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대구...팔공산 부인사

임병기(선과) 2013. 1. 17.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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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사에 관한 글은 여러번 올렸었다. 여기에서는 현재의 모습 사진, 자료는 전통사찰관광정보,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발췌했으니 우리님들 답사길에 참고 바랍니다. 

 




부인사 당간지주...광해대왕님 사진

 

많은 답사객들도 부인사 당간지주는 생소할 것이다. 나 역시도 두어차례 탐문했지만 아직 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팔공산 주면 절집에 온건한 당간지주는 동화사에만 남아 있고 송림사, 부인사 당간지주는 훼손된 상태이다. 부인사를 답사한 님들은 알겠지만 입구 포도밭에 위치하여 겨울철이 아니면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부도전

 

부도전 앞에서면 우리 아들놈 초딩시절이 생각나서 웃음짓는다. 2003년 초등생이던 아들과 둘이서 다녀온 글의 일부이다.

 

넓은 주차장 옆 석종형 부도와, 이형의 팔각 원당형의 부도가 우릴 반긴다. 석종형 부도는 큰 특징이 없는 조선조의 형식이지만 팔각형의 부도는 매력이 절절 넘치는 부도이다. 복련이 새겨진 하대석 모서리에는 영암사지 금당 기단의 사자새끼 같고, 강아지를 닮은 사자가 새겨져 있고, 얕은 중대석에는 이름 모를 동물과 원성스님 시집 '풍경' 속의 천진난만한 동자를 닮은 동자상이 두 팔을 들고 서있다.

연꽃 같기도 하고 국화꽃 같기도 한 문양을 보고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지애비가 안타까운 듯이 아들놈이 거든다.
-. 아빠는 학교 때 저거 안 배웠나?
-. ???
-. 저거 암모나이트 화석이잖아!

맞다! 연꽃이라고 짐짓 짐작하고 접근하는 알량한 나의 앎보다 저놈의 자유분망한 사고의 유희가 한량없이 부럽다. 택도 없는 발상이라도... 몸돌에는 부도의 주인공이 은통당 대사임을 의미하는 이름표가 있고 지붕돌은 기왓골이 깊고 겹처마가 뚜렷하며 우동마루가 높게 나타나 있어 마치 고건축을 보는 듯 하다.

 

 

부인사 사역 서편 골짜기에 있던 부도를 도난 사건 후 부인사 입구로 옮겨 복원하였다. 탑신에 은통당隱通堂이 새겨진  조선시대 부도로, 통일신라의 팔각원당형을 충실히 모방한 작품이다. 기단부·탑신부·옥개부로 구성되었으며, 상륜부는 근래에 복원하였다.  팔각 탑신석은 상하의 각을 오무린 배흘림이 분명하다. 옥개석은 상면에 우동과 기와골을 모각하고 우동의 끝에는 망와형의 귀면을, 아래에는 부연을 모각하였다. 

 

 

하대석은 방형 지대석 위에 완만한 연화문을 배치하고, 그 둘레에 연화문과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각 모서리에 동물상․동자상을 배치하고 각 면에는 화문을 양각하였다. 상대석은 윗면을 넓게 하고 주위에 앙련문을 조각하였다.

 

은통당 명문

 

입구 석축으로 미루어 옛 가람의 흔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옛부인사 중심 영역의 석축으로 추정된다.

 

부인사는 1993년 이후 전각 신축 불사를 통해 가람의 형태가 크게 변화된 모습이다. 현재 삼층석탑과 요사 건물이 있는 곳이 과거 부인사의 중심 사역이었으나, 현재는 구 사역(유적지)보다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신축 당우들이 자리하고 있다. 곧 전체적으로 사역의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된 모습을 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포도밭을 지나 누각인 삼광루(三光樓) 좌우측을 돌아 경내에 들어서면 금당인 대웅전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 왼쪽 위에는 산령각이 있고, 그 아래에 명부전과 석등이 있다. 삼광루 조금 위 왼쪽으로는 종각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선덕여왕의 영정을 봉안하 숭모전이 자리한다. 요사는 삼광루 오른쪽에 종무소를 겸한 커다란 건물이 있고, 숭모전 아래에도 또 다른 요사가 있다.
 
삼광루 아래쪽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과 삼층석탑이 자리하는데, 이곳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구역보다 조금 아래쪽이기는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에서는 이 자리가 금당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절 입구 주차장 바로 위에는 부도가 있다.

 

석조부재

동서삼층탑

 

창건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현재의 경내 말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예전 사역에 세워져 있는 숭모전(崇慕殿)은 바로 창건주인 선덕여왕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며, 그 안에 여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아울러 부인사에서는 요즘도 선덕여왕을 추모하기 위한 재를 별도로 지내고 있다.
 
전하기로는 선덕여왕의 묘도 사역(寺域)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 묘의 소재는 확인할 수 없다. 여하튼 부인사와 선덕여왕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부인사 사역에서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유적과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구전을 유물을 통해 확인하기는 어렵다. 
 
근래 발굴을 통해 발견된 탑전 건물지와 석탑 축대 등의 유물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다. 하지만 부인사가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사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곧 당시 왕실과 연결된 사찰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하나의 단서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부인사’ 명칭 문제
역사적으로 볼 때 부인사라는 절 이름은 符仁寺와 夫人寺, 그리고 夫仁寺 세 가지가 사용되었다. ‘符仁寺’로 표기되어 있는 자료는 『동국이상국집』ㆍ「창성사진각국사비」ㆍ『고려사절요』ㆍ『삼봉집』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夫人寺’라고 표기되어 있는 자료로 『고려사』ㆍ『신증동국여지승람』ㆍ『대구부읍지』 등이 있다. 그밖에 18세기에 작성된 「명부전이건기」 등의 자료에 ‘夫仁寺’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고려시대 대장각의 판각
부인사의 오랜 역사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사항으로 역시 고려대장경과의 연관성을 들 수 있다. 고려 현종대에 조성된 고려대장경, 즉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부인사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부인사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초조대장경은 몽고군에 의해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 고려에서는 국가적 사업으로 대장경을 다시 한 번 판각하였는데, 고려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인인 이규보(李奎報)는 1237년 군신들이 모여 그러한 다짐을 밝히는 성격으로 작성한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하도다. 몽고군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아둔하기는 또한 짐승보다 심하구나. (그들이) 어찌 천하에 (불상을) 공경하는 것을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던 불상과 경전은 모두 불에 태워져 버렸습니다. 이에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대장경 판본도 또한 남김없이 태워져 버렸습니다. 아, 여러 해를 걸려서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를 잃어버렸습니다.

 
현종 때 조성된 초조대장경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부인사에 봉안되었는 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이곳 부인사에 초조대장경이 봉안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몽고군이 부인사를 습격하고 초조대장경을 불태운 시기는 1232년, 혹은 그 직후로 보고 있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 때 부인사가 당했던 피해의 규모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장경을 불태울 정도의 상황이라면 거의 사찰 전체가 피해를 입는 참담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후 고려 후기의 고승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1307~1382) 스님이 이곳에 주석한 사실이 보인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던 부인사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다시 복원되었음을 알게 하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부인사
조선 건국 이후 불교계 전체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사는 계속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15세기 후반의 부인사 존속 사실을 알게 하여주는 자료가 정도전(鄭道傳)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에 실려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팔공산의 현존하는 사찰로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16세기 이후 18세기 중반까지의 부인사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부 자료에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소개한 경우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근래에 있었던 발굴조사에서 1677년과 1687년에 해당하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된 바 있는데, 이를 통해 17세기 후반 무렵 기와를 고치려고 했던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명부전을 이건하는 불사가 있었는데 현재 이 불사와 관련된 자료 두 점이 전하고 있다. 「부인사명부전이건기」와 「부인사명부전이건상량문」이 그것인데, 두 자료 모두 조선 후기의 고승으로 손꼽는 인악 의첨(仁岳義沾)이 1788년에 지은 것이다. 이들 자료를 통해 18세기 후반 무렵의 부인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선당, 명부전, 미타암, 요사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때 2,000여 명의 승도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부인사는 그 규모와 역사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고려 초조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사 전체에서도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부인사 사역에 대한 세 차례의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아직까지 초조대장경과 직접 연관된 유물 유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추후 나머지 사역에 대한 집중적 조사를 통해 초조대장경의 봉안처였음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유물 유적이 발견된다면, 부인사의 역사적 위상은 더욱 새롭게 부각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서탑

 

부인사 서탑은 본래 쌍탑이었으나 1964년에 서탑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 즈음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하기단과 갑석은 4개의 돌로 짜여졌으며 갑석상면에는 괴임을 각출하고 면석에는 탱주 하나와 양우주를 새겼다. 상기단은 탱주와 우주가 새겨진 면석을 4매의 판석으로 짰고, 갑석 아래에는 부연을 나타냈으며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각출했다. 각층의 옥신과 옥개석은 모두 한 개의 돌로 되었으며 옥신에는 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은 하면에 5단의 옥개받침과 상면에 2단의 괴임을 각출했다. 낙수면은 완만하게 흐르다가 반전하였다. 꼭대기에는 찰주를 삽입했던 방형 노반만 남아 있다.

 

기단

탑신

 

동탑

 

서탑과 쌍탑으로 추정한다면 복원에 문젯점은 없는가? 서탑은 2기단으로 지대석과 하기단이  하나의 돌로 4개 부재가 결구 되어 있다. 그런데 동탑은  기단을 3기단으로 조성하고 탱주도 위로부터 1:2:3으로 모각하였다. 3기단으로 조성된 석탑은 구례 연곡사에도 남아 있다.

 

 

동.서탑은 1964년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복원되었다. 당시에도 동탑 부재는 이미 다른 전각 복원의 부재로 활용되어 서탑만을 복원하였으며 근자에 현재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서탑은 상층 기단 일부만 본래 석탑 부재이다.

 

동서삼층탑

 

많은 자료에는 쌍탑이라 했건만 우리의 장인들이 이렇게 기단을 달리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증을 거쳤겠지만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소맷돌

 

석등과 배례석

 

 

배례석

 

 

옛대웅전 앞에 위치한 팔각원당형 석등이다. 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수습된 부재를 복원하였다. 석등은 현재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화사석은 인근에 있던 다른 부재를 복원한 것이다. 석등은 추녀가 길고 얇으며 곡면도 유려하여 경쾌감을 주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전한다.

 

 

석등의 기단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복판의 연화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기단부의 측면에는 각 면마다 2개의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3단의 팔각 받침을 만들어 간주석을 받도록 했다. 상대석은 복판 중엽의 연화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상면에는 3단의 괴임을 각출하였다. 옥개석은 상부에는 연화문 띠를 모각하였다.

 

 

화사석은 다른 석등 부재로 크기가 작아 보인다.

 

 

삼광루

대웅전

 

대웅전은 현재의 위치까지 포함하면 전부 세 차례 자리를 옮겼다. 최초의 대웅전 위치는 현 부인사 남쪽의 대 축대와 접한 곳으로, 부인사 3차 발굴조사보고서에 탑전 건물지로 명명된 지역이다. 두 번째 위치는 그보다 북쪽으로 이동된 현 신축 사역으로 오르는 계단지와 접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는 4~5차례 건물 변화가 있었음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부인사의 대웅전 위치는 점차 북쪽으로 이동되어 건립되는 양상을 보인다.
 
현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로, 중앙 3칸이 양쪽 측칸보다 넓은 것이 특징이다. 문은 화려한 솟을 빗살창으로 장엄되어 있으며 천장 부분은 우물반자로 마감되어 있다. 내부에는 후미 중앙에 불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는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고 있다. 불단에는 후불탱화와 함께 석가 삼존불을 비롯하여 전부 5위의 불보살상을 봉안하였다.

 

부인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승려들의 시장이 자리했던 절집으로 알려져 있다. 근자에 대구시와 동화사를 중심으로 매년 10월 다양한 행사와 체험을 할 수 있는 승시가 열리고 있다.

 

 

2012년 개최된 승시의 스님 씨름대회...인드라망 깍쟁이신랑님 사진

 

 선원

 현음각(범종각)

명부전과 석등

 

부인사 근처 이름이 전하지 않은 절터에서 가져온 석등이다. 이석등은 화사석이 편팔각형의 유례가 없는 석등이다.하대석·간주석·상대석·옥개석은 본래의 부재이지만 화사석과 상륜부는 새로운 부재로 복원하였다

 

 

 장방형 지대석의 측면에는 2조의 안상을 모각하였고, 상면에는 연화 받침으로 장식되어 있다. 앙련 형태로 장식된 상대석은 상부에는 3단의 받침이 각출되어 있고, 하부에는 2단의 부연과 중앙에 간주석을 꽂기 위한 홈이 있다.

 

 

 화사석은 파편을 통해서 복원한 것으로 넓은 측면에는 장방형 화창을 2개, 좁은 면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옥개석은 정상부에 편팔각의 홈과 괴임을 만들었고, 괴임 둘레에는 연화문대를 조각하였다.

 

 

팔각화사석. 마치 두 개 화사석을 합쳐 놓은 모습처럼 보인다. 절터에서 깨어진 상태의 조각들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산신각

숭모전

 

숭모전은 탑이 있는 구 사역의 서쪽에 새로 조성한 전각이다. 계단을 갖춘 높은 축대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선덕여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매년 4월 숭모제가 봉행된다. 숭모전은 본래 남쪽의 대 축대 아래에 위치하였는데 선덕여왕의 진영을 봉안하던 성덕묘 건물을 허물고 이 자리에 신축한 것이다.

 

 

 

                                2012년 제26회 선덕여왕 숭모제...사진/BBS NEWS

 

 

                                                                                2013.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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