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익산시

익산...관음사 목조관음보살입상

임병기(선과) 2014. 4. 15.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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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갈산동 32-3 관음사 3층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다. 2008년 관음보살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어 1605년 위봉사 부속암자인 북암에서 조각승 원오 등에 의하여 조성된 사실이 밝혀 졌다.

 

 

보살은 고개와 배를 약간 앞으로 내민 채 정면을 향해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목은 삼도가 가지런히 그어져 있으며, 얼굴에 비해 어깨는 좁은 편으로, 가슴 앞을 넓게 틔워 안에는 평평하게 군의를 입었는데 그 위로 간단한 영락장식이 흘러내렸다. 두 손에 걸쳐 발 아래 까지 길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다소 형식화되어 딱딱한 느낌을 주며, 배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의 주름 역시 중간이 끊어져 있다. 약간 벌리고 서있는 두 발의 발등 위 부분까지 상의가 덮혀 있고, 다리 사이로는 신대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이마부분이 넓고 사각형에 가까운 편으로 눈은 두툼한 편으로 반쯤 감고 있으며, 궁형의 눈썹이 코로 이어지면서 콧날이 날카롭게 묘사되었다. 입술의 끝부분을 약간 올려 미소를 띠고 있는 입 등 이목구비가 잘 조화되었다. 머리에는 이마에 보발이 한 줄 표현되고 머리 위에 가늘고 긴 상투가 남아있고 보발 중 일부는 귀 앞을 지나 귀 뒤로 흘러내려 어깨 위에서 몇 가닥 묶은 뒤 어깨 앞뒤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화염보주와 운문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은 일부 장식이 뒤에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발원문...출처/다음

 

최선일님의 '조각승 원오의 삶의 작품세계'에서 발원문 해석을 가져 왔다.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산인山人 의암儀庵이 큰 원을 세워 1594년에 길을 떠나 명산을 두루 돌아보던 중 북암北庵에 이르러보니 1597년에 본사本寺가 병란으로 인하여 불전과 전각이 전부 불타서 흔적이 없고 … 1601년 정월에 법당을 시작하여 다음 해인 1602년에 법당에 모실 불상 삼존을 조성하고, 다음 해인 1603년에 영산도와 다른 전각에 단청을 다하여 마치니 모든 사람들이 와서 둘러보고 말하기를 새로 지은 모든 것이 옛날의 북암 같다고 하였으며, 1605년 8월에 문수, 보현, 관음, 지장 등 존상과 약사도, 미타도, 지장과 시왕도 등을 마쳤고 …”라는 문구를 통하여 1605년에 의암스님이 1601년 정월에 법당 건립을 시작하여 1602년에 불상 삼존을 조성하고, 1603년에 영산회상도와 다른 전각殿閣에 단청을 칠하였다. 1605년 8월에 화사化士 의암과 김문의가 발원하여 조각승 원오元悟, 충신忠信, 청허淸虛 등이 문수文殊, 보현普賢, 관음觀音, 지장보살地藏菩薩像과 약사藥師, 미타彌陀, 지장地藏 등의 불화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만들어진 네 구의 보살상이 현재 익산 관음사, 익산 혜봉사, 완주 위봉사(도난)에 봉안되어 있고, 이들 보살상이 처음 조성된 북암은 위봉사에 딸린 암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각승 원오는 157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1599년에 석준釋俊과 강원 평창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상을 중수하였으며, 1605년 전북 익산 위봉사 북암 보살상 등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원오가 1624년에 경남 합천 해인사 경판고經板庫(法寶殿) 중건에 시주자로 참여하여 1620년대 중반까지 생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599년에 상원사 문수동자 중수?개금에 수화승으로 참여한 석준이 17세기 전반에 김제 금산사 중창에 적극 관여한 스님이기 때문에 같이 활동한 원오도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2014,03.28

문화재 설명은 문화재청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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