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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여주시

여주...파사산성

by 임병기(선과) 201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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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지

 

여주-양평 간 도로는 여러번 지나쳤지만 답사는 엄두도 내지못했었다. 이번에는 마애불도 뵐겸 작정하고 올랐는데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입구 차량진입금지 표시판을 무시하고 올라갔다가 혼줄이 났다. 결국 중간에 차량을 파킹하고 걸어서 돌아 보았다.  주차장에서 남문지를 거쳐 정상 까지는 30분이면 넉넉할 것 같다. 남한강을 조망하면서 느긋하게 성곽을 둘러보면 좋으련만 마애불을 뵙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야했다. 

 

 

파사산성주차장-남문지-정상-마애불-정상-동문지-남문지-주차장 순으로 답사하면 된다.

 

 

선인들이 남긴 파사성. 사대강이 마무리 된 오늘 파사성에 올라 남한강을 바라보며 글을 남긴 분은 없을까?

                          파사성...서애 유성룡        

                 

               婆娑城上草芊芊(파사성상초천천) : 파사성 위에 풀이 무성하고

                  婆娑城下水縈廻(파사성하수영회) :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굽어 돈다.

                  春風日日吹不斷(춘풍일일취불단) : 봄바람은 날마다 끊없이 불어오고

                  落紅無數飛城隈(락홍무수비성외) : 지는 꽃잎은 무수히도 성 모퉁이에 날린다.

                  道人神眼覷天奧(도인신안처천오) : 도인의 신령한 눈, 하늘의 진리 살피고

                  一夜昆明生刦灰(일야곤명생겁회) : 한밤에는 곤명지에 탄 재가 생겼구나.

                  金剛百萬奉指揮(금강백만봉지휘) : 금강 역사 백만이 지휘를 받드니

                  尺劍長嘯臨江臺(척검장소임강대) : 큰 칼 긴 휘파람 불며 강의 누대에 서있다.

 

 

                             촌 풍경...다산 정약용

             

         파사성 아래는 모두가 어촌

           밤새 내린 비로 모래톱엔 물 불은 흔적

           물가의 풀꽃은 너무 좋아서

           상앗대 하나로 아침 저녁 봄물을 건너네.

 

 

여주군청 홈페이지 설명문이다.

 

남한강(南漢江)의 동안(東岸)에 있는 해발 230m의 우뚝솟은 산위에서 서남쪽의 작은 계곡(溪谷)을  에워싼 석축(石築)의 산성이다. 남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새로이 개축(改築)된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산성(古山城)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는 여주(驪州)의 북방(北方) 53리(里)에 있으며, 둘레가 38,825척(尺)의 석축(石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산의 아래까지 포용한 대규모의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의 자태(姿態)를 연상케 하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이 산성(山城)의 전략적(戰略的) 중요성(重要性)을 다시 깨닫고 대대적인 수축공사가 진행되어 옛 고산성(古山城)의 실제 모습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동문지 부근

 

1595년(선조(宣祖)28) 3월에 비변사(備邊司)의 요청으로 승(僧) 의엄(義嚴)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수축(修築)하도록 하였는데 의엄(義嚴)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는 둔전(屯田)을 마련하고 군사(軍士)의 양식(糧食)을 마련하였으며, 무너진 성벽은 승인(僧人)을 동원하여 수축(修築)하여 1597년에 공사(工事)를 마치었다.

 

당시의 전략적 개념으로는 이곳이 남한강(南漢江) 상류(上流)의 요충(要衝)으로 용진(勇進)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성원할 수 있고 서울을 지키는 관문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보다 상류의 조령방면(鳥嶺方面)으로 보장(保障)을 삼으려는 계획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의 효용(效用)이 강조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수개(修改)가 없이 다시 퇴락되었다

 

 

성벽은 길이 936m쯤이 거의 옛 모습을 보여주며, 성벽의 높이가 4∼5m나 된다. 성벽은 그 상단이 내외협축(內外夾築)이며, 석재(石材)가 고르게 사용(使用)된 점, 지형(地形)의 이점(利點)을 최대한 고려하고 남문(南門)·동문(東門)의 시설을 두고 있는 점과 수구(水口)의 구조에서도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일반적인 산성양식(山城樣式)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문(南門)터에는 조선시대 수축(修築)의 팔각주형(八角柱形) 주초석(柱礎石)이 남아있다.

동문(東門)터는 옹문(擁門)의 구조로 되어 있고, 장대(將臺)터는 너비 17m, 길이 13m의 긴네모꼴로 남아있다. 한강 상류지방에 있어서의 독특한 수구(水口)의 형식을 가진 수구(水口)가 남문(南門)에서 동무방향 10m쯤 떨어진 성벽에 남아있어서 우리나라의 성터들이 가지는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성안 남문터 안쪽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지름이 5m쯤 되는 저수지 모양의 우물터가 있어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그냥

 

이포나루로 부르고 싶다.

 

201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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