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비파골 석탑재

임병기(선과) 2014. 1. 3.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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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곡마애입불상 답사후 금오봉 정상에서 용장사지 방향으로 향하다 비파골 전설 팻말 부근에서 하산을 시도하여 등산로가 폐쇄된 지점으로 진입했으나 우리가 찾을 석가사지, 불무사지로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시 돌아나와야 했다.

 

비파골琵琶谷 망덕사望德寺 전설

비파곡에는 네 곳의 절터, 석탑재가 산포하고 있으며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 32대 효소왕 6년(697)때 서라벌 교외에 망덕사 낙성식을 오리는 날 임금님이 행차하여 공양을 올렸다. 그때 차림이 누추한 중이 와서 임금님께 청하기를  “저도 제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님은 마음이 언짢았지만 맨 끝에 앉아 참석하라고 허락 하였다. 제를 마치고 임금님은 중을 불러 조롱투로 말 하였다.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예 저는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
-돌아가시거든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 하지마라.

-예, 잘 알았습니다, 임금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뵈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임금은 깜짝 놀라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부르며 허겁지겁 산에 올라가 그가 날아간 하늘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다.


중이 사라져 버리자 신하들을 보내 진신석가를 찾아 모셔오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비파골 안 삼성곡이라는 곳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가 바위위에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진신석가 부처님은 바리때와 지팡이만 남겨두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던 것이다. 신하들은 돌아와서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효소왕은 자신을 뉘우치고 비파암 아래 절을 세우고 석가사라 이름 짓고 바리때를 모셔놓고 진신석가 부처님께 사죄하고 중이 숨어버린 바위에는 불무사佛無寺를 지어 지팡이를 모셔두고 사라진 부처님을 공양 하였다.

 

 

도깨비 바위.내눈엔 말얼굴 같아 보였다.

 

 

삼형제 바위

 

 

도깨비 바위에서에서 돌아 불무사지를 향해  길없는 길을 여자 두 분을 내비양처럼 모시고(?) 선두를 양보했다. 50대 남자들은 위험해 노출된 연로한 흘러간 청춘이기에 조심조심 뒤를 따랐다. 혹자는 남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무자바하게 쏫아부을지 모르지만 면면을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한 분은 남산에 이력이 붙은 분이고 다른 분은 합기도 유단자이며 현역 축구코치로 근무중이니  내비양의 자격은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냥 선두에 세울 수는 없어 평탄한 길부터는 남자들이 앞서서 피곤해하는 두 분을 정중하게 모셨으니 공평한 처사 아니겠는가? 각설하고

 

민묘 상석으로 강제 용도 변경된 석탑 면석이다. 기단 면석으로 보이며 양우주가 분명하게 조출되어 있다.

 

 

민묘 아래 축대(폐사지 축대?)에 널부러진 2개 옥개석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뚜렷하다

 

 

 

축대 전면의 부재

 

 

기단면석

 

 

 

 계곡에 방치된 삼층석탑 옥개석과 노반석이  한 개 부재로 일체형이다. 노반 상부에는 찰주공이 보인다. 탑양식으로 판단컨데 효소왕 재위시 창건된 사찰(정확한 절이름을 알 수 없어 이렇게 표현했다)에 세워진 탑은 아니다. 다른 부재를 수습하면 더욱 정확한 조성시기를 추정 할 수 있겠지만 현재 부재로 미루어 9세기 이후의 탑으로 여겨진다.

 

석탑재가 산포된 사지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가 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며 심지어 사지표시가 없이 탑재만 소개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문화재청에서 2010년 발간한 한국사지총람에는 이곳을 비파곡사지3 석가사지, 조금 위쪽을 비파곡사지4 불무사지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2기 이상의 석탑재이며, 조성시기를 9세기로 추정한다.

 

 

선두에서서 길잡이가 되어 주신 두 분의 여자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201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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