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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목포시

목포...이훈동 정원 석탑

by 임병기(선과) 2014.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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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오고 싶었던 길이었다.  대구에서 목포 짧지 않은 거리를 답사 목적으로 3번째 들렸지만 이훈동 정원의 석탑은 처음 시도이다. 사전 정보로 일요일도 개방하는 줄 알았지만 반신반의 하던 차에 목포에 거주하시는 청매 교장선생님이 손수 확인해주시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더운 날씨에 현장까지 오셔서 정원 곳곳을 안내주시었다. 청매님이 아니었다면 총 7기 석탑중 4기만 확인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훈동 정원 출입을 위해서는 먼저 성옥기념관을 들려 안내 절차에 따라 허락 받아야 한다.

 

 

 1930년대 일본인 우찌다이 만페이가 만든 일본식 정원이었다. 해방 후 해남 출신의 국회의원 박기배가 소유하였던 것을 1950년대에 이훈동씨가 매입하여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식 정원의 특징이 사라지고 백제양식의 별서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년 시절 나는 일제 말기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청년보국대 분대장을 맡아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일본인이 살고 있던 지금의 유달동 집에 들렀다가 정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집도 집이려니와 상록수로 잘 꾸며 놓은 정원은 그 집을 한결 돋보이게 했다.

나는 녹색 예찬론자다. 녹색은 빛깔 중 가장 아름다운 색이다. 녹색은 생명의 빛깔이며 청춘의 빛깔이다. 녹색은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청신함과 평안함을 주는 색깔이 바로 녹색이다.

육체가 피로감을 느낄 때 맨 처음 눈으로부터 신호가 온다. 나는 내 눈이 피로하다고 신호 보낼 때 서슴없이 넓고 청청한 정원으로 나간다. 정원 한 가운데 서서 완상하거나, 정원을 한바퀴 빙 돌고 나면 어느 새인지 모르게 눈의 피로가 가신다.

내가 유달동 집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나중에 여러 경로를 거쳐 구입했던 제일 큰 이유는 정원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상록수가 정원의 팔십 퍼센트는 차지하고 있어서 언제라도 그 집 정원에 들어서면 녹색 공기가 불어오는 것 같았다. 또한 녹색의 청청함으로 목욕을 하는 듯 했다.

그 후, 그 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집터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명당을 찾을 때 집터를 보고 한국 사람들은 묘터를 본다는데 그 집터는 일본인 거물 곡물상 우치다 만베이 씨가 유명 지관을 시켜 영산강 유역 별장 터를 찾다가 노령산맥의 끝자락이 유달산에 머물고 있어 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아랫자락에 놓인 터를 찾은 것이었다.

지관이 호남 제일의 세금을 내게 되는 거부의 집터라며 적극 추천한 결과, 그 터에 집을 짓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돈 많이 붙는 집에서 장수하는 것을 바란다는 의미로 집 상(像)은 거북 구(龜)자 형태로 지었다는 얘기도 곁들여 들었다.

젊은 시절 그 집 정원에 들어갔다 나온 후로 생각을 한 곳에 모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집터를 찾아 좋은 집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 홀로 되신 어머님 공양하며 오래오래 살리라.'

유달동 거부의 집은 해방과 함께 일본인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그리고 6ㆍ25후에 그 사람이 정치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을 담보로 은행돈과 사채를 잔뜩 빌려서 썼다가 갚지 못할 지경이 되자 나를 찾아와서 집을 맡아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시오. 이번 선거에 이기면 필히 제일 먼저 갚으리다."
평소 안면이 있는 분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나는 그렇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선거에서 낙방하고 빚을 갚을 길이 막막해지자 이번에는 아예 집을 사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다른 사람에게 진 빚을 갚아주고 집을 떠 안았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빚이 집을 담보로 잡고 있었다.

그걸 갚지 않으면 다시 집이 넘어갈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빚까지 떠 안았는데 그러고 보니 집 값을 세번 치르고 내 앞으로 등기가 넘어 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젊은 시절부터 원했던 집을 사들이긴 했지만 엄청 비싸게 산 결과가 됐다.

여러 번 복잡한 절차를 거쳐 내 앞으로 등기 이전이 끝난 후 그 집에 갔다. 그러나 예전에 내가 보았던 집의형태가 아니었다. 전쟁을 겪고 주인이 바뀌면서 집의 꼴이 형편없어져 버렸다. 그 크고 우람한 상록수들은 모두 베어져 밑동만 흉측하게 남아있었고 응접실 자리는 닭장이 되어서 사방에 닭똥 냄새가 진동했다.

실망이 컸다. 사람하고 집은 꾸미기 나름인데, 그 집은 방이 많고 넓어 동란 후 여러 군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내 집처럼 가꾼 사람이 었었다. 가꾸기는 커녕 정원에 있는 나무들을 모두 베어 땔감으로 태웠다는 것이다.

몇 십 년 자란 아름드리 정원수가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땔감으로 둔갑해 버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덩그런 정원 자리와 본채만 살아 있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집 마당에 서서 나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유달동 4-1번지의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꿈은 이룬 셈이었다. 우선 본채의 부서진 곳을 고치면서 다음으로 정원을 꾸미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여러 정원에 관한 책자를 구해서 읽고 일본 정원을 직접 견학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 일본 문화는 거의가 백제 문화의 유산이라는 것을 알았고 특히 일본 정원 문화도 백제 정원 문화가 그 원조라는 것을 알았다.

그 책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백제의 별서(別墅) 정원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원으로 발전했다.'
그러니까 별서란 들이나 산야에 별장처럼 한적하게 따로 짓는 집을 말하며 정원만의 특별한 특징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별서 정원의 특징은,
하나,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용한다.
둘, 자연 경관을 그대로 활용하되 두 줄기의 수맥 또는 두 줄기의 자연 물길이 집안으로 흐르는 곳을 택한다.
셋, 우물은 음양설에 기준을 두어 쌍샘으로 파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등이었다.

유달동 집은 그 모든 별서 정원의 특징을 살려 만들어졌다. 나는 책을 참조하고 동시에 정원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차근차근 정원의 모양새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마다 내 손으로 심고 물을 주며 정성으로 가꾸었다. 하루 하루 정성을 들인 탓에 그 황량했던 정원은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 갔다.

내가 심은 나무 한 그루 정원석 한 점의 위치까지 나는 훤히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오랜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연못 옆에 심어 둔 향나무 한 그루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 자리에 잔디가 심어져 있었다. 즉각 관리하는 사람을 불러 물어 보았다.
"이곳에 있던 향나무 어디 있는가?"
정원관리사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어디 있는가?"
나는 화가 나서 다그쳤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관리를 잘 못 해서 그만 죽었습니다. 그래서 뽑아 버리고 잔디를 심었는데..."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두 손을 꽉 잡은 채 고개를 푹 떨구었다.
"됐어. 관리 잘못해서 죽은 것은 할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잔디를 심어 눈속임을 하려고 했던 것은 용서할 수 없어."
"회장님,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눈속임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무도 관리 잘하겠습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눈속임이며 거짓말이라는 것 몰랐던가? 다시는 그러지 말아!"
나는 잘못을 비는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기 정원의 모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매일 아침 정원의 모든 것과 눈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내가 모를 것 같더냐?"
사실 내 성격은 직원이나 내 사람들이 잘못을 했을 때 그자리에서 불호령을 치지만 쉽게 그만 두라거나 내쫓은 적이 없다. 그들도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한 가정의 가장임을 생각해서다. 내 경영철학 중 하나가 '잘못은 고쳐서 다시는 그런 잘못 저지르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지 그 직원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꾼 유달동 집 정원은 전국적으로 대표되는 철저한 백제양식 별서 정원으로 인정받아 전남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동시에 중앙으로까지 소문이 나서 TV드라마 '야인시대'와 '모래시계'의 촬영장이 되기도 했다. 내 안목을 알아주는 것 같아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휴식하고 싶을 때나 머리가 복잡할 때 나는 정원을 둘러보며 나무와 꽃과 정신적 교감을 나눈다. 상록수는 나에게 매운 바람 불고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꿋꿋이 버티고 서 있는 의연한 모습을 배우라 한다. 또한 낙엽수를 대할 때면, 한겨울 나뭇잎 모두 떨구고 그 나뭇잎 다시 싹틔울 거름이 되어 봄이면 죽은 듯 앙상한 가지에 싹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절망 앞에서 절대 좌절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철학을 배운다.

그런가 하면 유달동 집이 풍수지리나 과학적으로 명당 터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노령산맥의 끝자락으로 혈맥이 끊기면서 돈이 모이는 곳으로 양지바르고 수맥이 지나가며 집은 노상 적당한 습도와 통풍이 유지되어서 어머님 건강하시고 가족들 잔병 없으며 사업도 꾸중히 상승세를 타고 있음이었다. 또한 오가는 사람들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찾고 또 찾아 주어서 교우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세월이 갈수록 집에 대한 애정은 더해갔는데 집이 오래되니까 지붕이 새고 쥐들이 천장에서 운동회를 하곤 했다. 나는 정원은 그냥 두고 집만 뜯어서 한옥으로 고치려는 계획을 갖고 설계를 완성하여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이참에 집을 뜯고 한옥으로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손사래를 치셨다. 어머님의 반대 이유가 분명했다.
"아서라. 나랏님께서 두 번이나 머무셨던 집이니까 그대로 유지 보존해야 한다."
어머님 말씀대로 좋은 집터이니까 대통령이 두 번이나 자고 간 곳임에 틀림없다. 어머니 말씀도 옳다 싶어 집은 일본식 그대로 두고 비가 새는 지붕만 고치기 위한 설계를 다시 해서 지붕 전체를 뜯어내고 동판으로 덮어씌웠다. 그랬더니 원형은 그대로이며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비 한 방울 새지 않는 탄탄한 지붕이 되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놓은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이훈동 회고록에서 발췌

 

 

 

입구 정원의 탑(1). 4층 탑신과 옥개석이 결신된 모습이다. 탑신석이 본디부재가 아니어서 3층석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안태고향은 알려지지 않았다.

 

 

 

 

입구 정원 석탑(2).본비 부재들이 아니며 역시 고향은 알려지 않았다.

 

 

 

상륜도 제짝이 아니라 거북을 올렸다.

 

 

입구 정원 석탑(3). 여러 기 석탑의 조합이다.

 

 

 

 

임천정원 석탑(4)

 

 

임천정원 석탑(5)

 

 

임천정원 석탑(6)

 

 

임천서원 석탑(6). 부도

 

 

 

 

후원 석탑(7)

 

 

일본식 석등

 

 

일본식 석등

 

 

현관앞 석양

 

 

일본식 석등

 

 

임천정원 문무인석

 

 

 

전남지방의 전형적인 동자석

 

 

 

임천정원 부도

 

 

 

201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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