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2005.08.27 사진:2013.06.16
어떤이와 함께 했던 답사길에 장승 이야기를 하면서 서글픈 사대의 흔적도 보인다고 했더니 훗날 답사기에서 자기는 다른 생각이 있다고 기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혹 본질을 파악치 못하고 '사대주의'라는 말만 기억에 남은건 아닌지 그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 아직도 궁금타! 장승 몸에 새겨진 하원당(唐)장군,상원주(周)장군의 의미는 사악한 기운, 역병이 서쪽에서 온다는 민초들의 믿음 때문에, 우리나라의 서쪽은 중국이기에 중국 장군의 힘을 빌리고자하는 소박한 염원의 발로라는 설을 이야기한 것인데...
민초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장승과 달리 중국의 명장 관우을 향사하는 사당이 안동에도 남아 있으니 안동 관왕묘다.
관왕묘란 "중국에서는 명나라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서민에게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임란 때 명 군사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선조 31) 서울 남대문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됨을 위시해 같은 시기에 성주, 강진, 안동, 남원 등지에도 건립했다. 안동의 관왕묘는 1598년 안동에 주둔하였던 명나라 진정영도사인 쉬후첸(설호신 : 薛虎臣)이 목성산 기슭에 창건하였다."
광감루는 경사가 있는 곳에 터를 잡은 관왕묘의 외삼문격인 누대다. 일반적인 서원의 누대와 큰 차이는 없지만 누대 앞의 석상이 어느 폐사에서 가져온 금강역사라 눈살을 찌푸리게한다.개인적으로는 모전석탑, 전탑 감실 좌우에 시립해 있던 상으로 판단된다. 안동지역에는 아직도 전탑이 남아 있으며 폐허가 된 전탑도 다수 있다.
누구의 발상인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박물관에라도 모시지 선비의 고장, 추로지향이라 아직도 주자,유교를 신봉하기에 불교 문화유산을 관앙묘 파수꾼으로 세워두는 것인가?
금강역사상
"석질이 조 잡하여 앞뒤면 모두 심하게 마멸되어 안상이 확실하게 관찰되지 않 는다. 뒷면의 인왕상은 미완성품으로 생각될 정도로 거칠게 조각되 었으며 앞면의 인왕상은 오른쪽 손을 들어 주먹이 이마에 닿게 했 고 왼쪽손을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조각기법으 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문화유적 총람
후면의 불상(?) 때문에 전면의 인왕도상도 헷갈린다. 다른 작례가 있는가?
금강역사상
"우측을 보고 있는 인왕의 이목구비는 투박한편이나 풍만하고 길게 표현되어 있다. 얼 굴의 길이와 거의 같게 표현한 귀에는 귀걸이가 달려 있으며 오른 쪽 손은 장대한 금강저를 들고 있고, 왼쪽손은 아래를 향하 였다. 오른쪽 발은 악귀를 짓누르는 모습이며 왼쪽발은 연화좌를 밟고 있다."...문화유적총람
현재 마주보고 있는 두 상은 서로 다른 곳에서 가져온 상 아닐까?
너무도 차이가 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서재가 보이고 그 뒤로 무안왕묘 현판.내삼문 이다.
관왕묘
관왕묘 디딤돌로 사용하고 있는 연화대좌.
"무안왕비(安東關王廟武安王碑). 태화동 서악사 동편에 인접한 관왕묘의 묘당 건물내에 남아 있다. 상단에 무안 왕비라는 비표가 넓게 각자되어 있으며 내용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인 관우에 관한 기록이다. 각자가 얕고 일본인들 이 정으로 쪼아낸 흔적이 있어 전체의 해독은 불가능하다. 비신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인동당초문이 음각되어 있다."...문화유적 총람
관운장
"묘 안에는 석상(화강암)을 봉안했으며 원래에는 안동부성 서쪽 향교 맞은편에 있었으나 향인들이 문묘와 마주보고 있는 것을 꺼려 1609년(선조 39)에 서악의 동대인 현위치로 이건하였고, 1904년에 해체 복원했다. 관왕묘에 석상이 봉안된 곳은 이곳뿐인데 당시 안동부사의 현몽에 의해 무안왕상武安王像을 조성 봉안한 것이라 한다. 묘정에 있는 비는 1598년 건립된 것으로 당시의 명나라 군의 참전관계기사와 장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문인상
무인상
2013.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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