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양평군

양평...용문산 용문사

임병기(선과) 2013. 6. 15.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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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는 참배 기회가 여러번 있었는데 이번에야 인연지었다. 목조관음보살. 정지국사 부도 그리고 널리 알려진 은행나무를 답사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입구에서 원칙(?) 없는 차량 통행 문제로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아 경내로 향하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다. 일주문 편액은 일중 김충현선생의 글씨이다.

 

 

 

용문사는 통일신라시대인 913년(신덕왕 2) 대경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혹은 통일신라 말 경순왕(재위 927~935)이 행차하고 창건했다고도 한다.고려 말 1378년(우왕 4) 정지국사 지천 스님이 대장경을 봉안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조가 되기 전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보전을 지었고, 왕위에 오른 뒤 정희왕후와 더불어 대규모로 중창하였다.조선시대 후기에 조대비의 후원으로 크게 중수하였으나 구한말에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의 근거지가 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그 뒤 근대에 들어서 여러 차례의 중수와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용문사 경내 앞에 자리한 이 은행나무는 일명 정삼품송(正三品松)이라고도 부르는데, 용문사의 창건설화와 관련 있는 유서 깊은 거목이다. 수령이 1,100년 정도 되며 그 크기도 높이 60여m에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14m가 넘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로서 1962년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에 은거하기 위해 가던 길에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혹은 신라의 의상 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뿌리를 내려 자란 것이라고도 한다.


거듭되는 국난 속에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아 천왕목이라고도 했는데, 이를 기념하듯 나무 앞에는 ‘四方護世四大天王 南無統領八部四大天王 南無四天王上一切賢聖’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로 인해 세조 때 정3품 이상의 벼슬에게 주는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고종이 승하 했을 때는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미리 알려주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했다가 천둥과 번개가 일어 그만 둔 적이 있다. 그 때의 도끼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웅전

 

눈에 익은 글씨 아닌가? . 봉은사 추사 글씨를 판각하였다.

 

 

사군자 창호

 

 

삼존불.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보현보살

 

 

 

 

관음전 청동관음보살좌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다. 원만한 얼굴에는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체는 뒤로 약간 젖혀져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어,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보살상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의 소매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며 두 무릎을 덮고 있다.  수인은 중품중생인을 지은 채 길상좌를 결하였다.보관이 머리에 꼭맞지 않는 데다 목조이며,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보살관처럼 양쪽으로 흩날리는 관수식을 보이고 있어 원래의 관이 아니라 후대의 보수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슴과 양 무릎 사이의 구슬장식,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삼각형의 장식 등에서 전형적인 14세기의 보살상 양식을 볼 수 있다. 포항 장륙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나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보다는 신체의 표현이 덜 경직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이들 작품보다는 시대가 약간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전체적인 표현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것이 조선시대 초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나타내주고 있는 듯 하여 조형성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개금은 근래에 한 것이다. 크기는 무릎 너비 41㎝, 앉은 높이 76㎝이다.

 

 

산령각 편액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부도전

 

경내 참배후 부도전을 거쳐 10여분 산길을 따라 정지국사부도로 향했다.  

 

 

정지국사 부도비는 부도와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지국사 비는 머릿돌 없는 직사각형의 단순한 모양인데, 그러나 윗부분 양쪽 모서리를 마치 종이 끝이 접혀진 듯한, 이른바 모죽임 형태로 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 마름모꼴 부분이 비액의 구실을 하게끔 만들었다. 

 

비액의 전서는 4㎝ 정도의 크기이며, 비문의 글씨는 1.5㎝ 안팎의 해서이다. 비면의 글씨가 새겨진 주위로 가는 선이 그려져 있고 그 안으로 비문이 있는데, 전부 20행에 각 행마다 44자로 쓰여 있다. 측면에는 아무 기록이 없고 뒷면인 비음 부분에 조성자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문은 조선 초의 유명한 학자이며 문인인 권근(1352∼1409)이 지었다.

 

 

정지국사 부도

 

부도는 맨 위에 있는 상륜부 외에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으로서, 지대석과 하대석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나 상대석과 탑신부가 팔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식도 맨 아래서부터 장대석 위에 하대석·중대석·옥개석·상륜부로 된 구성을 하고 있는데, 각 부분은 대체로 완전하게 남아있지만 상륜부만은 일부 결실되고 둥근 앙련석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통일신라 말∼고려 사이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 부도의 걸작에 비해서는 작품성이 다소 뒤지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부도로서는 나름대로 단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정지국사의 입적 3년 뒤인 1398년(태조 7)에 세워졌다. 크기는 높이 215㎝다.정지국사 부도는 보물 제 531호로 지정돼 있다. 정지국사는 고려말 조선 초의 스님으로 중국의 구법승이었다고 한다. 1356년 공민왕 5년에 귀국하였며 그 후 면산을 두루 다니면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옹 혜근과 무학 자초가 국사가 되어 있었으나 그는 이를 싫어해 숨어서 살다가 1395년 조선 태조 4년 7월 7일에 입적하였다. 시호가 정지국사이고 미지산의 용문사에 태조가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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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전통사찰관광정보에서 발췌했습니다.

201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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