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보성군

보성...징광사지 귀부와 이수

임병기(선과) 2014. 8. 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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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광요를 거쳐 원징광마을에 도착할 무렵 한두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징광사지 흔적을 마을에서 찾아 볼려고했던 마음은 어느순간 사라지고 징광사지를 향한 발걸음이 급하다. 폐사지 답사는 초봄이 적격이며 겨울 또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비되지 않은 절터를 한여름에 답사하는 것은 거의 미친짓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항상 동선에 포함시키는 나는 어떤 인간인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폐사지의 격한 환영의 현장이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어  땀을 뻘뻘 흘리며 가슴보다 높은 풀숲을 제치며 다가갔다. 뾔꼼히 이수가 드러난다. 반가움 보다 비가 퍼부을 것 같은 뿌연 하늘이 걱정되어 풀과 귀부을 감싸고 있는 칡넝굴을 제거하면서도 내가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더군. 그래서인지 테크닉 없는 무대포 사진을 여러장 촬영했는데 제기럴!!!몇 장만 살아 있다.

 

 

징광사지 사역과 관련해서는 조사기관과 주민들 사이에 이해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어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서 발췌하여 옮긴다.

 

"징광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 태종대에 資福寺에 선정되는 기록과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금화산에 있다’고 기록하면서 고려대 문인인 김돈중(金敦中, ?~1170년)과 김극기(金克己, 생몰년 미상, 고려 명종대 문신)의 시를 함께 소개하고 있어 고려대부터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659년에 간행한 『東國輿地志』와 18세기 중반에 간행된 『輿地圖書』 등에도 유사한 내용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樂安邑誌』에는 폐사로 기록되어 있어 19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지 이외에 징광사의 연혁을 확인 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조선후기의 「澄光寺重創記」와 「金華山澄光寺靈山殿重記」등이 전하고 있으며 「樂安 澄光寺 月潭堂 雪霽大師碑文」, 「金華山澄光寺雪巖禪師碑銘」, 「高敞 禪雲寺 雪坡堂 尙彦大師碑文」, 「順天 松廣寺 奇峰堂 藏旿大禪師碑文」에도 관련된 내용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대에 중창되고,  獅子山門의 開倉祖인 澈鑒禪師 道允(798~868)의 수행도량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정유재란으로 전소되나, 17~18세기에 크게 중창되고 여러 불전이 간행되는 등 본사인 선암사를 능가하는 큰 사찰로 번성했다고 한다.

 

징광사지는 벌교읍 존재산(금화산) 큰봉의 남동쪽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징광리 징광마을 일대로 추정된다. 벌교읍에서 순천시로 향하는 15번 국도에서 징광제쪽으로 진입하면 징광문화원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하천을 따라 서쪽으로 진입하면 징광마을에 도달한다. 징광마을은 마을 초입에 약 10여 가구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쪽으로 대규모 계단식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징광사지의 사역은 과거 징광사 홍교虹橋가 있었던 자리라고 전하는 징광마을 초입부터 마을 뒤편의 근래에 형성된 경작지 일대와 서쪽의 부도골이라 불리는 계곡부까지로 추정된다. 징광사지는 일제강점기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경작지 조성, 주요 소재문화재의 잦은 이동 등으로 사역 범위 및 중심위치가 아직도 불명확한 상태이다. 징광마을의 대규모 경작지와 경작지 석축은 그동안 여러 조사에서 징광사지의 중심사역으로 추정되었고, 경작지의 석축 역시 건축유구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 토지의 소유주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일대의 낮은 구릉지 지형에 대해 자신들이 직접 장비를 동원하여 석축과 평탄지를 대대적으로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기조사 내용과 서로 상충되고 있다."

 

 

사지에 각기  매몰되어 있던 귀부와 이수는 한상훈씨가 경지정리 과정에서 발견되어 현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비신과 용두는 결실된 상태이다. 현재 이수도 전후면이 바뀐 상태로 보인다.

 

 

등에는 6각 귀갑문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비좌 측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안상 내부에서부터 귀부 하부까지 운문이 연속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발은 3개 발가락만 표현하였고 꼬리는 한쪽으로 틀어져 표현되어 있다. 이수 전면, 측면 후면에 용문과 운문이 새겨져 있다.

 

 

전면에서 보면 목은 굵게 표현되어 있고 상부에는 돌기가 튀어나와  머리 부분과 별개의 용두가 결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순천제일고 용두 답사기 참조 요)

 

 

이수 후면(?), 정면(?)

 

현 상태에서 전면에는 용 두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고 상부에 여의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용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중앙에  원형 전액(?)이 표현되어 있다. 이수도 앞뒤가 바뀐 것인가?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귀부와 이수로 전한다.

 

 

스산한 겨울날 조용히 찾아 들어 따뜻한 온돌방에서 주민들과 하룻밤 지새고 싶다.

 

 묻혀지고 잊혀져가는 아득한 그리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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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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