다. 8각을 한 부도들은 모두 지붕돌 윗면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오른쪽 비 옆에 있는 종모양의 부도는 상태가 좋은 편이고, 기타 다른 몇 개의 부도들은 부재들이 서로 섞여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2기의 비 중 부도밭 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제월당 경헌대사비이다. 옆면에 안상(眼象)을 새긴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을 조각한 4각 지붕돌을 올렸다. 조선 인조 14년(1636) 8월에 세운 것으로, 현재 비문이 심하게 닳아 있다. 가장 왼쪽에 자리한 비는 취운당 대사비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받침돌 삼아 그 위로 비몸을 세웠는데, 비몸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다. 효종 3년(1652) 8월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총탄의 흔적으로 일부가 파손되긴 하였으나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명주전 벽의 반야용선

 

지장보살.지장보살.지장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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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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