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강진군

월출산 불교문화유산을 찾아서...우왕골 귀부형 석등 대좌. 석탑재. 양면불

임병기(선과) 2013. 4. 16.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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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카페 이홍식님(도굴단 두목)님.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 학계의 저명한 교수님, 남불회를 이끄시는 40년 마애불 답사의 장인 이순규 회장님. 목포 MBC. 도갑사 이영현 종무실장님. 문화재청 이경화 박사님.송광사,용인시청 학예사님  그리고 우리카페 회원님들과 '월출산 불교문화를 찾아서' 행사에 다녀왔다. 월출산 산행, 훌륭한 설명, 맛기행, 남도의 인심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사족이라 여기며 단견이지만 문화재 중심으로 전개하겠다.

 

 

 

 

개방되지 않은 탐방로이다. 사전에 공원사무소 허락없이는 출입이 금지된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홍식님

 

우왕골 귀부형 석등대좌

 

이행사를 기획하기 전까지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다. 이번에도 양면불 탐방 계획중에 우연하게 확인되어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탓에 관련 자료도 부족했지만 짧은 시간임에도 남산 천룡사 귀부, 여수 흥국사 석등 귀부와 천연성을 찾고 부연설명을 해준 우리카페 민학기(달넘새)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번에 동행한 순천대 최인선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이곳 폐사지는 문헌, 연혁 등 사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민학기님이 현장에서 설명한 내용은 이렇다.

 

귀부형 석등대좌는 경주 남남산 천룡사지 귀부형 경문經文대좌를 시원으로 계보를 추정 할 수 있으며 고려 후기 우왕골 석등대좌를 거쳐 조선 후기 여수 흥국사 석등 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자료의 근거로는 대좌 주위에 산포한 석탑재를 기준으로 그 편년을 추적하였으며 위에서 언급한 최인선 교수의 월출산의 불교문화 논문 자료에도 언급된  조금 떨어진 경사면 폐사지 양면석불의 조성시기 편년과 일치한다. 석탑재도 강진 금곡사(1050년 추정) 석탑재의 계보로 추정하였으며, 귀부를 어룡으로 해석하여 반야용선의 상징성으로 표현하였다.

 

 

민학기님의 탁월한 해석에 동의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아무런 에비던스도 없이 느낌 아니 '감'으로 소설 한편 탈고 하고저 한다.(그냥 상상의 나래이다) 그 시작은 주변에 있는 해주 최씨 비석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민묘의 주인공이 해주 최씨 였으며, 고려초기 월출산 불교유적 조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인물도 영암의 호족 최지몽이라고 전한다.(최지몽이 해주가 관향인지도 확인 못했다)

 

월출산 불교유적은 백제시대부터 사료가 있지만 고려전기에 꽃을 피웠으며, 그 배경으로는 도선국사, 형미대사 등 선승의 영향과 영암호족 최지몽의 지원으로 추측된다. 그시기에 조성된 지근의 유산으로 무위사 형미부도비, 도갑사 미륵불, 오층탑. 구정봉 마애불 석탑.성풍사지5층탑. 청풍사지5층탑(전남대 박물관?). 무위사 삼층탑 등이 산재한다.

 

석등 귀부 주변에 흩어진 석탑재의 조성시기는 언제 였을까?(석등귀부와 동시대로 민학기님은 추측하였다)

 

월출산에 불교문화유산 전성기 즉 고려초기에는 통일신라 하대에 도선에 의해 도입된 풍수지리가 우리나라 전역에 노도 처럼 트렌드가 형성된 시기이다. 문화의 패러다임 역시 이전과 달리 새로운 전형이 창조되기 시작했으며 그 대표적인 현상의 하나가 비보탑으로 우리나라 각지 이름있는 산 정상에는 비보탑이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왕골 석탑도 석등귀부와 동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고려초기 비보탑으로 보면 어떨까? 이홍식님의 잠깐 설명도 있었지만 산아래에는 와우형을 비롯 풍수의 다양한 형국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월출산의 기氣를 염승할 상징의 비보탑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편년의 차이가 있는 석등 귀부는 어떻게 해석 될까?

 

민묘의 탑에 새겨진 명문에 주목해 보자. "금강거사해주최공현지묘海州崔公之墓" 명문으로 미루어 비록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이분은 재가불교신도로 불심이 돈독하며 오늘날 불교 포교사 이상의 실력을 갖춘 분으로 생각되는 것이 금강거사 錦江居士 명문으로 충분히 이해된다. 그렇게 보면 민묘 조성 이전에 석탑은 도괴된 상태로 묘를 쓰면서 후손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사의 후손들이 멀쩡한 석탑을 훼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민묘 조성시기를 알면 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은데...)

 

석등? 이석등은 본래 자리가 아니라 양면석불이 있는 암자터에 위치한 석등으로 불심 돈독했던 선친에게 빈자일등의 정성과극락세계 왕생을 염원하며 후손들이 장명등 처럼 활용할 목적으로 무덤 앞으로 옮겨 온 것으로 보면 어떨까? 현재로 과거를 읽을 수 없지만 석등, 탑, 그리고 금당자리가 있을 만큼 부지는 넉넉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석탑은 고려전기 비보탑이며, 고려중후기에 조성된 귀부형 석등은 암자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소설 한 편 탈고하고 싶다.

 

문화사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겠지만 봄날에는 꿈도 꾸어야 한다. 아주 자유롭게...(민학기님 죄송 합니다)

 

 

경주 남산 천룡사지 귀부

 

 

 

 

여수 흥국사 귀부형 석등

 

 

 이번 경기 나들이에서 만난 수원박물관 비석 귀부

 

우왕골 귀부와 비교된다. 역시 앞발을 들고 있는 흔치 않은 모습이다.

 

도약하기 직전의 귀부이다.

 

 

 

비좌홈 하부 연문양으로 미루어 신도비 보다는 부도탑으로 여겨진다.

 

 

도갑사 도선국사비

 

 

 

석탑 옥개석

 

 

비좌의 탑신석

 

 

층급 4단의 옥개석

 

 

층급4단 옥개석

 

 

석탑 기단부

 

 

석탑 초층 옥신과 감실

 

 

강진 금곡사 삼층탑

 

 

우왕골 양면불 전면(?)

 

 

전체적으로 희미하다. 소발에 육계는 높고 보이고 삼도는 표현되지 않았다. 원만한 상호의 이목구비는 확인되지 않고,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전하며 항마촉지 수인으로 보인다. 불신에 비해 무릎이 불안정하다.석가모니불 도상으로 추측되나 양면불의 성격상 앞뒤에 같은 석가모니불을 모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면석불은 전면에 비해 양각된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본래는 광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발에 육계가 높고 코는 길고 입가에는 미소만 희미하게 보인다.귀는 길며 삼도가 표현되었다. 항마촉지 수인,  우견편단 법의로 가슴 주변에 옷ㅈ주름이 새겨져 있다. 최인선교수의 논문에는 고려 후기 작품으로 기술되어 있다.

 

 

 

답사에 동행한 남불회 회장님 이순규님의 전언에 의하면 양면불은 탐사객에 의해 뒤집혀지길 반복하여 안타갑게 생각한 강진 탐진향토문화연구회와 광주 남도불교문화연구회원들이 1992년 4월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본래 위치와 좌향은 분명하지 않다.

 

 

 

배례석. 본래 부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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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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