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장마비는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자유로움을 즐긴다. 불순한 비는 피하면 되지만 먹이를 달라고 빨간불이 켜진 승용차는 끊임없이 채근한다. 하지만 예천군 상리면.하리면에는 휴일에 문을 연 주유소는 어디에도 없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쩔수 없이 문명의 이기에 노예가 된 스스로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명봉사는 통일신라 875년(헌강왕 1)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사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1662년(현종 3)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1668년에 다시 절이 전소되어 신익․행선 스님 등이 시주를 얻어서 크게 중창하였다. 이후 1807년(순조 7)에도 한 차례 중수가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어 버렸다. 그 뒤 1955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도
명봉사 무량수전 옆 부도. 통일신라 팔각 원당형 부도로 고려중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자연석위에 상대석, 부도신, 옥개석이 쌓여 있다. 본래의 위치인지 알 수 없으며, 중대석과 하대석, 상륜부가 결실되어 있다. 뒤집힌 것으로 보이는 상대석 위에 팔각의 부도신이 놓여 있는데, 한 면에는 문비가, 나머지 네면에는 사천왕상(?)이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팔각으로 골이 깊다.
문비.자물쇠 신장상
부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문화유적총림에는 조성시기를 고려중기 이후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미쳐 답사하지 못한 명봉사 법당 뒤에 위치한 941년에 세운 '자적선사 릉운탑비'(답사기 끝부분 참조)와 연계할 개연성은 없을까? 불교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 이론적으로 주장할 능력은 없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종태실비. 명봉사 사적비
명봉사 사적비. '소백산 명봉사 사적비명병서(小白山鳴鳳寺事蹟碑銘幷序)'는 문종대왕태실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비신의 형태나 용 무늬가 조각된 양식 등이 서로 흡사하다. 본래는 1785년에 건립된 사도세자태실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비를 깎아내고 지금의 명봉사사적을 기록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큰 말썽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사적기는 1940년에 권상로가 글을 짓고, 고영찬이 글씨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앞뒤 면에 모두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문종대왕의 태를 안치하고 세운 비. 무량수전 뒤편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때 이 자리로 옮긴 것이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과 귀부가 한 돌로 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 같이 하여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비늘이 목까지 덮고 있다.귀뒤에는 뿔이 달려있으며 그사이에 王자가 새겨져 있다. 이수는 방형으로 전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것을 양각했는데 몸체에 비하여 귀부의 처리기법이 둔중해 보이나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솜씨는 매우 섬세하다. 비산 앞면에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 뒷면에 '숭정기원후 일백팔십을묘'라 음각한 비명으로 보아 이 비의 건립 년대가 영조 11년(1735)임을 알 수 있다.
귀부 귀 뒷편 뿔이 보인다. 물갈퀴 꼬리
이수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릉운탑비'...문화재청 동선에 포함하고도 무엇에 홀린듯 미처 답사하지 못했지만 명봉사 동쪽뒷편 비각에 고려초에 세워진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릉운탑비'가 있다. 설명문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다.
명봉사에 서 있는 비로, 자적선사의 인격과 공적을 기리고 있다. 선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8년(882)에 태어나 효공왕 3년(899)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으며, 고려 태조 22년(939)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시호를 ‘자적선사’라 하고, 탑이름은 ‘릉운’이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비교적 규모가 크다. 규모에 비해 작아보이는 거북받침은 아쉽게도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갔는데, 용의 머리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전체가 실려 있으며, 1976년에야 비로소 판독이 되었다.
당시 중앙관서였던 도평성(都評省)에서 승려들에게 내린 글로서, 행적적인 양식을 갖춘 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비로,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접어들던 과도기적인 이두문자를 사용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두문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이 갖추어진 본격적인 문서양식으로서, 당시의 사회 및 문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13.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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