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청도군

청도...주구산 덕사(떡절) 석조삼존불좌상, 석조지장보살좌상

임병기(선과) 2013. 3. 3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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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개의 형국인 주구산

 

오래전 모방송국 프로에 제보를 한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이 기억나지 않지만 "경북 청도에는 (       )가,이 있다"라는 질문을 던지면 패널들이 맞추는 프로로 기억된다. 정답은 (떡절) 이었다.물론 채택이 되지 않아 방영되지는 않았다. 왜 떡절이라고 불리었을까? 2006년 2월 나의 답사기의 일부다.

 

달아나려는 개에게 떡을 물려라.

 

경북 청도의 주구산에는 떡절이라는 참 재미있는 이름의 사찰이 있다. 물론 공식명은 덕사(德寺)로 걸고 있지만 인근 주민들에게는 떡절로 불리운다. 왜 하필이면 절에 떡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을까? 그 풍수적, 역사적, 지리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이 절의 소재지는 청도군 화양읍 소라리의 주구산(走狗山)으로 이 산의 정상에는 이서산성으로 불리우는 옛성이 있어 떡절이라는 이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주구산이라는 산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산의 이름은 走狗라는 명칭 그대로 개가 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화양 고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산은 그 형세가 마치 개가 내달리듯이 고을 밖으로 내빼는 형국이다.

 

산세가 빠지면 고을이 번영하지 못하고 쇠퇴한다고 믿었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를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우선 불교의 힘을 빌려 지령을 다스리고자 했으니 주구산의 머리 부분에 절을 지어 내빼는 기운을 부처의 힘으로 머무르게 하였다. 게다가 사찰 이름에 떡이라는 명칭을 붙여 개 형국의 산에 덕을 물려 줌으로써 달아나려는 山氣를 머물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가하고 있다. 떡절이 있는 위치는 주구산의 입 부분으로 개에게 떡을 물리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인근에는 주구산의 지세와 관련 재미난 민속 풍수적 경관으로서 떡 모양처럼 지어 놓은 3개의 조산이 발견된다. 현 송북리 들판에는 인위적으로 조성해놓은 3개의 흙무더기가 아직까지 현존하는데 흙무더기에 나무를 심어 놓았다. 떡절의 입지는 주구산의 전략적인 위치와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이서산성의 축조연대는 확실치 않고 이서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라가 이 산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여 이서국을 병합하기도 했고 또한 태조 왕건이 신라의 잔병들과 일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최원석/ 우리 땅 풍수 기행  

 

왕건과 관련된 달빛에 물든 이야기도 전해온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동 . 남으로 영토를 확장할 때 이 산성에서 저항하는 이들을 소탕할 방도를 봉성사奉聖寺 보양스님께 물으니 『犬之爲物 司夜不司晝 守前忘其後 宜晝擊其北(개는 밤에 지키되 낮에는 지키지 않고 또한 앞만 지킬 뿐 뒤는 지키지 않는다)』왕건은 이를 실행하여 저항하는 이들을 소탕 할 수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화양읍 소라리 덕사의 사적은 전하지 않지만 덕사가 된 것은 주구산에서 찾을 수 있다. 산의 형국이달리는 개 모양이며 그 비보로 덕절을 조성한 화양읍의 비보사찰 이다. 구전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현재의 덕사가 창건된 것은  조선시대로 알려져 있다. "청도군수로 부임한 황응규가 1576년(선조9)에 走狗山의 산세는 풍수지리학상 개가 달아나는 형상이라 하여 달아나는 개를 떡을 주어 머물게 하기 위해 절을 짓고 “떡절”, 한자로는 “餠寺”라고 표기하였으나 후에 변화되어 德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산보전

 

석조 석가모니삼존불 및 16나한상

 

영산전 불단에는 석가모니를 주존으로,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16나한상과 2구의 신장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에서 나온 발원문에 1678년 승호스님이 제작하여 밀양 청도면 소태리 고려시대 오층탑이 남아 있는 천주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이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발원문에는 상의 존명, 시주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복장품으로 묘법연화경 2책이 확인되어 2007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석가삼존불은 근래 개금하였고 나한상 역시 채색하였다. 석가불은 항마촉지인을 하였으며 협시보살 미륵과 제화갈라보살은 한 손은 손등을 위로하여 무릎 위에 두고, 한 손은 반대방향으로 두고 있으며 미륵보살은 연봉오리를 들고 있다. 16나한상 중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는 입상이며, 나머지 나한은 사자, 죽비, 호랑이, 새, 염주, 붓, 연꽃, 경전 등을 지니고 있다.

 

 

석조석가모니불좌상

 

 

석조미륵보살좌상

 

 

석조제화갈라보살좌상

 

나한상

나한상

 

조각승 승호...최선일/한국불교선리연구원/2010년

 

승호가 제작한 불상은 개별적으로 조사되었지만, 그의 활동과 불상 양식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각승 승호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은 1640년에 수화승 청허와 경남 거창 연수사 목조아미타불좌상(현재 거창 포교원 봉안)을 제작한 것이다. 그는 1655년에 수화승 도우와 경북 칠곡 송림사 배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을 제작하고, 1657년에 칠곡 송림사 대웅전 목조석가불좌상과 1668년에 경북 경주 기림사 대웅전 기와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그후 승호는 수화승으로 1678년에 경북 청도 화악산 천주사 석조석가삼존불좌상과 석조지장보살좌상(현재 청도 덕사 봉안)을, 1684년에 부산 기장 장안사 석조아 미타삼존불좌상을, 1688년에 경북 군위 인각사 석조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등을 만들고, 1704년에 경북 영천 수도사 노사나불괘불도 조성에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1707년에 수일, 두심 등과 전남 장흥 보림사 신법당신법당(新法堂)불상 개금과 불화 개조(改造)에 참여하였다. 그와 관련된 마지막 문헌은 1719년 경주 기림사 중수·도금발원문에 승호영가(勝浩靈駕)라는 문구를 통해 1717년부터 1719년 사이에 열반에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승호가 제작한 석조불상의 높이와 무릎 너비는 1:0.62-1:0.80으로, 조선 후기에 목조불상의 신체비례와 유사하다. 승호는 주로 응진전과 지장전에 불상을 제작하였는데, 이는 중소도시 사찰의 부속 전각이 1670~1980년대에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승호가 제작한 불상의 높이와 무릎 너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높이에 비하여 무릎 너비가 넓어지고, 신체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다. 승호가 제작한 불상의 대의 처리는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끝자락이 U자형이나 V자형인데, 수연과 수일이 조성한 불상은 펼쳐지거나 U자형으로 처리되어 차이가 있다. 특히, 승호가 제작한 불상의 하반신에 걸친 옷자락은 복부에서 수직으로 흘러내린 끝부분이 옷깃 같이 접혀 있다.

 

조각승 승호의 계보는 道祐(道雨, -1633-1664-) → 勝浩(勝湖, -1640-1719경-), 尙倫(-1657-1688-), 呂岑(-1678-1688-) → 守日(守-, -1675-1730-), 守衍(-1681-1709-), 守宗(-1684-1685-), 法宗(-1684-1730-)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조선후기 제작된 석조불좌상은 영남의 승호와 호남의 충옥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들이 활발하게 제작하였다. 조선후기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무기년명 불상 가운데 양산 신흥사 대광전, 울주 석남사 대웅전, 대구 동화사 영산전, 부산 육주사(통도사 성보박물관 봉안), 달성 용연사 영산전, 달성 북지장사 대웅전(석조보살좌상), 청도 대비사 대웅전, 창원 성주사 영산전, 고성옥천사 대웅전 등의 석조불좌상은 전체적인 인상이나 대의 처리 등에서 승호와 그 계보 조각승이 1680년부터 1720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원문과 사적기를 중심으로 조각승 승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1620년대 출생하여 승려가 된 후, 1640년대 불상 제작의 수련기를 거치고, 1650년대 중반에 부화승(副畵僧)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670년대 수화승(首畵僧)으로 경주, 청송, 기장, 군위 등 경상도 지역의 사찰에 응진전이나 지장전 등에 많은 석조 불상을 조성하였다. 특히, 그는 경주 기림사에 많은 시주를 한 점이나 조선후기 경주 골굴암에서 석조불상을 만든 원석을 채굴한 점으로 미루어 기림사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

 

석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입상의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삼존으로 모셔져 있고  좌우로 의자상인 10구의 시왕상과 녹사1구, 판관 1구, 사자 2구, 동자상 10구 등 총 28구가 배열되어 있다. 영산전 삼존불 처럼 1678년(숙종 4년) 천주사에서 조성된 지장보살상이다.

 

지장보살

 

시왕과 동자상

시왕과 동자상

 

유달산 88야불로 추측된다. 우측에 선명하지는 않지만 번호(十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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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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