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화순군

화순...나한산 만연사

임병기(선과) 2013. 10. 15.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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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사는 척불사상이 한창이던 조선시대 초기에도 자복사로 남아 있었을 만큼 비중 있는 고찰이다. 그러나 이 절에 관한 문헌이나 사적비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만연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설화만이 전하고 있다. 만연사 창건주로 알려진 이 만연선사는 실제로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설화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던 선사가 무등산 중봉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던 길에” 만연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은 송광사와 관련이 있는 스님임은 분명하다.

 

왜 나한산이란 특이한 산일까?

재미있는 창건설화가 전한다.

만연선사가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는 도중에 무등의 주봉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다가 만연사 중턱에 이르러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가고자 앉은 사이 언뜻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16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를 하고 있는 꿈이었다. 잠을 깨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눈이 내려 주위가 온통 백색인데 신기하게도 선사가 누운 자리 주변만 녹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었다. 그 길로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를 하다가 만연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선사 제6세인 원감국사 충지(1226 ~ 1293)스님의 『원감록(圓鑑錄)』에 보이는‘만연선노(萬淵禪老)’‘만연지공(萬淵之公)’이라는 인물이 바로 이 만연선사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원감록』에는 충지스님이 만연선노와 만연지공에게 보낸 몇 편의 시(詩)가 전하는데, 충지스님이‘선노(禪老)’니‘공(公) ‘등의 존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면 충지스님보다 최소한 20~30년 이상의 선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만연사는 조계산 수선사 창건주 보조국사 지눌의 사리탑을 모신 곳이고, 수선사 제2세인 진각국사 혜심의 비석과 영각을 모셨다”는 것은 이 사찰의 창건 시기를 혜심의 재세 전후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셈이다. 또한 수선사와의 관계가 특별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추정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는 향나무로 삼존불상과 십대명왕상, 16나한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사찰은 고려시대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6년(1406)3월까지 조계종. 총지종. 천태소우종. 화엄종. 도문종. 자은종. 중도종. 남산종. 시흥종. 신인종 등 11종만 존재하고 태종 7년에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 7종만이 남게 되었다. 이후 세종 6년(1424)에 교종·선종의 양종으로 통폐합될 때까지 만연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 전국 총남종 8사 중의 하나로 나주 보광사. 창평 서봉사. 인제 현고사 등과 함께 남게 되었다.

 

한편 만연사는 병자호란 당시에는 외적 방어에도 나섰다. 『창의일지(倡義日誌)』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 만연사의 지삼(智森)·지환(智環)스님 등이 종이 10속을 바쳐 군중일지(軍中日誌)를 만드는데 도왔다고 한다. 같은 달 다섯 항아리의 장과 마른나물 100묶음을 의병장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쌀 20말과 산나물 200묶음, 장지(壯紙) 5묶음, 유지 두 묶음, 삼으로 만든 신발 60켤레를 바쳤다고 한다.

 

정조 17년(1793)에는 절에 큰 화재가 일어나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국내 유일의 『진언집』판각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조정으로부터 통정대부 품계를 받은 경관스님이 도료장의 직책을 맡아 법당, 선당, 승당 등을 준공하였다고 한다. 6.25 이전까지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승당, 선당, 동상실. 서상실. 동별실. 서별실. 수정료, 송월료 등의 전각이 있었고, 대웅전 앞에는 큰 설루(說樓)가 있었으며, 그 아래 사천왕문과 삼청각 등이 있던 대찰이었다. 부속암자로는 학당암, 침계암, 동림암, 연혈암이 있었는데 6.25로 전소되었다가 1978년 이후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요사채가 복원되었고, 암자로는 선정암과 성주암이 있다. 그리고 일주문은 1998년에 세웠고, 명부전은 2000년, 범종각은 2004년, 한산전은 2005년에 수리 내지는 새로이 건축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비현스님이 괘불을 그리는 등 범종불사를 하였으며, 한말에는 당시 국창이던 명창 이동백. 이날치 등이 만연사에서 창악을 연마하였으며, 정광수, 임방울 등 당대의 명창들이 이곳에서 창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만연사는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사적지이기도 하다. 1980년 당시 계엄군의 학살만행에 항거하는 화순 시민군들이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탈취한 300여정의 무기를 숨겨 두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자 세운 표석이 입구에 서있다.

 

**보조국사 지눌의 사리각, 진각국사 혜심의 비석과 영각은 한국동란에 전화를 입었다. 화순군에서는 화순 출신 혜심선사의 유적비를 읍내 남산공원에 새롭게 조성하였다.

 

화우천

 

일반적인 건물명인 ***루가 아니라 화우천이다.

 

대웅전. 근자에 불사를 한듯 보였다.

 

만연사...진각국사 혜심

 

맨 처음 그 뉘가 이 터를 잡았던고
흥망성쇄인들 그 몇번이더뇨
유유히 흘러간 천년의 사연들이여
오직 문전의 옛 회나무만 알고 있으리.

 

만연사 괘불탱...출처/문화재청

 

조선시대 후기 1783년(건륭 48)년 3월에 금어 비현과 편수 쾌윤·도옥 등 3명이 그린 영산회상탱으로 화순 나한산 만연사에 봉안되었다는 화기를 가지고 있다. 제작에는 비현스님이 참여하였는데 비현스님은 선암사 괘불 봉안에서는 대화주로, 흥국사 괘불 제작에서는 금어로 활약하였다. 괘불의 크기는 가로 586cm, 세로 760cm이고, 괘불함은 길이 674cm, 너비 34 cm, 높이 31cm 이다. 푸른색이 화면 전반을 휩싸고 있는 이 괘불은 천의 일부와 가사를 붉은 색으로 채색했으며 바탕은 삼베이다. 적녹색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 강희, 건륭 연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조선후기의 특징이다.

 

본존불은 석가여래입상으로 육계와 나발을 갖추었고 눈은 정안으로 약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불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의 옷깃에 화려한 무늬를 더했다. 몸 주변에 그리는 신광은 없고, 머리주변은 둥글게 표현했는데 두광 내에는 녹색으로 칠하고 노랑, 빨강, 청색으로 돌려 문양을 내었다. 비슷한 크기의 형태로 왼쪽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상을, 오른쪽에는 덕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표현하였다. 두 협시는 지금까지의 삼존도 양식과는 달리 주존의 크기와 대등한 위치에 배치되어 조선 후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괘불 아랫면에는 제작연대와 괘불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불화를 그리던 화공들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괘불탱의 조성시기를 문화재청에는 정조 7년을 1793년으로 오기되어 있고, 전통사찰관광정보에는 본존불을 아미타여래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괘불지주 2쌍이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각 지주에는 간공이 위 아래로 2개가 뚫려있으며, 하단부에는 약간의 균열이 나 있으며 건립 시기는 괘불을 조성한 시기와 일치할 것으로 추정한다

 

 

맷돌

 

신구의 조화

 

 

대웅전 아미타삼존.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 삼존불로 대세지와 관음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대웅전에 모셔진 1929년 조성된 산신탱

 

 

대웅전에 모셔진 1929년 조성된 칠성탱

 

 

불두.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그림이 보이나, 매장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대웅전 밖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1660년(현종 1)에 조성한 동종은 높이 97cm, 종구 65cm이다. 용뉴는 높이 24cm 이고, 두 마리의 용이 각기 반대쪽을 향하여 머리가 천판에 거의 닿고 있으며 두 발의 발톱은 각기 3개씩인데 일부는 부러진 상태이다. 음통은 파손되고 없으나 지름 4.5cm의 구멍이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천판에는 12개의 연잎이 새겨져있고  아래에 일단의 띠를 돌렸다.

 

띠 아래에는 범자 18글자를 돌려가며 새겼고, 범자 아래에는 4개의 유곽이 있는데 유곽 안에는 각기 9개의 종유가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가로 25cm크기의 보살입상 4구가 새겨져있고 유곽아래에는 하대를 돌렸는데 하대 안에는 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종신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새롭게 범종을 조성하여 대웅전 축대위에 놓인 옛동종의 모습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새로운 전각이 아니더라도 임시방편으로 작은 안내문 이라도 설치하였으면 좋겠다.

 

 

부도 위치를 탐문했지만 공양간의 보살님들은 전혀 인지 못하고 있었다. 등산객 한 분이 입구 주차장에서 선정암쪽으로 올라가면 부도가  보인다고 했지만, 입구에서 만난 등산객 어느 누구도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설상가상 선방이 있어 차랑출입이 금지되어 인연을 짓지 못했다. 아니 인연을 다음으로 미루고 만연사를 떠나야만 했다. 대구시를 벤치마킹하여 전나무 2그루도 진각국사 혜심 나무로 명명하고, 입구 주차장 안내문에 부도전 위치도 표기하였으면 좋겠다.

 

2013.08.31

 

*전통사찰관광정보, 문화재청, 화순군청, 한국사찰문화재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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