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강진군

강진...월남사지 삼층석탑. 진각국사 비

임병기(선과) 2012. 12. 11.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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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에 다시 찾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터. 월남사는 진감국사 혜감(1178~1234)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1799년(정조 23) 왕명에 의해 편찬된 사찰지 범우고에 '월출산에 있으며 이규보가 찬한 비기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00년대 초에 발간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월남사의 옛터로 전하며, 정유재란시에 무위사만 소실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임란. 정유재란시에 전화를 입어 폐사된 것으로 전한다.

 

 

"월남사지 (1995.9.30, 목포대박물관 학술총서 제36책)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위치한 월남사지와 월남사 관련 문헌과 주변유적에 대한 정밀지표조사 보고서이다. 조사는 1994년 12월부터 1995년 8월까지 이루어졌다. 내용은 월남사지의 역사문화적 배경, 월남사의 연혁과 그 변천, 월남사지 유적·유물, 월남사지 주변일대 유적, 월남사지의 정비 복원 방안 등으로 나누어 정밀조사한 결과 이다.

월남사지는 월출산 남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체규모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 였던 것 같다. 현재 외곽담장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 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 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약 1만여평에 달하고 있다.

가람배치 형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만들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 치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좌·우측으로도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대지를 조 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軸線은 대웅전을 중심으로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 뿐이지만, 기와류는 다양하게 수습되 었는데 문양, 태토, 소성도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말∼조선시대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은 극소수이고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주 를 이룬다. 자기류도 완, 접시, 병, 대접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는데 모두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이다."

 

 

월남사터에 삼층석탑,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정림사지 석탑 옥개받을 연상하게 하는 형식이며 추녀는 매우 넓고 상하 수평으로 나가다가 모서리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볼 수 있다.

 

 

탑 조성에는 흔치 않은 슬픈 전설도 전해내려오니...

"옛날 이 3층석탑을 만든 석공에게 젊고 아리따운 아내가 있었다. 공은 아내에게 탑을 완성할 때까지 절대 아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월남사로 떠났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는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운 남편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 몰래 월남사를 찾아갔다. 아내는 먼발치에 숨어서 탑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을 훔쳐보았다. 불사에 열중한 남편은 그 일에만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지 수척해 보였다.


돌아서려던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봤다.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그가 완성직전에 있던 석탑은 조각나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는 돌로 변해버렸다. 석공은 돌이 되어버린 아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일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석공은 인근을 뒤져 석재를 구했으나 쓸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그의 부인이 화신한 돌을 쪼아 다시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월남사

 

월남사 후원 석조부재.월남사에는 이 석탑 외에도 2기의 석탑이 더 있었다고 한다.

 

 

월남사 시굴현장.금년 2월 1차 조사가 완료 되었으며, 현재는 2차 조사기 진행되고 있는듯 보인다.

 

 

2월 신문기사를 보자. " 고려시대 진각국사 혜심(178~1234)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출산 남쪽자락의 월남사지(月南寺址·전남도기념물 제125호)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강진월남사지의 정비복원 기초자료 확보와 문화자원 활용을 위한 이번 시굴조사는 강진군의 의뢰로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이 지난해 말부터 한달여 동안 강진월남사지 3층석탑(보물 제298호) 주변에서 진행했다. 조사 결과, 건물지의 구조에서 12~13세기에 중점적으로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다량 출토됐다고 군은 전했다.

유적의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군은 기대하고 있다. 특히 우수한 청자유물 출토로 강진 고려청자를 재조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기록만 있을 뿐 정확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는 월남사지는 주변에 월남원(月南院)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강진에서 영암으로 가는 길목인 풀치재(草峙)가 있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강진월남사지 3층석탑(보물 제298호)과 강진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가 있어 당시 사세(寺勢)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동안 학술조사는 1994년에 있었던 목포대박물관 지표조사가 전부였다.

출토 유물은 기와와 도자기가 대부분이며, 기와류는 고려시대 제작이 확인되고 있다. 귀목문(鬼目文) 수막새와 연화문 암막새의 존재는 건물지 위상이 높았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군은 전했다. 자기류는 고려시대 청자가 가장 많았는데, 12~3세기의 완(碗)과 접시, 잔, 병, 향로, 의자, 베개 등 다양하고 많은 양이 출토돼 관심을 끈다. 도철문(�O�K文) 사각향로와 팔각향로는 의례용이며, 의자와 베개 등 특수기종과 건물벽면 장식용으로 보이는 청자도판(陶板)은 출토사례가 드물다고 한다.

윤순학 강진군문화관광팀장은 "출토된 고급 유물들은 당시 강진 월남사의 권위와 화려한 청자문화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강진군은 월남사의 전체 부지와 건물배치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올 하반기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월남사 진감국사비. 비석은 강진군 월출산 기슭에 위치한 월남사 창건주로 송광사 16국사 중 제2조인 진각국사(1178∼1234)를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고종 때 건립되었다.  진각국사의 속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식, 호는 무의자이고 법명은 혜심으로 화순현 사람이다. 고려 신종 4년(120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후 모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출가하였다. 출가한 후 보조국사 지눌의 문하에서 선학을 닦아 그 뒤를 이어 수선사의 제2세가 되었다. 그후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선사가 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어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발톱에서 보이는 현실성이나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잘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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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나주 밤나무 정자거리에서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형 정약전과 이별하고 강진으로 가던중 이곳을 지나면서 읊은 시이다.

 

누리령((樓犁嶺)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

 

201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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